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 〈29〉
술상
세종은 가끔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와서 수양과 안평을 불렀다. 비가 쏟아지던 그날 밤도 세종은 동궁에 들러 수양과 안평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대비가 동궁의 기왓장을 두들기며 암막새 끝에서 허연 물줄기가 되어 직하하고 있었다. 낙숫물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왔다. 세자가 세종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바마마, 폭우가 쏟아져 동생들이 좀 늦어지고 있는 것 같사옵니다.”
“낙숫물 소리가 장쾌하여 들을 만하구나.”
가뭄에 농작물이 타들어가고 있으므로 분명 반가운 비였다. 며칠 전에 흥천사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그 효험 같기도 하여 더욱 흡족했다. 세종은 날이 밝으면 승지를 시켜 기우제를 지낸 흥천사 승려들에게 방물을 하사하리라고 생각했다.
“아바마마, 술상을 들이라 해도 되겠사옵니까?”
세자가 말하자 세종은 바로 허락했다.
“세자는 어찌 그리 나의 마음을 잘 아느냐. 출출하니 술 생각이 절로 나는구나.”
“아바마마께서 즐겨 마시는 술로 들이라 하겠사옵니다.”
“수라간 궁녀들을 깨우지 마라. 술 한 병만 있으면 족하니 소란을 피울 것 없다.”
“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
세자는 내시를 시켜 소박한 술상을 가져오게 했다. 세자는 단출한 술상을 좋아했다. 몸이 약해 많이 마시지도 못했을 뿐더러 수라간에서 내오는 잔칫상 같은 술상은 부담스러웠다. 궐 밖의 벼슬아치들도 특별한 날이 아니면 소박하기 짝이 없었다. 요란한 술상을 즐기는 벼슬아치는 사헌부 관원의 탄핵 대상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세종은 상궁이 들고 온 술상을 보더니 매우 만족해했다.
“술상을 보니 세자의 검박한 마음이 보이는구나.”
“저뿐만 아니라 궐 밖의 벼슬아치들도 다 이런 줄 아옵니다.”
술상 위에는 청자주병이 하나 놓여 있었고 안주는 쌀로 만든 엿과 잘게 찢어놓은 북어포가 전부였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과 달리 폭음대취하기보다는 한두 잔씩 음미하고 마는 애주가였다. 수양과 안평이 도착한 듯 밖에서 철벅거리는 소리가 났다. 내시가 문을 열어주자 수양과 안평이 들어와 엎드려 절을 했다. 퍼붓는 빗속을 뚫고 왔는지 둘 다 바짓가랑이가 젖어 있었다. 성격이 급한 수양이 먼저 말했다.
“아바마마,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내가 너희들을 잘 불렀구나.”
“다름이 아니오라 신미대사님에 관한 얘기이옵니다.”
“말해 보아라.”
“정효강이 대사님을 보호하기 위한 계책을 저에게 말했사옵니다.”
“그게 무엇이냐?”
수양은 신미를 집현전에서 파직시키는 대신 궐내에 임시관청인 정음청을 만들어 우리 글자 만드는 일을 계속하게 하자는 정효강의 말을 전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리 해서라도 헌부 관원들의 탄핵을 피해보자는 계책이구나.”
“대사님이 집현전 학사 된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니 그렇사옵니다.”
“그렇다면 정음청은 어디에 두는 것이 좋겠느냐?”
세종이 술을 한 잔 마신 뒤 물었다. 수양이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세종은 안주로 나온 엿을 소리 나게 먹었다. 어금니로 엿을 깨무는 소리가 오도독 하고 났다.
“아바마마께서 대사님에게 집현전 학사직을 제수하신 것은 대사님을 수시로 부르기 위한 것이었사옵니다. 그러하오니 정음청도 궁 안에 두시는 것이 어떠하겠사옵니까?”
“옳은 생각이다. 그렇다면 정음청을 내불당에 두면 좋을 것 같구나.”
“그렇게 지시하시면 대사님도 불편함이 없을 것이옵니다.”
경복궁의 문소전 뒤편에 있는 내불당에 정음청을 둔다면 신미는 세종의 부름에 더 빨리 응할 수 있고, 세종 역시 아무 때나 신하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갈 수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세자에게도 세종이 물었다.
“너도 말해 보아라.”
“아바마마, 제 생각도 내불당에 정음청을 두게 된다면 우리 글자를 만드는 일이 더욱 빨라질 것 같사옵니다. 사실 대사님께서 어느 땐가는 아바마마께서 우리말에 입힐 글자꼴의 원리를 알려주시었다며 몹시 격동돼 있었사옵니다.”
