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정윤경
자비심이 여래다
이 어지러운 세상, 이 삭막한 세상, 이 무서운 세상은 그 어떤 힘으로도 구할 길이 없습니다. 자비심만이, 사랑만이 우리들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이웃을 구하고 세상을 보다 밝게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종교들이 한결같이 말합니다. 사랑에 의해서, 자비에 의해서 스스로도 구원받고 이웃도 구원할 수 있다고.
핵무기로 세상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날 핵보유국들이 이 지구 생명체를 위협하고 있는 그 오만함은 전체를 내다보지 못한 결과입니다. 핵무기가 있다고 잘난 체하는 것은 무지의 소산입니다. 무명이, 무지가 생사윤회의 근원입니다.
내가 살 만큼 살다가 작별할 때 한 생애에서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가끔 저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본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은 사람들에 의해서 평가될 것입니다. 생전에 그가 얼마나 많은 존재들에게 또는 세상에 자비심을 베풀었는가, 선행을 했는가, 덕행을 쌓았는가를 놓고 평가됩니다. 관에 못을 박아 봐야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결국 우리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을 때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놓고 심판받을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말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을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나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선하게 살면 남에게 그 덕을 나눕니다. 나 자신이 선하게 살지 못할 때는 남에게 근심, 걱정, 피해를 끼칩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저마다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혼란스럽습니다. 자기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라면 자기밖에 몰라도 상관없겠지만, 이 세상은 함께 어울려 사는 곳이기 때문에 서로가 상대방을 배려해야 합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삶은 바람직한 삶이 아닙니다.
결국 한 생애에서 무엇이 남습니까? 얼마만큼 사랑했는가, 얼마만큼 베풀고 나누었는가, 그것만이 계산으로 남습니다. 그 밖의 것은 다 허무하고 무상합니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자비심이 여래라는 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왔는지 거듭거듭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물음을 지니고 있으면 결코 헛된 길을 밟지 않습니다.
사족의 말
비를 뿌리며 태풍이 지나가고 있는데도 어제 광주에 사는 친구들이 왔다. 박정권과 이희규 선생이 그들이었다. 박정권 선생은 수피아여고 교장으로, 이희규 작가는 살레시오여고에서 평교사로 정년퇴직한 희곡작가였다. 모두 전남대 국문과와 연극반 출신으로 유명을 달리한 5.18연극인 박효선과는 풋풋한 젊음과 영혼을 나눈 사이였다. 점심때 직전에 내 산방으로 와서 오후 5시 무렵까지 차담을 나누며 간혹 현관문 밖을 내다보기도 했다. 무심코 내리는 빗줄기도 우리의 정담에 한 자리 끼어들었다고나 할까. 아니, 시인의 ‘눈 속의 눈’에는 수정으로 꿴 발 같은 빗방울들이 민초들의 속울음으로 느껴졌을 터이다. 80년에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나는 차를 우리기만 했고, 광주에 살던 두 친구는 젊은 교사로서 자신들이 겪은 39년 전의 5.18을 힘들고 어렵게 끄집어냈다.
사람은 왜 분노하는 것일까. 지난 2월에 인도를 다녀온 일이 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우리는 각자가 경험한, 혹은 공부한 바를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곤 했다. 한문을 가르치는 한 분에게 <맹자>를 청했더니 <맹자>의 핵심은 인(仁)과 의(義)라고 했다. 인은 측은지심이고 의는 부정한 것을 잘라버리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대목이 귀에 들어왔다. 나는 진행자로서 그의 얘기가 끝났을 때 마이크를 잡고 인과 의는 불교의 자비(慈悲)와 같다고 보충 설명해주었다. 자(慈)는 인과 같고, 비(悲)는 의와 같다고 설명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와 비를 같은 개념, 즉 연민이나 사랑으로 보지만 사실은 비(悲)자를 파자하면 비(非)+심(心) 자로서 ‘아니라고 하는 마음’인 것이다. 5.18도 광주시민의 자와 비가 저절로 발현한 항쟁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이 내 의견이었다.
두 친구는 5.18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을 차를 몇 잔 마신 뒤부터는 차츰 스스럼없이 얘기했다. 아마도 내가 우려내주는 차와 소박한 다기들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어떤 차인은 몇 천만 원에 구매한 중국 보이차를 말하고, 어떤 차인은 만인이 감상하는 연꽃을 꺾어 연차를 스스럼없이 자랑하지만 나는 그들과 번지수가 맞지 않은 듯하다. 고가의 차는 내 형편에 맞지 않고, 자비가 없는 연차는 내 성정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내 눈과 혀를 위해 함부로 꽃을 꺾어 즐기는 것은 인간의 이기적인 습성을 드러내는 것밖에 달리 이해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옛 선사들은 꽃을 꺾기는커녕 향기마저도 훔치지 말라고 경책했다. 나는 ‘자비 없는 찻자리’를 보고 어떤 스님과 덧정이 떨어져버린 기억이 있다. 어느 절 찻자리에 초대받아 갔는데, 젊은 스님이 피어나기 전의 연꽃봉오리를 네댓 개 따다가 손님들에게 연차를 우렸다. 자비 없는 찻자리의 차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데 편할 리 없었다. 반면에 자비심을 천품으로 타고난 어떤 스님은 내게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군대에 갔는데 내 별명은 울보였지요. 훈련병 시절 사역을 나가 잡초를 뽑는데 눈물이 막 났습니다. 살아 있는 잡초를 뽑을 때마다 마음이 아려서 눈물이 났거든요.”
‘자비심이 여래다’라는 <열반경>의 구절을 떠올리게 했던 스님의 고백이었다. 나는 지금도 차인과 다인을 구분하고 있다. 차를 커피처럼 기호식품으로 즐기는 사람은 차인, 최치원이나 초의선사처럼 인격완성의 방편으로 마시는 사람은 다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초의선사는 말했다. ‘차를 마시면서 어찌 도를 이룰 날이 멀다고 하는가!’ 당신은 차인인가, 다인인가? 스스로 자문해보길 바란다. 또한 자비에서 비(悲)자가 ‘심판하는 마음’이란 뜻도 있다는 것도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