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아버지를 잘 섬기라
‘효도를 하고 싶어도 부모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다고 하지요. 일찍이 아버님과 사별하고, 몇 해 전 어머니마저 돌아가셔서 부모 없는 처지가 된 제 입장에서 효를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부모님을 생각할 때마다 ‘살아계실 때 조금 더 신경을 써 잘 해드릴 걸, 조금 더 부드러운 말고 밝은 표정으로 대해드릴 걸’이라는 아쉬움이 밀려옵니다. 나름 효도를 한다고 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모든 것이 부족했습니다. 제사와 차례를 정성껏 모시고, 묘소를 찾아 인사를 드리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부모님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의미를 제대로 알겠습니다.
우리 부부에게 법명을 내려주신 무진장 스님은 생전 법문에서 자주 ‘절에 있는 부처님보다 집에 계신 부처님께 정성을 다하라.’고 경책하곤 하셨습니다. 집에 계신 부처님이란 부모님을 말하는 것이지요. 막상 부모님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니 스님의 가르침을 소홀히 여겼던 게 후회로 남습니다.
조선 정조 20년(1796년) 용주사판 〈부모은중경〉 제1도(ⓒ원주 고판화박물관)
부처님께서는 <망갈라숫따>에서 행복해지는 열한 번째 지침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잘 섬기는 것(The support of father and mother.)’을 제시하셨습니다. 익숙하면 방심하게 된다는 말이 있듯이 너무도 당연한 지침이기에 되레 지키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경험담이기도 하지만 불효하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불효를 하고도 불편함이 없다면 정상이 아니겠지요. 본의 아니게 부모님을 서운하게 했거나 작은 말다툼이라도 한 날이면 하루 종일 마음이 무겁고 가슴이 갑갑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부모님을 불편하게 하면 몇 배는 더 불편해지는 과보를 받는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를 왜 그때는 절감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식으로부터 불편한 대접을 받은 부모의 마음은 자식보다 몇 배는 더 아팠을 것이니, 가슴이 먹먹해 옵니다. ‘후회해도 소용없고 울어 봐도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지만, 효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불교는 효와 크게 관련이 없는 종교로 인식되곤 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출가라는 것이 부모님을 버리고 가출해 세속의 인연을 끊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중국에서는 불교가 가혹한 탄압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불교를 효와 관련이 없는 종교로 오해하는 분들이 없지 않습니다. 얼핏 보면 그런 오해를 사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불교에서도 효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효와 관련하여 꽤 많은 설법을 하셨습니다. 경전 등 불교의 기록들이 주로 장로비구들에 의해 결집되다보니 상대적으로 삼장(三藏)에서 재가자를 향한 법문의 분량이 빈약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더라도 부처님께서 효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경이 눈에 띕니다.
‘불교판 효경(孝經)’으로 일컬어지는 〈부모은중경〉은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는 당위를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어머니가 자식을 잉태하여 열 달 동안 겪는 10가지의 고통과 희생, 출산하고 양육하면서 자식에게 베푸는 열 가지의 은혜에 대해 설법하십니다.
열 가지 부모님의 은혜(十大恩)를 살펴보면 ① 품에 잉태하고 열 달 동안 지켜 주신 은혜[懷耽守護恩], ② 해산날에 즈음하여 고통을 이기시는 은혜[臨産受苦恩], ③ 자식을 낳고 근심을 잊는 은혜[生子忘憂恩], ④ 쓴 것을 삼키고 단 것을 뱉어 먹이주신 은혜[咽苦吐甘恩], ⑤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누여주신 은혜[廻乾就濕恩], ⑥ 젖을 먹여서 길러주신 은혜[乳哺養育恩], ⑦ 손발이 닳도록 깨끗이 씻어주신 은혜[洗濁不淨恩], ⑧ 먼 길을 떠나갔을 때 걱정해주신 은혜[遠行憶念恩], ⑨ 자식을 위하여 나쁜 일까지 짓는 은혜[爲造惡業恩], ⑩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시는 은혜[究意憐愍恩] 등 입니다.
초기경전에도 부모님 은혜의 지중함을 강조한 경전이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평등한 마음의 품 ‘부모의 경’에는 부모님의 은혜가 커서 갚기가 쉽지 않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두 분에 대하여는 은혜를 갚기가 쉽지 않다. 두 분이란 어떤 분인가? 어머니와 아버지이다. 수행승들이여, 한쪽 어깨에 어머니를 이고, 한쪽 어깨에 아버지를 이고 백년을 지내고 백년을 살면서 향료를 바르고 안마를 해주고 목욕을 시키고 마사지를 해드리며 간호하는데,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깨 위에서 똥오줌을 싸더라도 수행승들이여, 어머니와 아버지로 하여금 이 일곱 가지 보물(칠보: 금 은 진주 보석 묘목 금강 산호)로 가득한 대륙의 지배자로서 왕위에 취임하도록 하여도 어머니와 아버지의 은혜를 갚지 못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이들을 낳고 양육하여 세상에 내보내는 많을 일을 행했기 때문이다.”
