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도저히 이성적/합리적으로 어떤 인물이나 현상을 설명할 수 없을 때 ‘광인’이나 ‘광기’라는 표현을 사용하다. 따라서 광기는 비사유(非思惟)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푸코(Michel Foucault)는 광기를 정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면 정의는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사유의 이성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기는 그 자체로서 정의된 적이 없으며 오직 비이성이란 맥락 속에서만 정의된다고 할 수 있다.」
근래 우리는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는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바이러스가 선사하는 강력한 존재감 속에서 서로를 잠재적 보균자로 의심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매우 ‘비정상적인’ 상황을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흉흉한 시기에 맞춘 듯 특정 개신교 세력의 정치권력화는 점점 노골화되고, 이들의 ‘투쟁’은 도시 공공성을 대표하는 ‘광장’을 주 무대로 전개되는 소위 ‘광장정치’의 양상을 띠고 있다. 물론 특정 종교세력의 정치화 아니면 종교와 정치의 ‘야합’은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러나 현 한국의 상황처럼 특정 종교집단의 지도자의 부름에 이질적이고 다양한 보수단체들이 - ‘촛불집회’ 이후 저항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 서울광장과 광화문 일대에 결집하고 해당 공간을 점유하면서 반정부 집회를 지속하는 것은 결코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들 보수세력의 주장이나 행동을 ‘집단 광기’의 표출로 설명하는 담론 또한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비주류 종교집단의 신자는 물론이고 신앙심이 ‘특별히’ 깊은 종교인은 종종 ‘광신도’로 불리면서 경계와 배제의 대상이 되고,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천국의 문(Heaven’s Gate)이나 인민사원(Peoples Temple)과 같은 폐쇄적 종교공동체의 집단자살 또한 쉽게 종교적 광기로 설명된다는 점에서 ‘종교와 광기’는 학문적/대중적 담론에서 매우 익숙한 조합이다. 이는 종교/신앙은 ‘본질적으로’ 상식이나 일상을 뛰어넘고 이성/합리성의 논리를 초월한다는 오래된 인식과 관계가 있으며, 정치적 메시지를 가진 종교운동은 기존 질서를 전복하는 엄청난 집단적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다는 역사적 인식에도 기반한다. 이런 맥락에서 작금의 담론은 - 통제할 수 있고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개인적인 광기가 아닌 - 집단적 광기를 내세워 정치세력화하는 종교집단의 위험성과 팽창성을 부각시키며, 여기서 추가로 코로나19라는 괴질(怪疾)의 존재는 해당 집단의 위험성을 보다 각인시키는 역할을 한다. “8.15 광복절에 전광훈 일당이 일으킨 ‘광기’로 말미암아, ‘전광훈발 코로나’가 얼마나 퍼져나갈지 우려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전광훈 교회, '명의도용-허위신고'로 엉뚱한 피해자 발생」, 『국민뉴스』 2020.08.18.). 앞의 기사 내용은 작금의 ‘광기’ 담론이 코로나바이러스가 야기한 불확실성에 기인한 대중들의 막연한/실제적 공포에 편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집단 광기를 다루는 미디어 담론의 사례로는, 「각목과 휘발유, 통성기도와 찬송가가 난무하는」 (『오마이뉴스』, 2019.10.04.); 「주술•광기•공포•반지성이 지배하는 한국사회」 (『프레시안』 2020.03.06.); 「<단독입수> 순국결사대 카톡방과 전광훈」 (KBS1TV 『시사직격』 42회, 2020.08.28.); 「집단 광기 이용하는 자 누구인가: 마녀사냥부터 전광훈까지, 광기의 시대, 광기의 광장, 가스통을 멘 사람들」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2020년 9월 4일) 등이 있다. 물론 이러한 담론의 (재)생산에는 대중매체뿐 아니라 비판적 교회세력, 주류정치권, 학계 인사들도 함께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극우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전[광훈] 목사의 역사 왜곡과 막말은 반지성적, 반상식적 발언이자 반평화적, 반기독교적”이며, “이 같은 행태는 권력정치의 집단적 광기에 몰입된 거짓 선지자의 선전선동으로 ... 반기독교적 행위”라는 입장문을 낸 바 있다(2019년 6월 10일). 더 나아가 교회 내 비판적 지식인들은 정치권력화의 문제를 전광훈 한 인물에 국한하지 않고 한국 개신교 전체의 문제로 인식하여 ‘정치 과잉’과 ‘극우 광풍’의 폐해를 지적하기도 한다(「극우 광풍과 침묵, 한국교회 공멸의 시그널」, 『복음과상황』 2020.02.19.). 집권당 또한 ‘광기’ 담론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극우•보수단체와 야당을 질타한다. 김부겸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페이스북에서 일장기까지 등장한 보수단체들의 8•15 집회에 대하여 “민족정기를 되새기는 뜻깊은 그런 날 이 무슨 집단 광기란 말이냐”며, 전광훈 목사를 향해서는 “자기 교회가 “바이러스 테러에 당했다.”라는 등의 흑색선전은 정치도, 표현의 자유도 아니고 반사회적 일탈이라고 비난하였다(「김부겸 "일장기 든 광화문 집회는 집단 광기"」, 『조선일보』 2020.08.16.). 이원욱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후보 또한 한 인터뷰에서 광화문 집회를 보면서 집단적 광기를 느꼈다며, 그 집단적 광기에 편승한 야당도 문제라고 지적하였고(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2020.08.19.), 이후에는 SNS에서 보수단체의 개천절 집회 요구에 대한 야당의 옹호적 태도를 비판하며 “이러니 ‘전광훈식 집단광기’가 여전히 유령처럼 광화문을 떠돌고 있는 것”이라고 발언하였다(「민주당 “드라이브 스루라고? 국민의힘, 전광훈식 집단광기”」, 『경향신문』 2020.09.23.). 일부 학자들 또한 대중매체를 통해 관련 담론에 이론적 틀을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앞에서 언급한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서 이들은 - 정치사회학적 시각에서 - 집단 광기는 광기가 구조화된 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자극적인 캐치프레이즈, 공공의 적 그리고 이 둘을 떠받치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며, 여기에 탄압받는다는 프레임이 덧씌워지면 엄청난 폭발력을 갖는다고 분석한다. 결국, 이들의 주장은 집단 광기는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인물/세력에 의해서 조직화/구조화되어 특정 목적을 위해 이용된다는 것이다.
