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가마솥 앞에서

당진 면천의 한 산골에서 산지 이태, 나의 집 현묘재(玄妙齋) 주위 풍광이 시나브로 정겹다. 집 앞으로 순하게 펼쳐진 마을을 거쳐, 아내의 땀 냄새 짙게 밴 450평 텃밭 왼편을 휘돌아 야트막한 뒷산으로 난 ‘큰 고갯길(대치로)’에는 희유하게도 ‘원효-깨달음의 길’이라고 새긴 표지가 서 있다. 집 들어서는 길이 1200년 전 원효, 의상 두 스님이 구법을 위해 당나라로 향하던 길목이라니! 평생을 부처님 밥 먹고 산 우리 가족과 두 성사(聖師)의 시공간을 넘어선 인연이 기이하다.
두 선지식은 이 길을 밟고 불교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는데, 하루에도 여러 차례 이 길을 밟고 사는 나는 이곳에서 어떤 흔적을 남길 것인가. 근(根, 감각기관)과 경(境, 감각기관에 비치는 대상)을 단순히 해 맑은 마음으로 살겠다며 생면부지의 시골동네로 내려온 ‘막무가내’식 결단도 알고 보니 부처님 손바닥 안 몸부림이었을 뿐.

귀촌 2년째지만, ‘주중 서울, 주말 당진’ 패턴을 마감하고 본격적으로 ‘당진살이’를 시작한 것은 올 겨울부터다. 30년 넘게 맺어온 반연을 정리하는 일이 만만치가 않았다. “이제부터는 ‘글농사, 밭농사’를 위한 삶을 정말 부지런하게 살아야 한다”는 ‘무염(無染)’ 형님의 당부는 당진으로 일상의 중심을 옮긴 뒤 내내 화두가 되었다. 고명한 작가이기도 한 이 형님은 “글 쓰는 이는 하루도 거르지 말고 써야 한다”며 ‘대통령이나 장관이 물러나면 전(前) 대통령, 전 장관으로 불리듯 중(승려)도 수행과 전법을 하지 않으면 중이 아니라 전 중’이라고 일갈했던 법정스님의 말씀을 빌려, ‘소설가나 시인도 글 쓰는 일을 거르면 전 시인, 전 소설가가 되는 것’이라는 정문일침까지 주었던 것이다.    
여남은 날 전, 일출 장소 답사차 아내와 함께 인근 왜목마을에 다녀왔다. 땅 모양이 왜가리 긴 목을 닮아 ‘왜목’이라고 불리는 이 바닷가 마을은 서해에서 일출과 일몰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꽤 유명세를 탄 곳이다. 그날 “새해 첫날 이곳에 와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게으르지 않고 ‘글농사’와 ‘밭농사’에 매진하는 당진살이를 발원하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1월 1일 새벽, 왜목마을행 대신에 메주를 쑤기로 했다. 일출은 집 옆 산에서도 볼 수 있고, 며칠 후 지인들과 함께 강원도 동해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으니, 새해 첫날이지만 차일피일 미뤘던 메주를 쑤는 게 낫겠다는 아내의 제안을, ‘발원’ 대신 ‘발원실천’으로 맞이하는 새해 첫날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으로 선뜻 따랐다. 사실 ‘메주 쑤기’는 겨울 농가에서 꼭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다. 마침 작년에 수확한 메주콩도 남아 있어 ‘메주 쑤기’는 서둘러 끝내야 할 숙제였다.
전날 저녁 메주콩 40킬로그램을 물에 담가놓고, 새해 첫 새벽부터 아내와 함께 아궁이방 부엌에 걸어놓은 가마솥으로 한껏 불린 메주콩을 옮겼다. 메주 만들기는 불을 지펴 콩을 끓이고, 푹 삶아진 콩을 비닐자루에 담아 으깬 후, 상자모양 나무틀에 넣고 나무망치로 다져 메주를 만들고, 조심스럽게 꺼내 지푸라기를 깔아놓은 판 위에다 말리는 쉽지 않은 과정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힘든 건 불 때는 일이다. 어릴 적 고향 양평집의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펴본 경험이 있지만, 오랜 시간 동안 불이 꺼지지 않게 쭈그리고 앉아 지키는 것 자체가 여간 고역이 아니다. 무릎도 아프고, 연기에 눈물을 쏟아내기도 하면서 온종일 아궁이 앞을 벗어나지 못했다. 콩이 끓어 넘칠라치면 바로 솥뚜껑에 찬물을 뿌려야 하므로 한 눈을 팔 수도 없다.

해뜨기 전부터 서둘렀는데도 저녁나절이 다 돼서야 ‘메주 만들기’가 끝났다. 그렇지만 예서 공정이 다 끝난 게 아니다. 메주를 띄우는 더 큰 난관이 남은 것이다. 꾸덕해진 메주를 건조기로 옮겨, 바람으로만 서너 시간을 더 말린 후, 볏짚을 깔아놓은 아궁이 방에 펼쳐놓고는 본격적으로 불을 때야 한다. 아궁이 방의 온도를 섭씨 30도 가까이 올려야 하므로, 수시로 온도를 확인하며 아궁이에 장작을 넣는다. 1도 올리는 데 이렇게 많은 나무가 사라지나! 한숨이 절로 터진다. 게다가 일주일 가까이 25도 안팎으로 온도를 유지해줘야 메주가 잘 뜬다니, 며칠 더 낮밤 가리지 않고 아궁이를 오가야 한다.
‘다짐의식’ 대신 ‘다짐실천’을 선택한 당진에서의 새해 첫날, 아내가 땀 흘려 수확한 토종 콩으로 메주를 만들었으니, 제법 ‘훌륭하게’ 밭농사를 지은 셈이다. 다짐의 본질은 실천에 있는 것이니, 잘 했다는 생각이다. 이제 남은 것은 ‘글농사’를 어떻게 지을 것인가이다. 밭농사를 위해 밭을 마련했듯이, 나는 집을 지을 때 ‘글농사’를 위해 북쪽으로 창을 낸 글방을 마련해 두었다. 사실 북창글방은 십여 년 전, 불심 깊었던 향산거사 백거이의 시 ‘북창삼우(北窓三友)’를 읽으며 품었던 오랜 꿈이었다. 
백거이의 삼우, 즉 거문고, 술, 시 대신에 나는 매화와 불서(佛書), 시를 세 친구로 삼기로 했다. 밭에서는 아내와 농사를 짓고, 글방에서는 세 친구와 즐거이 풍류와 시문, 진리를 논하게 될 당진살이! 녹녹하지는 않겠지만 잘 해내보겠다며, 글방 옆 서재 ‘다경향실(茶鏡香室)’에 모신 원불 앞에 향 사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