일러스트 정윤경
인생을 주인공으로 살고 싶거든
정찬주(소설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무정물은 빛과 그림자가 있다.
햇빛의 광휘보다 그림자가 길어지고 짙어진 초겨울이다.
요즘에는 눈부신 빛에 가려졌다가 사라지는
그림자를 무심코 바라보고 있는 시간들이 길어졌다.
그림자로 살다간 사람들을 위해 맑은 차를 올리고 싶어진다.
허공이 있으므로 다리를 놓을 수 있는 것처럼
그림자가 없다면 어떻게 빛이 존재할 수 있을까?
빛의 광휘란 그림자의 헌신이 있기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절의 법당 중에서 대적광전처럼 찬란한 이름이 또 있을까.
부처의 대광명이 세상을 향해 두루 비추는 곳이 대적광전이다.
나는 어느 절을 가건 가장 먼저 대적광전 앞에 서기를 좋아한다.
통도사에 들를 때도 참배객들이 많은 적멸보궁보다는
스님의 독경소리가 끊이지 않는 대적광전에 먼저 눈길을 주곤 했다.
대위광동자가 부처님을 찬탄하는 <화엄경>의 한 구절이었을 것이다.
부처님이 대광명을 두루 비추사
형색 모습 가이 없이 지극 청정하시네.
구름이 모든 세상에 가득하듯이
곳곳에서 부처님 공덕을 찬탄하네.
서로 빛이 비치는 곳마다 넘치는 환희여
중생이 가진 고통 씻은 듯이 벗었도다.
이런 독경소리를 듣는 순간에는 어둔 가슴에
등불이 하나 켜진 듯 환히 밝아지는 것을 느낀다.
독경소리뿐만 아니라 고승의 법문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나는 성철 스님의 일대기 <산은 산 물은 물>을 집필하기 위해
원택 스님이 보내준 스님의 <백일법문> 녹음테이프를
서울의 내 집 거실에서 새벽마다 들었는데,
그때마다 해가 비추는 것처럼 방안이 환해짐을 경험했던 것이다.
특히 <반야심경>에서 색공(色空)의 세계를 법문하시는
대목에서는 내가 대적광전에 들어 법신(法身) 부처님에게
설법을 듣는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
성철 스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반야심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아니하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니라.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이란 유형을 말하고 공이란 무형을 말합니다.
유형이 곧 무형이고 무형이 곧 유형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유형이 무형으로 서로 통하겠습니까?
어떻게 허공이 바위가 되고 바위가
허공이 된다는 말인가 하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바위가 허공이고, 허공이 바위입니다.
어떤 물체, 보기를 들어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을 자꾸 나누어 가다 보면 분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분자는 또 원자들이 모여 생긴 것이고,
원자는 또 소립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입니다.
바위가 커다랗게 나타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분자-원자-입자-소립자로 결국 소립자 뭉치입니다.
그럼 소립자는 어떤 것인가?
이것은 원자핵 속에 앉아서 시시각각으로
‘색즉시공 공즉시색’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가 충돌에서 문득 입자가
없어졌다가 문득 나타났다가 합니다.
인공으로도 충돌 현상을 일으킬 수 있지만 입자의
세계에서는 자연적으로 자꾸 자기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입자가 나타날 때는 색이고, 입자가 소멸할 때는 공입니다.
입자가 유형에서 무형으로의 움직임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연히 말로만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 저 깊이 들어갈 것 같으면 조금도
거짓말이 없는 것이 확실히 증명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과학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는
성철 스님의 독창적인 법문이었다.
그러나 불자들이 오해를 잘하는 부분인데
‘불교가 곧 과학’이라는 등식은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법문하는 스님이 과학을 방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고,
과학자가 불법에서 영감을 얻을 수는 있지만 말이다.
뿌리는 대로 거둔다는 인과의 도리도 물리학의 질량불변법칙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불법의 인과와 질량불변법칙이 같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상(色)들은 서로의 관계로 변화하므로 무엇이 있는 듯 보이지만,
꼭 집어서 얘기할 수 있는 실제적인 주체나 실체는 없으므로
바로 그것을 부처님께서는 공(空)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줄여서 색불이공, 색즉시공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를 감싸고 있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의 공성(空性)을
체득하는 것이 바로 견성이고 깨달음이 아닐까 싶다.
극락암에 주석하셨던 경봉 스님도 공의 도리만 깨달으면
무엇에 끌려다니지 않고 연극 같은 인생을
주인공으로 멋들어지게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자기답게 사는 주체적인 삶을 말씀하신 것이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