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경 박사 특별기고] 화중스님의 미망인과 상좌에게 듣는 ‘대둔사 제다법’
“차 기가 마를 때까지 덖으면 차 창은 아주 못쓰게 돼어버려 2~3번 정도 덖어”
화중스님의 미망인과 상좌에게 대둔사 제다법을 듣다
지산화중스님의 상좌 이종식(李鐘植, 1938, 戊寅生~ 79세) 선생은 호적으로는 39년생으로 되어 있다. 선생과는 두 번 현장조사가 이루어졌다. 10월 13일과 11월 5일이다. 이종식 선생의 법명은 해운 종식(海雲 鐘植) 법호는 인우(仁雨)였다. 법계는 응송 영희로부터 받았다. 당시 응송 영희는 주지였고 지산 화중은 재무를 담당했다. 스승인 이화중(李化仲, 1898~1963)은, 지산(芝山)은 법호이고 법명은 태섭(泰燮)이었다. 화중(化仲)은 속명이다. 해운 종식스님이 대둔사로 출가한 해는 1958년경이다. 이후 2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대둔사에서 지산스님의 상좌 역할을 하다가 군대를 갔다. 지산스님은 머리가 명석하고 주산을 잘 놓아 일제강점기부터 회계업무를 담당했다. 곱셈 나눗셈 같은 것을 탁월하게 잘 했다. 아무도 따라갈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아마 대둔사에 계실 때 거의 쭉 재무를 담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사람은 참으로 점잖고 훌륭한 분이었다.
지산화중 스님의 상좌 이종식 선생.
지산스님은 육봉스님(六峯 法翰, 1867 정묘생~1942년 갑신년 6월 1일 입적)의 사위이다. 대처승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대둔사에서 육봉스님 이전은 다 비구였으나 육봉스님부터 대처가 생기게 되었다. 육봉스님은 아들이 넷, 딸은 셋인데 지산 화중스님의 미망인 김덕심(金德心, 1922~ 壬戌生 95세, 법명 萬法心 보살)은 육봉스님의 막내딸이었다. 육봉스님의 자제들과도 교류가 깊었다. 지산스님의 상좌는 많았다. 절과 인연이 없다고 느낀 상좌들은 떠나고 최종적으로 2명 정도 남아 있었다. 한 명은 위로 말하자면 사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돌아가시고 마지막으로 본인(해운 종식)만 남아 승려 생활을 3년 정도 하다가 이후 환속하였다.
지산화중스님은 표충사에서 거의 기거했다. 응송은 사하촌인 백화사에서 주로 기거하였고 대둔사 내에서는 동국선원에 거주했다. 지금은 대광명전을 품고 있는 전각을 동국선원이라고 하지만 당시에 동국선원은 천불전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이 주지실이었다.
대둔사 대웅전 중창주 육봉스님의 막내딸이자 이화중 스님의 미망인 만법심 보살. 대둔사지 편찬 때 협조자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만법심 보살과 해운스님이 구술하는 제다법이 모두 같다.
대둔사에서는 차를 마시는 일이 다반사였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다감(茶監)이라는 중책이 있었다. 어느 절에나 다감은 있었다고 한다. 채다에서부터 차를 관리하는 일까지를 맡은 사람을 다감이라고 했다. 사찰에서는 다감의 총 지휘 하에 차를 만들었다. 그런데 당시의 대둔사에서는 다감이 없어졌고 각 권속들이 있어서 차를 만들었다.(이 권속이라는 것이 응송스님이 쓴 <동다정통고>에서 쓴 찻독이라는 의미이다.) 자기 권속끼리 몇 사람씩 차를 만들곤 하였다. 그러나 차를 만드는 방법이 다르거나 소통을 하지 않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다감이 차를 만들어서 각 전각에 나누어 주는 일도 없었다. 그저 모시고 있는 스승과 상좌가 중심이 되어 차를 만들었다. 대둔사 같은 경우는 나한전 옆에 차밭이 있어서 그곳에서 차를 따서 만들었다. 지금은 그것도 없어져 버렸다. 밖으로 차를 따러 나갈 때는 대둔사에서 약 5키로 정도 벗어난 곳인데 삼산면 평활리 녹산골이라고 있다. 그곳에 차밭이 조금 있어 그곳에서 차를 따서 만들기도 했다.
