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 <12회>
오두막 차
오두막은 다랑이 밭뙈기들 한쪽에 웅크리고 있었다. 마치, 순둥이 삽살개 한 마리가 자기 몸에 머리를 묻은 채 졸고 있는 것 같았다. 오두막 마당가에는 묵은 감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감나무 가지에는 직박구리 몇 마리가 날카로운 소리로 지저귀고 있었다. 오두막의 동정을 살피고 온 찰방이 자드락길을 오르는 세종에게 말했다.
“전하, 양인 모녀가 살고 있는 오두막이옵니다.”
“과인을 보고 놀라지는 않겠느냐?”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앞장 서거라.”
세종이 자드락 고갯길을 넘어 오두막에 당도하자 모녀는 사립문 밖으로 난 산길까지 부랴부랴 비질하고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모녀는 과인을 보라.”
그래도 모녀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찰방으로부터 임금님이 납신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모녀는 고개를 숙인 채 다리가 후들거려 빗자루를 꼭 붙잡았다.
“두려워하지 말라. 과인은 백성의 살림살이가 궁금하여 여기 왔노라.”
찰방이 모녀를 대신하여 말했다.
“전하, 모녀는 밭농사를 지어 살고 있는 양인이옵니다.”
“작년 가뭄을 어찌 견디어냈느냐?”
“쇤네의 밭농사는 다행히 피해를 덜 입었사옵니다.”
여인이 모기만한 소리로 말하자 세종이 웃으며 말했다.
“오랜 가뭄에도 양주는 강물이 있어 지독한 흉작은 면했겠구나.”
농사짓는 양인들이 겪은 작년의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굶어 죽은 자가 속출했고, 살길을 찾아 떠도는 유랑민들이 어디를 가나 줄을 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종은 작년 가을에 고을 양인들이 동원되는 강무를 나가지 않았고, 초겨울에는 나라 안의 곡식을 한 바가지라도 아끼기 위해 금주령을 내렸던 것이다.
오두막 마당은 비질 자국이 선명했다. 마루 위 드러난 서까래에는 올봄에 뿌릴 옥수수와 조 등 오곡의 씨앗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세종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아침 햇살이 꽂히고 있는 앞산 숲을 바라보았다. 숲은 푸르게 봄기운이 돌았다. 남향으로 자리 잡은 오두막에도 이른 봄의 햇살이 한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찰방이 마당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모녀를 채근했다.
“무엇 하시는가? 임금님께서 친히 납시었는데도.”
“나으리, 쇤네는 무엇을 할지 도무지 모르겠사옵니다.”
세종이 한마디 했다.
“물이나 한 그릇 가져 오거라.”
“날이 차가우니 따뜻한 물을 가져와야 할 것이야.”
“나으리, 차를 올리리까?”
“오두막에 차가 있다는 말이냐?”
세종은 새삼 모녀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모녀는 농사짓는 양인답지 않게 옷매무새가 정갈하고 피부가 깨끗했다. 모녀가 모두 허름한 무명치마저고리 차림이었지만 큰 키와 오뚝한 코, 가지런한 치아가 귀한 가문의 분위기를 풍겼다.
“쇤네는 본래 차를 마시는 남도 땅에서 자랐사옵니다. 지금도 고향 형제들이 쇤네에게 차를 보내주고 있사옵니다.”
“고향이 어디더냐?”
“전라도 동복이옵니다. 그곳에는 임금님께 차를 덖어 진상하는 다소(茶所)가 있사옵니다.”
다소란 차나무가 자생하는 영호남에만 설치한 현 밑의 하급기관으로 봄마다 운력에 동원된 양인들이 차를 만들어 궁중으로 진상했다. 전라도 동복현에도 다소가 한 군데 있었는데 차나무는 고찰 주변의 산자락에 많았다. 승려들이 다선일여(茶禪一如)라 하여 수행의 방편으로 예전부터 음다(飮茶)를 하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었다.
음다의 전통은 승가뿐만이 아니었다. 유가 쪽에서도 유생들 사이에 정신을 맑게 하는 기운이 있다고 하여 차를 마셨다. 특히 태종 때 사헌부 대관들은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차를 마시며 회의를 했는데 그것을 다시(茶時)라고 했다. 그리고 다실 겸 업무를 보았던 그곳을 다시청(茶時廳)이라고 했고, 차를 준비하고 우리는 사람을 다모(茶母)라고 불렀다.
“차를 만들어 보았느냐?”
“지금은 고향의 형제들이 차를 보내고 있사옵니다만 소싯적에는 다소에 나가 여러 번 찻일을 했사옵니다.”
세종은 차를 끓여 올리는 궁중 다모의 솜씨가 변변찮아 오두막 양인의 차 맛이 몹시 궁금했다. 그러나 찰방은 오두막 여인의 말을 반신반의했다.
