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마을.
옥아는 단아하게 서 있었다. 장미가 빨갛게 피어있는 아담한 집 앞이었다. 마을에서는 누가 봐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귀한 여인, 물론 단 한 사람, 회산을 제외하고. 집 뒤로는 오리나무가 무성했다. 옥아는 그녀의 키보다 높은 담장 밖에서 대문을 두드렸다.
“누구십니까?”
“명장사에서 왔습니다.”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곱게 합장을 하였다. 그녀를 알고 있었다. 전택경의 아내였다. 눈가에 주름살이 많아서 그렇지 젊었을 적에는 꽤 미인이었을 얼굴이었다. 부창부수. 그녀는 옥아에게 아주 반가운 웃음을 주었다. 그런 화사한 웃음에 뒤질 옥아가 아니었다. 옥아는 품격 있게 입을 꼭 다문 채로 한껏 미소를 지었다.
“아씨 스님께서 우리 집엘 다 오시구요?”
“부소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예. 안에 계십니다.”
우스운 말, 옥아는 이미 전택경이 집에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왔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이 그렇게 말을 나누는 사이 전택경이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어서 오세요. 아씨 스님.”
천하의 전택경도 옥아 앞에서는 양순 해지는 법, 옥아는 곱게 합장을 하였다.
네모반듯한 다다미방.
“그래, 어쩐 일로?”
옥아는 일부러 망설였다.
그러자 눈치 빠른 전택경이 아내에게 슬쩍 눈치를 주었다.
“저는 나가서 부엌일을 보겠습니다.”
아내가 나가자 전택경이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웃었다. 둘만 있는 것이 즐거운 표정이었다. 옥아도 당연히 둘만 있는 것이 좋았다.
“말씀하시지요?”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택경이 무언가 깜짝 놀라는 동작을 하였다.
“김처사님을 보내지 말아 주세요.”
전택경이 살짝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옥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옥아도 살짝 웃었다. 심각한 말을 할 때 절대로 심각한 표정을 짓지 않기, 그것이 바로 회산에게 전수받은 가장 훌륭한 재산임을 확인하면서. 역시 회산의 가르침은 어긋나지 않았다. 전택경의 굳은 표정이 일순 풀려버렸다. 모두 옥아의 살짝 눈웃음 때문이었다.
“회산 스님께서 허락을 하셨는데......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문제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미 명단에 올라있습니다. 그건 아무도 뺄 수 없습니다.”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예?”
“처음부터 저를 염두에 두고 우리 절에 올라오셨던 게 아닙니까?”
전택경이 너무 좋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방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 이쪽은 더 난처한 표정으로 말하기. 그것 또한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회산의 비법. 옥아는 슬픈 얼굴로 전택경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전택경은 한참을 생각하였다.
“스님은 모르시지요?”
“김처사님도 모르는 것으로 해주세요. 어차피 다른 처녀들을 동원하기 위해 저를 표적으로 삼지 않으셨나요?”
옥아가 정곡을 찔렀다. 전택경이 아래로 눈을 깔았다. 역시 슬픈 표정이었다. 그녀는 전택경의 표정을 보면서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일말의 양심은 가진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전택경은 전택경임을 절감해야 했다.
“일본까지 가는 여비는 모두 아씨 스님 부담입니다.”
“예?”
옥아는 일부러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그건 옥아의 일반적인 특기였다.
“계약서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계약서란 것을 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지나갔다. 일본의 고전 그림으로 치장한 팔 폭 병풍, 줄줄이 가락을 잡은 미닫이문, 정갈한 차탁, 그리고 또 먼지 한 톨 없는 다다미방. 그러나 그녀는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견딜 수 없는 구토.
“저녁을 드시고 가시지요.”
“아닙니다. 저와의 약속은 꼭 지켜주셔야 합니다. 부소장님.”