평활리는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바다로 흘러드는 작은 하천이 있어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평지에 이룩한 마을이므로 평활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평활, 괴바웃골, 낙삼골, 너분내, 녹산골, 당거리, 삼거리마을 등이 있다. 평활마을은 본 마을이 시작된 동네로, 지명유래는 평활리의 그것과 같다. 괴바웃골마을은 괴(고양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낙삼골 마을은 낙서암이 있었다 하여 불린 이름이다. 너분내마을은 앞에 넓은 내가 있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며, 녹산골 마을은 녹산 앞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 산자락에 야생 차밭이 있었다. 당거리 마을은 서낭당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불린 이름이고, 삼거리 마을은 앞에 세 갈래의 길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산 스님은 차를 만드는 법도 쉽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 비법을 쉽게 공개하지 않고 음다와 차살이 속에서 한 마디씩 지침처럼 일러 주었다. 그리고 일상에서 순간순간 나오는 이야기 속에서 ‘아 차 만드는 법이 저렇구나’ 하고 눈치로 익혔다. 그리고는 차철에 손 넣을 때 경험으로 체득하고 스승께서 ‘옳다, 옳지 않다’ 하고 지적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제다법을 가늠하고 했었다. 차는 곡우를 전후로 해서 땄다는 말은 거의 동일한 진술일 것이다. 차는 창이 있고 기가 있었다. 창은 제일 좋은 것으로 치고 기는 그 다음으로 좋은 것으로 쳤다. 그런데 지산 화중스님께서는 하나는 확실하게 강조를 하셨다. 차를 딸 때는 우리가 참새 혀만 한 잎을 딴다고 하는데 스님(지산화중)께서는 “참새가 새끼를 낳아 가지고 부화를 해서 어미가 먹이를 물어다 줄 때 입을 벌리면 그 때 참새 새끼 혓바닥만한 그 찻잎이 최고이고 일품이다”라고 늘 말씀하셨다.
여러 번 덖은 것은 손으로 온도를 맞추고 끄집어내야지 오래 덖다 보면 부수어지기 때문에 오래 덖을 수가 없었다. 가령 차 기가 마를 때까지 덖으면 차 창은 아주 못쓰게 되어 버리기 때문에 고작해야 2번 정도 덖었다. 그리고 조금 모자라다 싶으면 많이 덖을 때는 3번까지도 가능했다. 대개 한 번 두 번으로 끝난다. 어떻게 구증구포라는 이야기가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차 창과 기가 다 마를 때까지 덖는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자기 권속끼리 풍속이 있어서 그렇게 차를 만들고 숨은 비결이 있는 냥 이야기들 했지만 차 만드는 방법은 거의 비슷했다. 절에서 모든 승려들이 차를 만들고 마셨지만 차밭이 작아서 차가 많이 나오지도 않았다.
지산 이화중 스님의 영정.
차를 덖을 대는 따로 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밥하는 가마솥을 이용한다. 손으로 해야만 온도가 감정이 되기 때문에 늘 맨손을 사용하라고 했다. 더러는 대솔을 사용한 예도 있다. 너무 뜨거울 때는 대솔을 사용했지만 지금처럼 다른 도구는 사용하지 않았다. 요즘처럼 장갑을 낀다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다. 솥의 온도를 손으로 감지했기 때문에 맨손으로 주로 차를 만들었다. 지산스님은 대솔까지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차를 만드는 작업은 매우 오묘한 작업이었다. 굉장히 어려운 과정이었다.
차를 덖는 과정에서 불을 땔 때는 불길이 과하면 절대 안 된다고 배웠다. 첫 번째 살청에서는 매우 높은 온도에서 덖었다. 그러나 아주 싸목싸목 균일한 불길을 유지하면서 불을 때는데 그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었다. 불은 잡목을 주로 해다가 땠고, 대나무 사용은 절대 금했다. 대나무의 불길이 좋은 것 같이 보이지만 화력이 부족하고 활활 하지 않아서 안 된다고 했다. 장갑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손으로 감지했을 때 온도가 올라가거나 하면 불을 그만 때라고 할 때 불길을 물러야 했기 때문에 그 조화가 맞지 않으면 차가 타거나 눌거나 해서 실패를 봤다. 불길 조절을 해운 종식스님이 했다.