“대관이 돼야만 마시는 차가 이런 산중에 있다니…. 거짓말이라면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다.”
“쇤네는 고향에서 보내온 차를 마시기보다는 관음사 부처님 전에 올리옵니다.”
“그래서 오두막에 차가 있다는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사실이렷다! 그렇다면 어서 전하께 차를 올려보아라.”
찰방이 세종의 마음을 간파하고 오두막 여인을 채근했다. 그러자 오두막 모녀가 부엌으로 들어가 차를 준비했다. 세종은 산비탈에 선 생강나무 몇 그루를 보았다. 산수유 꽃과 흡사한 생강나무 꽃은 벌써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생강나무는 매화나 영춘화와 함께 이른 봄에 가장 먼저 꽃을 피웠다. 바람결을 탄 생강나무 꽃향기가 오두막까지 밀려왔다. 세종은 아침햇살이 따사롭고 꽃향기가 은은한 오두막이 편안했다.
“찰방, 이곳이 극락이구나.”
“전하, 무슨 말씀이신지요?”
“궁중의 시름들이 봄볕에 눈 녹듯 다 사라져버리니 이곳이 극락이라는 것이다.”
찰방은 문득 27세가 된 세종의 나이를 헤아렸다. 22세에 왕이 된 이후 5년 동안 대마도 정벌, 어머니 원경왕후와 아버지 태종의 죽음, 형 양녕의 방탕, 유신(儒臣)들의 기고만장한 언행, 극심한 흉년 등등 너무 많은 일들을 겪어왔던 것이다. 어찌 보면 세종의 얼굴은 27세가 아니라 10년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찰방이 대답하려고 입을 비쭉거리다가 다물어버렸다.
“전하....”
“과인의 시름이 봄볕에 눈 녹듯 다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잎이 돋고 향기로운 꽃이 필 때가 오지 않겠느냐?”
“전하, 반드시 그럴 것이옵니다.”
“하하하. 찰방의 말을 들으니 과인의 기분이 좋아지는구나.”
세종이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그때 모녀가 대나무소반에 차를 내어 부엌에서 나왔다. 차는 거친 막사발에 담겨 있었다. 차 역시 생강나무 꽃과 같이 노란 빛깔이었다. 오두막 여인이 앞서고 그녀의 딸이 대나무소반을 들고 세종 앞으로 갔다. 딸은 너무 긴장하여 대나무소반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었다. 대나무소반에 올려놓은 사발이 흔들렸다. 차가 곧 넘칠 것 같았다. 세종 앞으로 다가온 딸은 기어코 대나무소반을 떨어뜨렸다. 후들거리는 그녀의 다리가 치마를 밟았기 때문이었다. 모녀가 비명을 지르며 마당에 엎드렸다.
“쇤네를 벌하여 주시옵소서.”
기겁한 사람은 모녀뿐만 아니라 찰방도 마찬가지였다. 찰방은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자애롭게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들라. 다친 데는 없느냐?”
“죽을죄를 졌사옵니다.”
“아니다. 또 차를 내오면 되지 않겠느냐.”
“면목이 없사옵니다.”
“오두막의 차 맛을 보자구나.”
찰방이 모녀를 다그치듯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세종이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려는 오두막 모녀를 불러 세웠다. 그녀의 딸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희우(喜雨)라 하옵니다.”
“참 마음을 환하게 하는 이름이구나. 과인은 네가 우린 차를 희우차(喜雨茶)라 할 것이니라. 궁중에서 일할 자신이 있느냐?”
희우가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찰방이 나섰다.
“전하께서는 오두막의 차를 아직 마셔보지 않았사옵니다. 차 맛을 본 뒤 처자를 궁중으로 불러도 늦은 일이 아닐 것 같사옵니다.”
“이미 오두막의 맑은 차향을 맡았거늘 차 맛은 본 것이나 다름이 없다. 과인은 처자를 다시청 다모로 부를 것이니라.”
모녀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생강나무 꽃향기는 여전했다. 산모퉁이를 돌아오는 바람결에 세종의 코끝을 언뜻언뜻 스쳤다. 세종은 찰방을 앞세우고 오두막을 떠났다. 그제야 세종은 사냥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강무장을 떠올렸다.
모녀가 차를 우려 부엌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세종은 보이지 않았다. 후미를 경계하는 호위 군사들도 사라지고 없었다. 모녀는 오두막으로 넘어오는 자드락길을 바라보면서 꿈에서 깨어난 듯 무엇에 홀린 듯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젊은 군주답지 않게 사려 깊은 세종이 남기고 간 그림자를 좇았다.
*정찬주 작가의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가 한양에 올라왔을 때 자주 주석했던 고찰, 정릉 흥천사가 협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