물론 극우•보수 세력의 지도자로 확고한 입지를 다진 전광훈 목사의 과격하고 선동적인 발언 그리고 그의 추정세력이 보여주는 일련의 ‘일탈적’ 행동 – 청와대 진격 선동, 코로나 확산/진단검사 음모/조작설 주장, ‘순교’와 ‘순국’의 다짐 등 – 이 이러한 광기 담론에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몇 년 전 촛불집회와 작금의 보수세력의 광화문 집회 모두 직접민주주의의 대안으로 ‘광장정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으나, 다수의 언론이 전자는 ‘집단지성의 실현’ 후자는 ‘집단광기의 표출’이라는 상반된 ‘프레임’ 속에서 보도하고 있음은 흥미롭다. 현재의 ‘광기 담론’을 보면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광기’는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이며, ‘광기’라는 장치를 통해 해당 담론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달성하고자 하는가 등일 것이다.
우리는 도저히 이성적/합리적으로 어떤 인물이나 현상을 설명할 수 없을 때 ‘광인’이나 ‘광기’라는 표현을 사용하다. 따라서 광기는 비사유(非思惟)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푸코(Michel Foucault)는 광기를 정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면 정의는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사유의 이성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기는 그 자체로서 정의된 적이 없으며 오직 비이성이란 맥락 속에서만 정의된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푸코는 광기를 대상적 실체가 아니라 타자와의 접촉에서 맺어지는 관계의 함수로 본다. 또한, 그는 시대마다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관계뿐 아니라 이들 범주에 편입되는 현상들 또한 변해왔음을 지적하며, ‘광기’와 해당 사회의 이에 대한 접근방식은 구체적인 역사적/사회적 구성물임을 강조한다. 유사한 맥락에서 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는 광기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 그 자체이며, 변화된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서 동질적이지 않은 가변적 지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광기에 대한 대중적 담론의 위험성은 바로 광기가 - 서로의 배제를 통해서만 존립할 수 있는 -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 위에 그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구성원들이 추구하는 ‘정상성’으로의 복귀 또는 ‘정상성 신화(myth of normality)’ 속에서 상식을 넘어 일탈적으로 보이는 대상이나 현상들은 ‘비정상’으로 분류되고 ‘광기’로 규정되어,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철저히 타자화되는 과정을 겪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인이 표적이 되면 폭로는 구체화하고 해당 인물은 조롱거리가 되며, 이는 대중에게 커다란 대리만족을 준다. 반면 특정 집단이 표적이 되면, 이들은 자신들의 리더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쉽게 조정/이용당하는 무리로 대화와 소통이 불가능한 무리로 상정된다.
그렇다면 본 글의 제목이기도 한 질문 “우리는 지금 ‘광기’의 시대를 살고 있는가?”로 돌아가 보자. 이에 대해 파스칼(Blaise Pascal)의 발언 “인간은 본질적으로 광기에 걸려 있다.”는 옆으로 밀어놓고, 역으로 “과연 한국사회에 ‘광기’가 부재한 시기가 있었던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한반도의 짧지 않은 분단의 역사 속에서 첨예하고 때로는 폭력을 수반한 이데올로기 대립을 ‘일상적으로’ 경험한 동시대인들에게 특별히 작금을 ‘광기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어색해 보인다. 더구나 코로나바이러스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일상은 원래 정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여기서 더욱 슬픈 것은 광기 담론이 모든 비정상적인 것, 비상식적인 것, 과격한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픈 소시민에게 일종의 정당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해당 담론은 정치적/종교적 과격분자를 분리하고 타자화하여 이들과의 소통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함으로써 소시민들이 이들로부터의 정신적/심리적 거리를 확보하여 자신의 세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가격리’와 ‘거리두기’가 필수적인 행동지침이 된 현 사회에서 하나의 생존전략인 것일까?
우혜란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woohairan@hotmail.com
논문으로 <한국 불교계의 ‘마음치유’ 사업과 종교영역의 재편성>, <한국 신종교의 조직구조>, 〈현대사회 성물(聖物)의 유통방식에 대하여>, <포스트모던 시대의 새로운 종교현상>, 〈젠더화된 카리스마〉, 공저로는 《한국사회와 종교학》, 《신자유주의 사회의 종교를 묻는다》 등이 있다.
* 한국종교문화연구소 뉴스레터 648호에 실린 글입니다. 저작권은 한국종교문화연구소(http://kirc.or.kr)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