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새는 맡고 향기는 듣는다
일러스트 정윤경
마중물 생각
입춘이 다가오고 있다. 매화 꽃망울이 부풀고 개구리들이 개굴개굴 봄을 부르고 있다. 겨우내 닫혀 있던 굴 같은 산중이 이제야 열린다고 해서 '개굴개굴(開窟開窟)' 노래하나 보다. 아니면 개구리 떼가 겨울잠 자던 땅속의 굴이 이제야 열린다는 노래일 수도 있겠고. 아무렴 때마침 봄비가 연못의 수련처럼 동그란 파문을 그리며 개구리 노랫소리에 화답하고 있다. ‘좋지요, 좋지요’ 하고 메아리 같이 응답하고 있다.
햇볕이 많이 드는 양지에는 동백꽃이 몇 송이 피어 있다. 동백꽃을 보니 법정스님이 생각난다. 스님께서 병상에 누워 계실 때 금강스님이 미황사 경내의 동백꽃과 매화꽃을 꺾어 인편에 보낸 적이 있는데, 스님께서 동백꽃과 매화꽃을 한동안 보시더니 중얼거리셨다.
“꽃들아, 내가 내려가 남녘의 너희들을 보아야 하는데 올라오느라고 수고 많았다.”
스님을 위문하기 위해 보낸 꽃들에게 오히려 사과하는 스님의 마음이야말로 부처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스님의 말씀과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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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살든
그 속에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물이 흘러야 막히지 않고 팍팍하지 않으며 침체되지 않는다.
물이 한 곳에 고이면 그 생기를 잃고 부패하게 마련이다.
강물처럼 어디에고 갇히지 않고 영원히 흐를 수 있어야 한다.
꽃이 피어나는 것은 생명의 신비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특성과 잠재력이 꽃으로 피어남으로써
그 빛깔과 향기와 모양이 둘레를 환하게 비춘다.
꽃은 자신의 특성대로 피어나야 한다.
만약 모란이 장미꽃을 닮으려고 하거나 매화가 벚꽃 흉내를 낸다면
그것은 모란과 매화의 비극일 뿐 아니라
둘레에 꼴불견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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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부터 매화가 피어나고 있다.
맑은 향기를 지닌 청매가 뜰에 은밀한 봄을 피우고 있다.
우리 곁에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인가.
곱고 향기로운 우주가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잠잠하던 숲에서 새들이 맑은 목청으로 노래하는 것은
우리들 삶에 물기를 보태주는 가락이다.
이런 일들이 내게는 그 어떤 정치나 경제현상보다
훨씬 절실한 삶의 보람으로 여겨진다.
새벽 달빛 아래서 매화향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내 안에서도 은은히 삶의 신비가 배어나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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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향기는 코로 맡는 것이 아니라 듣는다(聞香)고 하는
옛 표현이 훨씬 운치 있고 적절하다.
꽃에다 코를 대고 씽씽 맡는 것은 짐승스런 몸짓이며
꽃에 대해서 아주 결례가 될 것이다.
내 문법대로라면 냄새는 맡고 향기는 듣는다.
바람결에 은은히 묻어오는 그 향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갈무리 생각
몇 년 전에 지리산 산자락으로 차회(茶會)를 다녀왔던 일이 떠올라 가슴이 설렌다. 마침 그 순간의 풍경을 글로 남겨 둔 기록이 있어 그대로 옮겨본다.
차회를 갖기로 한 먹점골 오두막 난야(蘭若)에는 이미 지인들이 도착해 있다. 대요 스님과 나는 차회 장소를 바로 찾지 못하고 매화나무 숲속을 헤매다가 겨우 오두막 난야로 들어선다. 매화꽃 그늘이 진 마당가 반석에는 벌써 다구들이 준비돼 있고, 소반에는 매화나무 한 가지씩이 놓여 있다. 반석 위에 선혜 스님을 중심으로 여러 명의 차인들이 앉아 있다. 첫 번째 순서인 일완청다(一椀淸茶)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선혜 스님이 대요 스님에게 “어느 잔으로 하시겠습니까.” 하고 묻는다. 그러자 대요 스님이 “아무리 부어도 넘치지 않고 부족하지 않는 잔으로 하겠습니다.”하고 답한다. 이에 선혜 스님이 오른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말차를 다완에 넣고 다선(茶筅)을 능숙하게 휘저으며 거품을 낸다. 그것을 격불(擊拂)이라 하는데, 공기가 좋으면 차 맛이 더 좋아진다고 한다. 그러니까 말차를 마신다는 것은 물과 차와 공기를 마시는 셈이다.
나는 조선 초기 막사발과 비슷한 천한봉 씨의 다완을 선택하였는데, 때마침 차회를 시샘하듯 섬진강 강바람이 불고 까마귀가 날아와 운다. 뜻밖의 상황으로 차를 빨리 마셔버리자 선혜 스님이 한 마디 한다.
“너무 빨리 마시면 아취를 느끼지 못하고 너무 늦게 마시면 맛과 향이 달아납니다. 말차는 거품이 꺼지기 전인 1분 안에 마시는 게 좋습니다.”
모두가 말차를 한 잔씩 마시고 난 뒤 매화꽃 향기에 취해 시회(詩會)를 갖는다. 선혜 스님이 먼저 <먹점골 차회>라는 제목으로 시를 읊조린다.
봄바람 따라/ 산굽이 더듬어 찾아가니/ 난야엔 주인 없고/ 매화꽃이 손님을 반기네/ 매화꽃 향기로 달인 차 즐기다/ 내려온 길 뒤돌아보니/ 아득한 산마루 눈꽃이 피었네.
나는 내 차례가 되어 스님의 시를 ‘군더더기가 없고 여백이 많은 동양화 같다’라고 촌평하면서 절창이라고 느껴지는 ‘매화꽃 향기로 달인 차 즐기다’를 음미하며 다음 사람에게 넘겼는데, 대요 스님이 받는다.
매화향기 반짝반짝 배회하는/ 온 골짝 이대로 선불장이요/ 걸음걸음마다 무상을 노래하니/ 산중의 큰 웃음소리 누가 듣는가(梅香哲徘徊 萬溪谷選佛 步步無常歌 山中笑聞誰).
대요 스님의 시 <매화향기>는 게송인데 스님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매화꽃 을 감상하는 동안 탐미(耽美)의 울타리를 넘어 무상을 본다는 대목에서 수행자의 실다운 모습이 엿보인다.
매화꽃 그늘은 나의 대학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신입생 백일장에서 진달래꽃 그늘에 앉아 글을 쓰던 때나 수십 년이 흐른 뒤 매화꽃 그늘에 앉아 시회를 갖는 지금이나 분위기가 흡사한 것이다. 마치 전생의 인연 같았던 차회를 마치고 내 산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서울의 한 후배에게 “매화꽃 향기를 너무 맡아 멀미가 날 것 같다.”고 전화하고 말았는데, 온 골짜기에 매화꽃이 만발한 몽유(夢遊)의 산자락보다는 내 산방의 조촐한 뜰이 내 성정과 분수에 맞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