옥아는 일부러 부소장이라는 데에 힘을 주었다. 그가 흐뭇하게 웃었다. 옥아도 웃었다. 아주 나쁜 사람. 그렇지만 이야기는 되는 사람, 앞뒤가 막힌 많은 조선 사내들과는 다른 것이다.
삽화 염정우
옥아는 회산을 만나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회산이 그녀를 불렀다. 특별한 경우 외에는 밤에는 부르지 않는 그였다. 회산은 안경을 벗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좁은 방. 예외 없이 등잔불이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비는 오지 않고, 바람만 불었다. 그녀가 곧바로 자리에 앉지 않자 회산이 싱긋 웃었다. 맑은 웃음.
“방 구둘 안 무너진다.”
“무슨 일이세요?”
옥아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가뭄 때문에 큰일이다.”
그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거의 하늘 걱정을 하지 않는 회산이었다.
옥아는 넌지시 웃음을 보였다.
“스님께서 하늘 걱정도 하세요?”
“남녘엔 감꽃이 너무 떨어진단다.”
옥아는 감에 대한 기억이 남달랐다. 어린 시절, 겨울이면 어디서 구했는지 무지하게 달고 큰 감을 회산은 옥아에게 주었다.
“이번 겨울에도 감 주시려구요?”
“글쎄다. 이제 네가 다 커버렸다.”
“왜 부르셨어요?”
“그냥.”
회산에게 그냥은 없었다.
“김처사님 때문에 그러세요?”
“아니.”
“그럼요?”
회산이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얼굴에 쓸쓸한 그림자가 지나갔다. 전에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밖에 별이 많아요.”
옥아는 하늘의 별을 보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회산이 방문을 열었다. 바람이 확 들어왔다. 정말 하늘에는 별이 총총 떠 있었다. 다행이었다.
“내가 별을 좋아하면 어떻게 된다고 했지?”
“떠돌이가 된다고 하셨지요.”
“사실 나도 별을 좋아하는데......”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옥아는 자리를 털었다.
“김처사님이 네게 뭐라고 하지 않으시든.”
“오늘 처사님 뵙지도 못했어요.”
“그래에?”
“그만 가겠습니다.”
옥아는 댓돌 위의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섰다. 그러면서도 옥아는 회산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끝내 그녀는‘옥아’라고 부르는 회산의 부드러운 음성을 듣지 못했다.
“지금도 난설헌 읽지?”
“아니오.”
去年喪愛女/今年喪愛子/哀哀廣陵土/雙墳相對起/蕭蕭白楊風/鬼火明松楸/紙錢招汝魂/玄酒存汝丘/應知第兄魂/夜夜相追遊/縱有服中孩/安可糞長成/浪吟黃坮詞/血泣悲呑聲.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슬프고 슬픈 광릉 땅이여/두 무덤이 마주 보고 있구나/ 백양나무에는 으스스 바람이 일어나고/도깨비불은 숲속에서 번쩍인다/지전으로 너의 혼을 부르고/너희 무덤에 술잔을 따르네/아아, 너희들 남매의 혼은/밤마다 정겹게 어울려 놀으리/비록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한들/어찌 그것이 자라기를 바라리오/황대노래를 부질없이 부르며/피눈물로 울다가 목이 메이도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잃고 쓴 난설헌의 곡자(哭子)를 읽으며 그녀는 쓸쓸히 웃고 있었다. 슬프고 슬픈 조선 땅이여, 이제 이곳은 두 무덤이 아니라 산하 곳곳이 무덤으로 들어차고 있다. 이토록 사적인 일로 차고 넘쳤던 난설헌의 슬픔은 차라리 사치였다. 난설헌이 살다간 시절이 아무리 못났다 한들 왜민족에게 굴비 두름 엮이듯 끌려가야 하는 지금에야 비하랴. 그녀는 꼬박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내가 난설헌처럼 살 수 있다면. 옥아는 27살에 장엄하게 죽은 난설헌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계속>
삽화 염정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