차를 유념할 때는 덖어서 손을 합장하듯이 하고 한쪽으로만 비볐다. 손을 모아 비비는 것이 차품이 훨씬 좋았다. 그리고 부수어지기 때문에 왔다 갔다 하는 식으로 비비면 말아지기가 안 된다 해서 금했다. 소위 말해서 다시 비비면 찻잎이 풀어지기 때문에 한쪽 방향으로만 비빈 것이다. 한쪽으로 쭉 밀었다. 손을 모아 비비는 방법보다 돗자리 위에서 비비는 것은 힘을 지탱해 줄 수 있어 그렇게 했다. 차를 비빌 때는 손가락 사이에서 찻물이 나왔다. 진이 나오도록 비비라고 했다. 이것은 “니만 알아라” 하셨는데 그것은 지산스님이 말씀하신 것 오로지 하나 뿐이다. 다른 분들은 그렇게 정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반적인 것은 다 똑 같다. 아홉 번 덖고 또 뭣하고 그런 과정들이다. 그렇게 말들을 했다.
건조할 때는 그늘에 돗자리를 깔고 말렸다. 구들장에 불을 좀 때서 건조하기도 하였다. 아주 골이 가는 돗자리에서 비비고 건조하고 했다. 보관할 때는 보통 옹기에 담아 보관했다. 차를 화선지나 종이에 조금씩 싸서 약재 싸듯이 쌌다. 그것을 옹기 즉 오가리 같은 단지에 담아서 시렁 위에 올려 보관하였다. 더러는 종이에 싼 차를 줄로 매달아 보관하기도 했다. 대바구니 같은 것에 담아 시렁 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그렇게 보관했다가 조금씩 꺼내서 차를 우려 마셨다. 상온에서 차를 보관했기 때문에 약간의 변질은 감안하고 마셨다. 다시 덖는다거나 요즘처럼 가향을 한다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다. 자연의 순리대로 따랐다. 뭉쳐서 만든 떡차 종류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초의스님의 다법이라고 스님은 늘 강조하셨다. 지산 화중스님은 아는 것도 많았고 훌륭한 인물이었는데 거의 말이 없고, 표현력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 스님은 차를 올리면 불을 어떻게 때서 차를 우렸는지 금방 알아챘다. 차를 우리는 물을 끓일 때도 균일하게 불길을 조절하면서 때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정신을 팔고 있다가 차를 올리는 시간을 놓치고 급하게 불을 때서 물을 끓여 차를 올리면 나무라곤 했다. 어디서 놀다가 정신 팔고 있다가 차를 여유를 갖고 끓이지 않고 급하게 우려냈다고 꾸중했다. 찻물을 끓일 때도 천천히 정도가 있게 끓어야 하는데 급하게 물을 끓이다 보면 차의 품을 그르치게 된다고 하였다. 차를 우릴 때는 한 번 끓여서 마셨는데 두 번 정도까지는 마신 적도 있다. 물식힘사발은 사용하지 않았고 찻잔받침은 사용했다.
대흥사에서는 차를 마시는 일은 다반사였다. 차를 다 만들어서 들었고 또 우리 스님에게 차를 배우겠다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대둔사에서의 승려 생활 중에 지산 화중의 제다법을 보고 본인 역시 같이 차를 만들었다. 대둔사 승려라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거의 다 차를 만들었다. 절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배웠다. 말하자면 중창하는 것부터 음식 하는 것까지 절 살림에 있어 안 배운 게 없다 할 정도로 많은 것을 섭렵했다. 그런 과정을 겪어야 만이 절 생활이 가능했다. 그런데 지산 스님은 유별나게 모든 일을 잘 했다. 군대를 갔다가 전역하고 대둔사를 다시 들어갔지만 그 당시는 대처 비구 싸움으로 초토화가 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차를 만들고 하는 경황이 없었다. 더욱이 정화 사업으로 들어 온 스님들은 차를 몰랐다.