낳아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고, 길러주고, 세상에 내보낼 때까지 돌봐준 부모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지 잘 드러내주는 가르침입니다. 이 경은 이어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 가장 수승한 방법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믿음이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믿음을 권하고, 믿음에 들게 하여 계행을 확고하게 하고, 간탐이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보시를 권하고, 보시에 들게 하고, 보시를 확고하게 하고, 지혜가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지혜를 권하고, 지혜에 들게 하고, 지혜를 확고하게 하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은혜를 갚는 것이며, 넘치게 갚는 것이다.”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최상의 길은 부모님을 바른 가르침 즉 정법(正法)을 믿게 하고, 바른 믿음에 바탕하여 보시의 공덕을 쌓도록 인도하며, 궁극적으로는 수행의 길로 이끌어 반야의 지혜를 얻도록 해드리는 것입니다. 건전한 몸과 마음을 갖추고, 나아가 수행의 길로 안내해 반야를 증득하도록 해드리면 자연스럽게 정견이 성취되고 해탈과 열반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생후 7일 만에 사별한 생모 마야데비를 제도하기 위하여 하늘세계인 도리천까지 올라가 설법을 하셨습니다. 아라한과를 성취한 아들비구(꾸마라 깟사빠 장로)는 아들을 향한 정에 이끌려 수행에 전념하지 못하는 엄마비구니를 깨달음에 이르도록 했습니다. 모자가 다 아라한이 된 이 이야기는 <니그로다 자따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임신한 줄 모르고 출가해 비구니가 되었던 여인이 음계를 저질렀다는 누명을 쓰고 데와닷따가 이끄는 라자가하의 상가에서 추방당했지만, 부처님의 따뜻한 배려로 누명을 벗고 총명한 아들을 낳았고, 이 아들이 출가하여 아라한과를 얻은 뒤 아들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한 어머니에게 일부러 심한 말을 해 참 수행의 길로 이끌었다는 효행이야기입니다. 반면 신통제일 목갈라나 장로의 비참한 최후는 불효의 과보는 아라한도 피할 수 없다는 교훈을 줍니다. 목갈라나는 과거 전생에 아내의 거짓말에 속아 부모를 죽게 하는 어처구니없는 악행을 저질러 수십만 겁 동안 지옥에서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후 부처님을 만나 아라한과를 성취하고 상수제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악행의 과보가 남아 나체수행자들의 사주를 받은 건달들에 의해 온 몸이 부서지는 폭행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열반에 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불교의 효와 유교의 효는 비슷한 듯하면서도 그 결이 다릅니다. 불교의 효는 연기적 관계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지요. <선생경(善生經)>에서 효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면, 부처님께서 먼저 자식의 도리를 설하고 이어 부모의 도리를 언급하십니다.
“선생아, 대개 사람의 자식이 된 자는 마땅히 다섯 가지 일로 부모에게 경순(敬順)할지니라.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이바지해 받들어 모자람이 없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무릇 할 일이 있으면 먼저 부모에게 사뢰는 것이고, 셋째는 부모의 하는 일에 순종하여 거슬리지 않는 것이고, 넷째는 부모의 바른 명령을 감히 어기지 않는 것이고, 다섯째는 부모의 하는 바른 직업을 끊이게 하지 않는 것이니라. 선생아, 대개 사람의 자식이 된 자는 다섯 가지 일로써 부모에게 경순해야 하느니라.”
부모님을 존경하고 그 뜻을 따르는 자식의 도리 다섯 가지에 이어, 이 경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도리 다섯 가지를 아울러 제시합니다.
“부모도 또 다섯 가지 일로써 그 아들에게 사랑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자식을 제어하여 악을 행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가리키고 일러주어 그 착한 것을 보여 주는 것이고, 셋째는 그 사랑이 뼈 속까지 스며드는 것이고, 넷째는 자식을 위해 좋은 짝을 구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때를 따라 그 쓰임을 대어 주는 것이니라. 선생아, 자식이 부모에게 경순하고 공봉(恭奉)하면 그는 안온하여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을 것이니라.”
용주사판 〈부모은중경〉 제1도 부분(ⓒ원주 고판화박물관)
<선생경>을 통해 불교의 효는 일방적인 효가 아닌 연기적 효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잘 경순해야 하는 것이 대원칙이지만, 동시에 부모도 부모로서 해야 할 역할을 마땅히 잘 해내야 참다운 행복이 찾아온다는 가르침입니다.
대부분 시골이 다 그렇지만 우리 마을도 아기의 울음소리나 어린이들의 재잘거림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마을주민 대부분이 노인이니 오가다 마주치는 분들도 노인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건넛집 할머니는 올 초부터 매일 주간보호센터에 나가시고, 아랫마을 할머니는 달포 전쯤 넘어져 거동을 못하십니다. 한 시가 다르게 무상의 도리를 알리는 현상들이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외롭지 않게 해드리는 게 최고의 효’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