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에서 몇 달 지내다보니, 내가 사는 주변에 대한 관심이 자연히 늘어난다. 삶터를 옮기고 나면, 모든 것이 생소하기 마련이므로 호기심이 커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만나는 사람도, 주변 환경도, 말씨와 음식도 적잖이 낯설다.
면천사람, 한티마을의 식구가 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내 사는 마을(里)과 면(面)의 역사부터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면천면사무소를 찾았다. 면천의 모든 것을 담아내었을 면지(面誌) 한 권을 구하기 위해서다. 면사무소 직원의 배려로 ‘면지’치고는 엄청나게 두꺼운 책 한 권을 수령자 사인을 한 후 받았다. 면지의 이름은 <유서(由緖) 깊은 면천(沔川)>. 1,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자료다. 이런 정도의 자료를 면 단위에서 출간한 사실 자체가 놀랍다. 사실 면천은 1914년까지 군(郡)이었으며, 홍주, 해미와 함께 읍성이 있는 내포지역의 중심지였으니, 여느 면과는 그 격이 다르기는 하다.
면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와 대치리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의 이름부터 확인했다. 산 이름도 제대로 모른 채 매일 동네풍광을 감상했던 것이 조금은 답답했었기 때문이다. 면지를 살펴보고 나서야 남쪽으로는 오봉산(五峰山), 서쪽으로는 던절미산(屯田山)이 펼쳐져 있고, 북쪽으로는 상왕산(象王山)과 옥녀봉(玉女峰), 동쪽으로는 강터산(江基山)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현묘재 전방으로 펼쳐져 있는 오봉산은 대치리와 이웃마을 율사리, 그리고 이웃고을인 서산시 운산면 와우리와 경계에 있는 높이 224미터의 산이다. 봉우리 5개가 연봉(連峰)으로 되어 있어 오봉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대치리의 서쪽 경계인 던절미산은 후백제의 견훤왕이 이끄는 군대가 주둔하며 직접 농사를 지어 군량미를 생산해 붙여진 이름이다. 현묘재 뒷산인 상왕산은 대치리와 성하리 경계에 있는 높이 210미터의 산이다. 1.5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영탑사의 뒷산이기도 한 이 산은 서산 가야산에 잇대어 개심사를 품고 있는 상왕산과 구별하지 않고, 능선으로 연결된 주변의 잔구를 모두 합쳐서 그냥 상왕산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이것이 서산 개심사 상왕산, 마애삼존불이 있는 운산 고란사 상왕산, 그리고 면천 대치리의 북산인 상왕산의 세 군데로 나뉘어져 각각 상왕산으로 불린다. ‘상왕’은 ‘코끼리왕’으로 석가모니부처님을 상징한다. 상왕산은 부처산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이럴 수가! 나의 집 현묘재의 뒷산이 상왕, 즉 부처님 산이라니….
한티고갯길을 경계로 상왕산과 나뉘어 있는 147미터 높이의 옥녀봉은 그 정상에 선녀가 단장을 했다는 반석(盤石)이 있어 단장봉이라고도 불리는데, 옥녀직금형을 한 명당 중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예로부터 옥녀가 앉은 자리, 즉 옥녀직금(玉女織錦)은 최고의 산소 자리로 여기에 산소를 쓰면 7대에 걸쳐 장군이 난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옥녀봉 아래로는 숱하게 묘가 들어차 있다. 옥녀봉과 연이어 대치리의 동쪽에 자리해 있는 149.7미터의 강터산도 대치리와 성하리의 서쪽을 나누는 경계로 옛날에는 이곳에 강이 있었다고 전한다.
‘당진편지’에서 몇 차례 언급한 한티고개는 상왕산과 옥녀봉 사이로 난 낮은 고개로 예전에는 서낭이 있었던 125미터 높이의 고개다. 또한 서산 운산면과 경계에 있는 배티고개는 고개의 지형이 배를 닮았다고 해서 배티(舟峙)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대치리에서 이 고개를 넘어 약 8킬로미터를 차를 타고 달리면 10분 이내에 서산마애삼존불을 친견할 수 있다. 
대치리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고개, 마을 이름을 익힌 후, 올해 85세가 된 이웃 홍사엽 어르신께 부탁해 동네 한 바퀴를 돌기로 했다. ‘면지’를 통해 이해한 동네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다. 아내와 함께 노인회장을 역임한 동네 토박이 홍 어르신을 모시고 동네 구석구석을 살폈다. 옛날 왕릉이 있었다는 ‘능골’, 발을 구르면 땅속이 빈 것처럼 덩덩 울리는 소리가 난다는 ‘덩덩골’, 사시사철 물레방아를 돌릴 만큼 물이 흐른다는 ‘물레지기’, 흙의 색이 유난히 붉다는 ‘붉은골’, 죽은 어린아이를 파묻는 골짜기라고 해서 ‘애장골’ 등 어르신께서 특유의 충청도 억양으로 설명하는 동네 이름들은 저마다 흥미롭고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내 죽을 때까지 살아갈 동네. 아내와 함께 선택한 ‘열반지’, 대치리를 속속들이 살피고 나니, 불현듯 나도 이 마을사람이 반쯤은 된 듯한 기분이다. 아직도 마을에서는 우리 가족처럼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을 일러 ‘외지인’ 또는 ‘굴러온 돌’이라고 부르지만, 이쯤 되면 나도 동네 사정을 제법 많이 파악한 ‘절반은 박힌 돌’이 되지는 않았을지….
마을을 살피면서 오가며 마주친 동네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모두들 환한 미소로 아직은 낯선 ‘굴러온 돌’을 반겨준다. 아내는 벌써 3년째 이 마을에 살면서 농사를 지은 터라 제법 아는 사람이 많다. 동네를 돌아보며 이곳에서 태어나 자라고 장가들고 어느 덧 노인이 된 분도 만났고, 우리처럼 외지에서 들어와 귀촌(귀농)을 한 분도 만났다. 그런데 ‘박힌 돌’이든 ‘굴러온 돌’이든 공통점은 나이가 최소한 60대 이상이라는 점이다. 50대 후반인 우리 부부가 이 동네에서는 3번째로 젊은 부부라니, 급속한 노령화가 농촌에 밀어닥친 가장 시급한 현안이라는 뉴스가 실감이 난다.  
현묘재의 주인인 현오(玄悟) 거사와 묘련심(妙蓮心) 보살의 ‘당진사람 되기 프로젝트’는 또 이렇게 한 구비를 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