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고익진 박사(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교수)의 저서 『현대한국불교의 방향』을 요약 게재합니다.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시간개념 (1)
인도적 사유는 종교적 운연(暈緣) 속에서 육성되었다. 단순한 애지(愛知)로서의 철학은 인도인에게는 무의미하였다. 지(知)와 행(行)의 결합을 통하여 종교적 의미를 지닐 때 그들은 비로소 참다운 알음(智)으로 받아들였다.
‘시(始)’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인도인은 특이한 사유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시’를 나타내는 가장 보편적이 고대 인도어는 ‘아디(ādi)'라는 낱말이다. ’잡는다(取)‘는 어원적인 뜻을 갖고 있다 시작을 왜 잡는다는 뜻으로 파악했을까? 시작을 잡는다는 뜻으로 보는 인도적 사유는 시(始)에 대한 중국인의 생각에 비할 때 특이함이 선명해진다.
시(始)라는 한자는 ‘여(女)’와 ‘대(台)’로 분석된다. ‘여’는 뜻을 나타내고 ‘대’는 발음을 가르킨다. 한자 구성법(六事)으로는 형성자(形聲字)에 해당된다.
중국인이 시작을 ‘여’의 뜻, ‘음(陰)’의 뜻으로 보는 데는 그들의 세계관이 뒷받침이 되고 있다. 그들은 고대로부터 우주를 생성하는 근본원리는 음양(陰陽)이라고 보았다. 만물은 음양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음양은 이원론적인 것이 아니고, ‘음’은 ‘양’으로 발전하고 ‘양’은 다시 ‘음’이 된다는 역리에 입각한 일원론적 성질의 것이다. 삼라만상의 시원(始元)은 음양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음을 갖고 ‘시’로 삼을 것이 예상된다. 음양의 번역 과정에서 변역의 발단은 음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 생성의 의미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중국인이 시작을 음으로 보고, ‘시’자로 표상한 것은 이런 생각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 자체에 그러한 연원일이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아무런 의식이 없다. 덧없이 흘러갈 뿐이다. 인도인의 ‘아디’에는 이러한 뜻이 담겨 있다. ‘시’는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잡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뜻의 인도적 ‘시’에는 반드시 ‘종(終. anta)이 있게 된다. ’시‘만 있고 ’종‘이 없는 경우는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한한 시간의 어느 일점을 잡아 ’시‘로 하였다면 그러한 인간의 잡음은 유한한 것이므로 무한한 시간 속에 그 유한성을 드러내고 말 때가 오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사색이 깊은 인도인은 인간의 이러한 유한성이 애달팠다. 그들은 인간적 존재를 ‘영원한 시간의 흐름 속에 일어났다 없어지는(起滅)하는 하나의 물거품에 불과한 것으로 표현한다.
불교 또한 인도적 사유 속에서 자라난 종교사상이요, 따라서 그 영향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소극적인 현실관에 대해 과감히 도저하고 있다. 부처님은 인간 의지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하셨다.
‘시’와 ‘종’의 개념에 대해서도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고 계신다. ‘시’를 잡는다는 뜻으로 보는 전통적인 관념에 대해 불교는 부정의 뜻을 표시한 일이 없다. ‘아디’라는 낱말을 ‘시’의 뜻으로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시’와 ‘종’을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철학으로 지양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덧없이 흐르고, 인간이 그 어느 일점을 잡으면 ‘시’와 ‘종’이 설정된다. 그런데 그 시간이라는 것이 관연 실재할까? 불교는 시간 자체의 실재성에서부터 문제를 제기한다. 해탈의 열반세계에는 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러한 삼세의 구별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체의 제약을 벗어나 모든 본래부터 고요할 뿐이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