세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세종은 신미에게 자음은 혀의 모양과 입술 모양과 이빨 모양으로, 모음은 천지인(天地人)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보라고 상형(象形)의 바탕을 일렀던 것이다. 이를테면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소리는 혀 모양을 본떠 ’ㄱ'으로, 혀가 윗이빨 잇몸에 닿아서 나는 소리는 그때의 혀 모양을 본떠 ‘ㄴ’으로 입에서 나는 소리는 입 모양을 본떠 ‘ㅁ'으로, 이빨에서 나는 소리는 이빨 모양을 본떠 'ㅅ'으로, 목구멍에서 나는 소리는 목구멍 모양을 본떠 ‘ㅇ'으로 만들라고 했으며 모음 글자 모양은 삼재(三才) 중에 하늘은 둥그니까 ‘.’이고, 땅은 평평하니 ‘ㅡ’이고, 사람은 서 있으니 ‘ㅣ’로 해보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사실 신미는 몇 달째 세종이 알려준 글자 원리를 가지고 범자의 자음과 모음처럼 가획(加劃)을 해가며 글자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이는 범자에 능한 신미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말하자면 범자의 칠음체계(七音體系) 즉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와 반설반치(半舌半齒)를 근거하여 획을 더해갔다. 마침내 아음(牙音) 즉 어금닛소리는 ㄱ이 가획하여 ㅋ, 옛이응(異體)이 되고, 설단음(舌端音) 즉 혀끝소리는 ㄴ이 가획하여 ㄷ, ㅌ, ㄹ(異體)이 되고, 순음(脣音) 즉 입술소리는 ㅁ이 가획하여 ㅂ, ㅍ이 되고, 치음(齒音) 즉 이빨소리도 ㅅ이 가획하여 ㅈ, ㅊ, 반치음시옷(異體)이 되고, 후음(喉音) 즉 목구멍소리도 ㅇ이 가획하여 여린히읗, ㅎ이 되는 이치였다. 모음도 마찬가지였다. 아래아(.)와 ㅡ, ㅣ를 합용(合用)하니 ㅗ, ㅜ, ㅏ, ㅓ가 되며 아래아(.)가 한 번 더 합쳐져니 ㅛ, ㅠ, ㅑ, ㅕ가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음과 모음은 자유롭게 상하, 좌우 교합하여 어떤 소리라도 표현할 수 있게 되는데, 심지어는 닭 우는 소리 등 짐승이 우는 소리까지도 정확하게 가능했다. 그렇다고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심한 콧소리 등은 새로 만든 글자로도 담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세종은 안평에게도 물었다.
“우리 글자가 다 되어간다고 하더냐?”
“아바마마께서 지시한 상형으로 만든 자모에 가획과 합용, 교합하여 만드는 중이나 아직도 미흡하여 범자를 참고하여 궁리 중이라 했사옵니다.”
“새끼줄처럼 생긴 범자와 발음기관을 본뜨고 오묘한 우주의 원리를 담은 우리 글자와 어찌 같다고 하겠느냐. 비록 입과 혀와 목구멍의 소리를 좇아 글자를 만드는 원리는 같으나 범자와 발음기관을 본떠 만든 우리 글자 모양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날 것이니라.”
“발음기관을 본떴기에 글자 모양만 보고도 그 글자가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 줄 알 수 있고 외우기도 몹시 쉬울 것 같사옵니다.”
“그렇다. 누구나 외우기 쉬울 뿐더러 익히기도 쉬울 것이니라. 범어 자모는 오십자문(五十字門)이나 되어 익히기 어려우니 우리 글자는 발음기관과 천지인 삼재(三才)를 근거로 만들되 범어의 오십자문에서 반 정도로 줄여보라고 했느니라.”
세종은 술병에 남은 술을 기분 좋게 한 잔 더 마시며 말했다.
“중국 글자로 저 빗소리를 어찌 똑같이 표현할 수 있겠느냐?”
“아바마마, 할 수 없사옵니다.”
“허나 우리 글자는 중국 글자와 다르지.”
세종의 말대로 신미와 함께 만들고 있는 글자로는 이 세상의 어떤 소리도 어렵지 않게 옮길 수 있었다. 봄비처럼 보슬보슬 속삭이듯 내리는 소리나, 소나기처럼 주룩주룩 쏟아지는 소리도 물론이려니와 가을비처럼 추적추적 낙엽을 적시는 빗소리도 가능했다.
“아바마마, 대사님 말씀에 의하면 우리말 뿌리와 범어가 같다고 하옵니다. 천축국에서 사용하는 말과 우리말의 뿌리가 같다고 하여 몹시 놀란 적이 있사옵니다.”
“나도 신미에게 들어 알고 있다. 일찍이 함허대사가 대자암에서 신미에게 말했다고 하더구나. 지금 이 넓은 방에 밀랍촛불이 밝은 것만 해도 그렇다. ‘넓다’의 ‘넓’이나 ‘밝다’의 ‘밝’이 천축국에서도 같은 말, 같은 뜻으로 쓰인다고 하는구나.“
“아바마마, 다시 들어도 놀랍기만 하옵니다”
“그러니 범자의 칠음체계는 신미 대사가 모방한 것이 아니고 원래 우리 것을 되찾은 것이지.”
“그렇사옵니다. 대사님 말씀에 의하면 수미산 산자락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다가 우리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이족이 되고, 천축인은 남진하여 천축국을 세웠다고 들었사옵니다.”
세종은 신미가 만들고 있는 글자의 원리가 범자의 상형과 가획, 합용과 교합의 원리와 흡사하다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세종뿐만 아니라 세자의 수양과 안평, 정의공주도 마찬가지였다. 대자암에서 신미에게 범자의 오십 자모를 몇 번이나 들은 바 있기 때문이었다.
세자는 부왕과 동생들이 돌아간 뒤 술상에 놓인 엿으로 기본적인 자음과 모음을 만들어 보았다. 이제는 가능한 일이었다. 이윽고 하나하나 소리를 내보았다. 자모의 소리들이 입과 혀와 목구멍에서 나는데, 그 소리의 위치들이 신미와 함께 공부할 때처럼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짚어졌다. 세자는 술상에 남은 엿과 북어포를 안주 삼아 술병의 술을 비웠다. 장대비는 여전히 기세 좋게 쏟아졌다. 농작물의 해갈에 충분한 비였다. 빗소리는 침상에 누운 세자를 포근하게 감싸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