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시절 짧은 시간에 성적을 올리기 좋았던 과목으로 국사과목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시험 시작시간이 임박해서 외워도 사지선다형 몇 문제가 보장되었습니다. 뜻도 모르면서 외워댔던 것이지요.
그 시절에 어려운 것을 맞혔다고 기억되는 문제가 있으니, 의상대사와 의천대사 그리고 화엄종과 천태종의 종조를 맞힌 문제입니다. 그때 뜻도 모르고 외웠는데, 지금도 두 분의 대사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종파가 어떻게 또 무엇이 다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이렇게 어리석음을 보입니다.

 

약사사는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대한불교화엄종 총본산입니다. 화엄경의 정식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으로, 부처님께서 깨달은 광대무변한 진리가 담긴 경전이어서 책 수가 상당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은 물론이고, 아홉 번에 이르는 법회의 설법을 담았으니 당연히 짧을 수가 없겠지요. 사찰 서가에 꽂혀있는 화엄경을 보면 ‘어찌 다 읽을 수 있겠는가?’하고 읽을 엄두조차 못 내고, ‘읽는다고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바를 알 수 있을런가?’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렇지만 소견 낮은 사람과 읽어도 뜻을 모르는 저 같은 범부는 예전부터 있었던 듯, 80권 전부를 읽지 않더라도 부처님께서 어디서 무엇을 하셨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도록 변상도(대방광불 변상도)를 그려 경전 앞쪽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이 변상도도 화엄경을 펼쳐야만 볼 수 있기에 약사사는 누구든 언제나 볼 수 있도록 몇 백 배로 크게 그려 야외에 설치하였습니다.

 

 

 

내딛는 발 뿌리마다 차이는 해골을 보고도 무덤덤한 어리석은 중생이 있는가하면 해골 하나만 보고서도 큰 깨달음에 이르신 원효스님도 계십니다. 화엄경의 내용을 쉽게 알 수 있도록 변상도를 그렸지만 이 조차도 뜻을 알기는 쉽지 않아서 변상도 아래에 각 품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요약해 놓았습니다.
요약된 내용은 설법하신 장소와 법회에 참석하신 부처님과 천신 및 보살의 이름, 부처님의 설법과 여러 보살들이 주고받은 문답 등입니다.

 

도리천궁에서 펼쳐진 세 번째 법회를 그린 그림의 아래에 쓰인 내용을 간략히 옮겼습니다.

 

    
약사사 변상도는 멀리서도 눈에 가득할 만큼 큰 화폭이어서 넓은 장소에 좌정하신 부처님과 많은 보살들을 실감나게 볼 수 있고, 설법의 진행도 짧게 요약되어 화엄경의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종단 종조의 깨달음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많은 수행단계를 밟아 이르는 정각은 더더욱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부처님의 자비와 덕(德)만이라도 닮으려는 저 같은 낮은 근기의 중생들에게는 약사사 변상도만큼 훌륭한 가르침을 주는 경전은 없을 것입니다.  
 
의상대사 화엄일승법계도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후, 지상과 천상을 오가며 아홉 번을 설법하셨기에 화엄경 변상도는 아홉 장으로 그려졌습니다. 약사사는 이 변상도를 두 개의 단으로 설치하였는데, 아랫단에는 적멸도량부터 도솔천궁, 윗단에는 타화자재천궁에서 급고독원까지에 이르는 설법 장면이 순서에 맞춰 놓였습니다.
큰 그림 아홉 장을 두 줄로 나누면 어떻게 하든 조화로움이 없을 것이기에 약사사는 의상대사께서 “법성게”를 이룬 인연을 그린 “화엄일승법계도 기연”을 “급고독원회 입법계품”다음 차례에 놓았습니다.
보리심을 내고,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지혜를 닦아가는 선재동자가 있는 그림 다음에, 법성게가 나온 인연을 풀어낸 그림을 보고 ‘딱 그 자리에 놓아야 할 것을 놓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화엄일승법계도 기연”을 보여드려야 하는데, 사진 찍을 위치를 찾지 못했습니다. 약사사 방문을 권해드립니다.)

 

 

변상도(大方廣佛華嚴經變相圖)와 법계도(華嚴一勝法界圖)가 펼쳐진 아래에는 놀이동산에 가서 즐기는 미로형태가 꾸며져 있습니다. 이는 도장을 찍어놓은 형태의 화엄일승법계도를 미로형태로 조성한 것으로 우리들 키의 반길 정도 높이 되는 화강암으로 길을 만들어 쌓았고 위에는 화단을 꾸몄습니다. 화강암에는 법성게송 210자가 한자와 한글로 음각되어 있어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돌면서 벽에 새겨진 글을 읽노라면 ‘법성원융무이상’부터 ‘본래부동명위불’까지 자연스럽게 법성게를 한 번 염송하게 됩니다.

