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피한 일로 며칠 서울에 다녀왔다. 오래 전부터 존경해온 한 노스님께서 교단 개혁을 위해 목숨을 건 단식에 나섰기 때문이다. 지금은 단식을 중단하고 병원에서 회복을 하는 중이지만, 나는 단식 후유증으로 말을 하기 어려워진 스님의 뜻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았다. 대변인이라는 낯선 일을 실수 없이 하려다보니 가능한 스님의 생각과 뜻을 정확하게 숙지해야 했고, 결국 서울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틈틈이 서울행을 해야 할 듯싶다. 인연은 참으로 엄격하고 정확한 것이어서 피해가기 어렵다. 거기에 그것이 옳고 정의로운 것이라면 피할 명분조차 사라진다.

산골에 산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어느새 서울에서 지내는 것이 불편해졌다. 어떻게 40여 년을 서울에서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잠시 다녀오는 것은 몰라도 일주일 이상 머무는 것은 녹녹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이번에 확실히 알았다.

며칠 만에 집에 오니 많은 일이 있었다. 수확한 고추가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태양초로 변해가고 있었다. 40일 넘게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 들깨는 절반 가까이 타 죽어버렸다. 집에 있었더라면 저녁마다 물을 줘서 어느 정도 살릴 수 있었겠지만 어쩌랴. 타 죽은 들깨모종을 바라보는 마음이 몹시 아프다. 그동안 아내가 겪었을 마음고생을 생각하니, 가슴이 짠하다.

아무려나, 입추가 지난 뒤라서 하늘은 부쩍 높아졌다. 한 여름을 방불케 하는 더위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장강의 물결처럼 다가오는 가을 기운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태 째 극심한 가뭄을 겪고 보니, 아무래도 내년에는 특단의 가뭄대책을 세워야할 것 같다. 공무원 임용을 앞둔 아들이 인터넷을 뒤지며 여러 가지 대안을 찾아냈고, 그 가운데 가장 적당한 방안을 가족회의 끝에 선택했다.

오랜 가뭄에도 당진의 하늘은 왜 이리도 멋진가?

빗물을 받아 저장하기로 하고, 가뭄을 효율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관수(灌水)시설을 설치하기로 했다. 관수시설을 하는 김에 내년부터는 무경운(無耕耘)농법을 시작하기로 하고, 3년 안에 밭을 완전한 옥토로 만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 시작은 올 농사가 끝나는 늦가을에 밭 전체에 호밀을 심는 것이 될 것이다. 호밀을 통해 밭흙을 부드럽고 비옥하게 만들 채비가 올 가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대형 물통을 구입해야 하고, 빗물을 받기 위해 지붕에 빗물받이를 설치해야 한다. 액비를 만들기 위한 장비도 마련해야 하고, 농약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은행과 돼지감자 등 해충과 균을 내쫓을 작물을 기를 공간도 마련해야 한다. 말로는 쉽지만 막상 실행을 하려면 비용은 물론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일주일여 만에 집에 들어서니 벌써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당에 커다란 검은색 플라스틱 통 2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천연액비를 만드는 작업이 이미 시작된 것이다.

이리저리 인터넷을 뒤져 우리 집 형편에 맞는 최적의 농사법을 찾아낸 아들이 대견하다. 내년부터는 밭에 일체의 기계가 들어오지 않게 하고, 밭이 땅 깊숙이 숨을 쉬도록 만들며, 천연성분으로 만든 액비로 일체의 화학비료를 대체하고, 작물을 기름진 땅에서 튼실하게 자라게 함으로써 저항력을 최대한 높이고, 노린재 등 해충들을 쫓아내기 위해 은행 열매나 돼지감자 등을 활용한 천연제품을 직접 만들어 살충제를 대체하기로 했다.

일체의 화학비료나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농법이 내년부터는 우리 밭에 적용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런 생각을 내도록 해준 가뭄이 일견 고맙다. 그동안도 최대한 화학비료를 삼가고 살충제 등 농약을 사용을 가능한 절제해오긴 했지만 100% 친환경 농법은 아니었기에 다소 찜찜한 점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농사를 지을 작물도 대폭 조정하기로 했다. 친환경 농법을 적용하기 용이한 서리태와 감자 농사를 늘리기로 했고, 고추농사는 우리 식구가 먹을 정도로 대폭 규모를 줄이기로 했다.

3년 후 이 농사법이 정착되면, 봄철 이랑과 고랑을 정비하는 작업과 가을철 수확을 빼고는 크게 힘들 일이 없어진다는 아들의 역설에, 글쓰기에 좀 더 많은 시간을 배당할 필요를 느꼈던 나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또한 농사를 재밌어하지만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노동량이 가져다 준 후유증으로 한의원 출입이 잦아진 아내에게도 더 없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내년부터 우리 가족이 귀촌을 한 목적이 비로소 제 방향을 잡는 것인지도 모른다. 산골에 살면서 우리 먹거리는 친환경 농법으로 직접 농사를 지어서 해결하자던 소박한 목표가 드디어 가시권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사실 이 소박한 목표는 우리 농촌 현실상 실현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최대한 농약 사용을 줄이고, 제초제를 치지 않는 선에서 현실과 타협했던 것이 지난 2년 동안의 농사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모두가 가뭄이 가져다준 뜻밖의 선물이다.

감자나 서리태 등은 가까운 반연들과 나눌 예정이다. 농약과 화학비료, 제초제를 먹지 않은 믿을 수 있는 친환경 작물을 구하기 힘든 현실에서, 이보다 더 좋은 선물도 많지 않을 것이다.

하늘은 높고, 햇볕은 따갑다. 고추와 서리태는 열기에 고개를 숙였고, 들깨는 이 순간에도 타들어간다. 곧 서울행을 할 참이어서 서둘러 참깨를 베어 비닐하우스에 말리고, 타 죽은 들깨를 새로이 보식했다. 고추를 따서 깨끗한 물에 씻고 말릴 채비를 온 가족이 모여 마무리했다. 타는 더위에도 농부는 쉴 틈이 많지 않다.

마당에서는 수확한 고추가 태양고추로 익어가고, 풋내기 농부의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간다. 순간, 휙~ 하고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창공으로 차오른다. 비를 뿌려주지 않아 원망스럽기만 했던 당진의 하늘! 오늘따라 왜 이리도 멋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