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골은 뜨막하다. 산줄기 사이로 자리한 논밭이 쉬고 있으니, 차라리 적막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전기와 가스가 들어오면서 아침저녁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집은 사라져 굴뚝에 연기 피어오르는 광경은 옛 일이 되었다.
몇 해 전, 이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했을 때, 충청도까지 내려간 까닭을 묻는 지인들에게 ‘대치동에 살 능력이 안 돼서 대치리’로 갔다며 우스개 답변을 하곤 했었다. ‘대치(大峙)’는 한자의 뜻 그대로 ‘높이 솟은 고개’ 또는 ‘큰 언덕’을 말하는데, 실제로 현묘재 뒤편으로는 ‘한티고개’라는 제법 큰 고개가 있다. 동네 이름 대치리가 이 고개에서 비롯됐다. 원효와 의상이 구법(求法)을 위해 걸었던 이 고갯길은, 대치리 쪽으로는 완만한 경사지만 맞은 편 성하리(城下里) 쪽으로는 가파르다. 간혹 티맵에 주소를 찍고 현묘재를 찾는 이들이 이 고갯길을 만나면, ‘어쩌다 이런 험한 산중으로 왔는가’라며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아무려나, 예로부터 큰 언덕에는 으레 절이 있었는지, 치(峙)자는 산과 절의 조합 즉 ‘山+寺’의 구성이다. 지명(地名)으로 본다면 우리 집터는 절 들어설 자리인 것이다. 그러나 꼭 절이 아니면 어떤가. 집 주인이 평생 부처님 일을 했고, 원불(願佛)까지 모시고 있는 것을…. 하긴 우리 집을 지을 때, 나무 지붕을 얻는 것을 두고 ‘절 짓는다’는 소문이 동네에 돌았다고 하니, 이런저런 인연사가 다시 생각해 봐도 흥미롭다.

현묘재 뒷편으로 난 한티고개. 옥녀봉 능선 낮은 곳을 가로질러 나 있는 면천읍내로 가는 지름길이다.
매일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두어 차례 아내와 함께 이 고갯길을 오른다. 등산보다는 그저 ‘거님길’이란 표현이 더 어울릴 야트막한 뒷산이지만 등성이까지 다녀오면 제법 몸과 마음이 개운하다. 또 공양을 마치고 곧바로 책상에 앉으면 소화가 되지 않는 것도 한티고개를 오르는 또 다른 이유다. 고개를 한 발 한 발 오르는 길옆으로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겨울인데도 푸름을 간직한 채 무성하고, 갈색 이파리 매달린 어금지금한 참나무들 즐비하다. 대숲을 빠져나온 스산한 삭풍은 참나무를 만나 속삭이듯 거풋거린다. 바람소리 자욱한 지척의 숲에서 후다닥 땅을 걷어차는 소리가 들린다. 이른 새벽 인기척에 놀란 고라니의 몸짓일 것이다. 오르막길 오른 편엔 양봉(養蜂)시설이 있는데, 벌들이 겨울추위를 견디도록 천과 비닐로 겹겹이 덮었다.
고개 마루에서 내려다보이는 대치리의 풍광은 전형적인 충청도 마을이다. 한티 고갯길은 현묘재 뒷산인 옥녀봉을 밀어올린 능선의 낮은 등성이를 가로질러 나 있다. 면천 읍내로 가는 지름길로 예전에는 학생과 주민들이 자주 오갔다. 경사가 가파르기 때문인지 이따금 씩 차량이 오갈 정도로 한가하다. 한국전쟁 때에도 인민군이 들어오지 않았던 마을이었다는 데 살펴볼수록 수긍이 간다. 노인회장을 지냈던 이웃사촌이자 아내의 ‘농사 멘토’이기도 한 홍사엽 어르신에 따르면 대치리는 풍수지리상 길지(吉地)다. 전쟁 때에도 희생된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이곳이 명당이기 때문이라고 동네 어르신들은 굳게 믿고 있다.

현묘재에서 바라본 대치리 전경. 겨울 산골 농촌마을이라 적막할 정도로 고요하다.
대치리는 총 다섯 개 자연부락(5반)으로 이뤄져 있다. 부락을 나누는 기준은 옥녀봉을 중심으로 한 뒷산에서 마을로 내리뻗는 산줄기들이다. 가가호호 집들은 산코숭이부터 산기스락까지 듬성듬성 자리해 있다. 한티고개 인근에는 왕의 무덤(능)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능골’로 불리기도 했는데, 불과 20~30년 전 만해도 있었던 비석이 토벌꾼들에 의해 도난당했단다. 마을로 들어오는 서쪽 길은 서산 운산면과의 경계로 옛날에는 당진시내보다 서산과 왕래가 더 많았다.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상이 현묘재에서 불과 8.4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해 있다. 서산이 당진보다 훨씬 번성했을 때에는 마을에 서산버스가 들어왔었는데, 당진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이제는 당진터미널 행 버스가 하루에 네다섯 때 마을 안 정자까지 들어온다.
대치리에는 서산에서 들어오는 방향과, 면천읍내에서 들어오는 방향의 두 개의 마을입구가 있다. 마을 입구에는 각각 장승이 세워져 있는데, 해마다 음력 2월 초하루에 이곳에서 제사를 올린다. 장승제는 이 마을에서 가장 큰 행사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기독교세가 강한 이 마을에서 장승제를 성대하게 지내는 것이 의아할 수도 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한동안 이 마을에 사는 50대 미만의 청장년층이 각종 사고로 많이 죽는 등 악상(惡喪)이 끊이지 않았는데, 장승을 세우고 제를 올리기 시작한 이후로는 이 같은 일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대치리 장승제는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이면서, 마을사람 모두가 함께 준비하고 참여하는 화합의 장이자 전통문화가 살아 이어지는 생생한 현장인 셈이다.
고갯마루에서 기지개를 켜고 가볍게 체조를 한다. 스트레칭도 해보고 길게 호흡도 해본다. 입가에 담배연기를 내뿜듯 입김이 퍼진다. 차갑고 신선한 공기에 코가 뻥 뚫린다. 찬 기운에 콧속이 매울 만큼 시려온다. 아내는 고개 옆쪽에 자리한 평평한 터를 바라보며 “봄 오면 고사리를 뜯으러 올게~”라며 말을 건넨다. 이곳은 동네사람들만 아는 고사리 밭이다. 지난봄엔 여기에 고사리 밭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 제대로 수확을 못했던 것이다.
아침 먹을 시간이니 그만 내려가자는 아내의 뒤를 따라 고갯길을 천천히 내려온다.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걸음에 숲정이의 나무와 땅도 깨어나는 듯싶다. 문득 시상 한 구절이 떠오른다.
한 발짝 한 발짝
숲을 깨운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를 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