 

 

 

 

화엄일승법계도는 사각형의 중앙부분 “법(法)”자에서 시작되는데 법자 위에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네 분의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법성게가 시작되는 방향에 앉으신 부처님은 지권인을 취하고 계셔서 화엄종의 주존인 청정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을 확연히 알 수 있으나, 다른 세 분의 부처님은 공부가 짧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법신 ․ 보신 ․ 응신의 삼신불을 모시는 경우 비로자나부처님과 원만보신 노사나부처님 그리고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부처님이 생각나는데, 한 분은 어떤 부처님일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또 취하고 계신 수인을 보면 석가모니부처님인가 싶은데, 한 장소에 석가모니부처님을 세 좌씩 모시지는 않을 터입니다. 추측하건데 비로자나부처님과 삼세불을 모셨다면 연등불 ․ 석가모니불 ․ 미륵불이겠으나 이 또한 어떤 부처님이 연등불이고, 석가모니불이고, 미륵불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비로자나부처님만 확실하게 알 수 있게 하고, 다른 부처님은 알 수 없게 한 것은 ‘상으로 부처를 찾지 말라. 법(비로자나)만 확실하게 알면 된다는 뜻을 담은 것이 아닌가?’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미로놀이는 입구와 출구가 각각 하나로 중간에서 길이 여러 갈래로 얽혀져 나뉘며, 막다른 길로 들어섰다 되돌아 나오더라도 바른 길을 찾아들어가기가 어려운 놀이입니다.
한평생 살아가는 것은 미로를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올바른 길은 한 번에 찾아지지 않고, 길눈도 남들보다 어두워서 한참을 헤매야 그럴듯한 길이 보이고, 그럴듯한 길도 가다보면 막다른 길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좋은 운을 타고나서인지 쉽게쉽게 찾아가더만, 제가 찾아낸 길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시간과 공력이 허비될 뿐이었습니다. 
법계도를 돌면서 법성게 의미를 생각지 않고 서둘러 걷는 바쁜 사람도 보았고, 거꾸로 들어온 사람과 마주치기도 했고, 제 길로 들어왔다가 중간에 되돌아 나가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법계도는 얽혀진 미로가 아니고 들어선 길이 끝까지 한 길로 이어졌기에, 초발심을 유지하고 수행한다면 옆길로 빠지지 않고 그만큼을 성취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들어있습니다. 열심히 수행하라는 가르침을 세상에 이보다 쉽게 깨닫게 하는 미로는 없을 것입니다. 약사사를 찾은 불자들께서 법계도를 돌면서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수행이 깊어지기를 기원했습니다.  

 

법계도 옆으로 난 길을 오르면 하얀 부처님이 서쪽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지금은 도솔천에서 미륵보살로 설법을 하고 계시지만 언젠가 인간 세상에 출현하시어,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미륵부처님입니다.

 

 

 

살아가는 세상이 좋은지, 나쁜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매일매일 행복이 넘쳐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세상을 한탄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미륵부처님께서 출현하신다는 때가 예견되어 있지만 그 때가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누구도 알 지 못합니다. 전쟁의 참혹함에 시달린 삼국시대부터 살육으로 덮인 지옥세상을 평화로운 세상으로 바꾸어 주시고, 중생들 모두를 구제하여 주실 것을 미륵부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때부터 이제까지 간절히 기도드리는 것은 미륵부처님께서 나타나실 것으로 믿는 때문입니다. 미륵부처님께서 중생들의 기도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셨기에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도솔천에 머무시고 계시지만, 많은 불자들의 염원을 들으시는 날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미륵부처님을 인천시 모든 지역을 바라볼 수 있는 만월산 동쪽에 모신 것은 인천에 거주하시는 많은 신도님들이 말세 중생들의 구제를 기원하는 진실한 기도를 드렸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륵부처님 모신 곳을 오르는 길의 오른쪽에는 종각을 두었고, 왼쪽에는 작은 범종 24개를 나란히 걸었는데 각각의 상단에 12지신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띠를 찾아 종을 울려, 소원을 이루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종을 친다고 소원이 이루어 질 수는 없겠지만, 그런 희망을 갖는다는 것도 사찰을 찾은 사람에게는 크든 작든 위안이 될 것입니다. 

 

 

 

이 12지신 종에서 관심 있게 보아야 할 것이 있으니, 범종에 지장보살의 형상과 보살님의 위신력을 찬하는 명문입니다.  
지장대성위신력 항하사겁설난진 견문첨례일념간 이익인천무량사
(地藏大聖威神力 恒河沙劫說難盡 見聞瞻禮一念間 利益人天無量事)

 

지장보살님의 크나큰 위신력은 억겁 동안 설명해도 끝이 없어서   보고 듣고 예배드리는 틈에도 헤아릴 수없는 이익을 주신다네.

 

지극한 마음이 담긴 기도라야 부처님께서도 귀를 여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12지신 종도 진실한 마음으로 쳐주어야 종소리가 지장보살이 계신 곳까지 퍼져나갈 겁니다. 부처님과 보살님들께서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과 단순히 들어주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의 기도를 구분하지 않고 구제를 베풀지는 않으실 겁니다.

 

많은 분들이 약사사에 펼쳐진 변상도와 법계도를 보셨으면 합니다. 약사사에 조성된 여러 불교문화에서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를 보실 수 있고, 210자의 게송을 염송하시면서 초발심을 다시 잡아내실 수 있으며, 12지신 종을 치면서는 지장보살님의 원력으로 정진하는 힘이 증진될 것입니다. 약사사 방문을 권해 드립니다. 부처님께서 가피를 내려주시고, 소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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