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고익진 박사(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교수)의 저서 『현대한국불교의 방향』을 요약 게재합니다.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시간개념(2)

불교는 시간을 부정한다. 시간이 부정됨으로 시간이 흐른다는 것도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불교의 이러한 시간부정은 지혜의 눈에 비친 세계에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무지에 싸인 중생에게는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중생세계의 이러한 시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열반에 머물지 않는 한 모든 중생은 시간의 제약 속에 던져진다. 중생의 ‘시작’와 시간의 존재는 함께 존재(共時)한다.  시간 속에 던져진 인간에게 집착의 활동은 잠시도 쉴 새가 없다. ‘시작’에는 필연적으로 ‘끝’이 있지만 ‘끝’에 이르면 다시 새로운 집착을 한다. 집착은 곧 시작이다. 그래서 ‘끝’은 ‘시작’, ‘시작’는 또 ‘끝’이 되어, 시작과 끝이 무한한 상속(相續)이 계속된다. 그리하여 중생의 시작과 끝은 ‘무시무종’이 되는 것이다.

원효스님은 불교의 적극성을 발휘하는 데에 일생을 바친 사상가이다. 원효스님은 불교의 이 ‘무시무종’의 설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부처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깨달음을 얻게 한다. 만일 그렇다면 중생이 비록 많지만 언젠가는 다할 날이 있을 것이다. 중생이 다해 버리면 그 최후의 부처는 제도할 중생이 없으리니 어떻게 성불할 수 있을까. 이타(利他)의 공덕 없이 성불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논란에 대해 원효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허공이 무량하므로 중생 또한 무량하고, 삼세가 끝이(無際)하므로 생사 또한 시작과 끝이 없다. 중생이 이미 시작과 끝이 없는데 어찌 부처에 시작과 끝이 있겠는가’ ‘만일 부처에 처음이 있다면, 그 이전에는 부처가 없을 것이므로 가르침이 없을 것이다. 가르침이 없으면 수행이 없으리니 성불 또한 있을 수가 없다. 수행 없는 성불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에 처음이 있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뒤 원효스님은 다음과 같이 결론하고 있다. ‘부처에 처음이 없지만 그렇다고 일찍이 중생이 아니었던 부처는 없다. 중생 또한 끝이 없지만 한 사람도 뒤에 부처가 되지 않는 중생은 없다. 부처와 중생은 이렇게 전전(展轉)하여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다.’<무량수경종요>.

부처와 중생이 다 같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면 원효스님의 말씀에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엿볼 수가 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흔히 열반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차안(此岸) 보다는 해탈의 피안(彼岸)에 가치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는 인도적 사유의 ‘시작’와 ‘끝’을 이런 국면으로 개척하고 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음’은 구원의 시간을 표현하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종식의 안주(安住)를 거부한는 파격적인 사상이다. 모든 ‘끝’을 다시 ‘시작’으로 지양하여 영원한 활동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