예용해 선생이 지산 화중스님을 현장 조사했던 1962년에는 해운 종식스님은 군대에 입대해서 대둔사에 없을 때였다. 전역을 1963년 7월 18일에 했다. 그리고 지산 화중스님이 그해 9월 26일 목요일에(음력 8월 8일)에 열반했다. 전역하고 와서 북일면 내동 본가에 한 달 정도 있었는데 지산 화중스님이 열반했다는 소식을 듣고 머리를 깎고 대둔사로 와서 다비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3년 정도 대둔사에 더 있었다. 지산 화중스님의 상좌는 많았다. 절과 인연이 없다고 느낀 상좌들은 떠나고 최종적으로 2명 정도 남아 있었다. 한 명은 위로 말하자면 사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돌아가시고 마지막으로 본인(해운 종식)만 남아 승려 생활을 3년 정도 하다가 이후 환속하였다. 환속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비구 대처의 싸움도 치열했고, 백양사 권속들이 들어와서 힘든 생활이 거듭되었다. 서옹 석호(西翁 石虎 1912~2003)스님도 당시에 대둔사로 들어왔다. 사실은 본인은 이 분들과도 아주 교유가 좋았다. 당시에 거의 많은 대처승들이 사하촌으로 나갔지만 해운 종식스님은 대광명전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은 혼자 의지로 대둔사를 나오게 되었고 당시의 주지는 지웅스님이었다. 지웅스님이 장흥 보림사로 가시게 되면서 환속을 결심했다.
승려생활을 할 때의 해운스님.(오른쪽)
대둔사에서 찍은 사진은 딱 한 장이 남아 있다. 환속하여 스무 번을 이사를 하다 보니 남아 있는 사진이 없다. 오른쪽이 본인이고 왼쪽은 당시 대둔사 승려였는데 법명이 가물가물 생각이 나지 않는다. 환속하고 바로 북일면 내동 본가로 들어가 살다가 목포로 이사를 했고, 목포에서 내자인 장임단(張林丹, 1945 乙酉生~2003)이 59세로 별세하고 광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초의차의 실체는 고전이나 문헌기록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현장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러한 전승맥락과 현장의 고증을 입증할 수 있는 기록은 크게 두 종류이다. 초의차 제다법이 대둔사에서 전승되어 정리된 것은 응송과 지산 화중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근․현대로 계승되는 과정에서 초의차의 전수자라는 하나의 문헌 기록이 발견된다. 그것은 1997년도에 대원사에서 발행된 예용해(芮庸海, 1929~1995)의 <차를 찾아서>이다. 예용해 전집 총 5권 중 <차를 찾아서>는 3권 36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주제로 이야기는 펼쳐진다.
예용해 선생이 펴낸 <차를 찾아서> 표지. 이 책에 게재된 대둔사의 초의차 제다법은 아주 상세하다.
이 중에 90쪽 ‘우전차’라는 제목으로 초의차 전수자 이화중(李化仲, 1898~1963, 芝山 化仲, 예용해는 법명이 화중이라고 했는데 법명은 지산당(芝山堂) 속명이 이화중(李化仲)의 이야기와 현장조사 이후 왕래했던 이야기, 호남의 명찰 대둔사의 제다법, 우전차 한 통이 맏사위를 통해 해남 땅끝에서 서울로 배달된 이야기, 그 차를 받은 뜨거운 감회 등 대흥사의 당시 정황과 차에 대한 담론들이 흥미롭다. 예용해가 정리한 <호남의 명찰 대둔사의 다맥과 제다법>은 다음과 같다.
“차가 간직한 향기와 맛과 색이 제대로 갖추어지기 위해서는 안개가 끼거나 이슬이 내리지 않은 맑은 날 아침에 찻잎을 따야 한다. 당시 채다의 환경은 숲이 우거지고 덩굴들이 얼기설기 설킨 속에 깊이 숨은 차나무를 찾아 길도 없는 골짜기와 등성이를 수없이 헤매 새끼손가락 한 마디에도 못 미치는 야릿한 잎새들을 한 잎 한 잎 따 모은다. 곡우절 전에 새순을 따서 햇차를 만들었다. 차를 따서 바로 만들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하룻밤을 재워서 덖고 비비고 한 것도 있었다. 덖을 때는 무쇠솥이나 돌솥이 너무 달거나 설어도 못쓰니 불을 고르게 맞추기가 어렵고 또 솥바닥에서 자칫 보드랍디보드라운 차의 새순이 타거나 서로 엉겨서도 안 된다. 손으로 비빌 때는 힘을 세게 주면 잎새끼리 덩어리지고 힘을 빼면 진이 제대로 빠지지 않으니 잠시도 한눈을 팔수가 없을뿐더러 한시도 손길을 쉴 수가 없으며 조금도 마음을 놓을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채다해서 곧 밑이 두꺼운 가마솥에 불을 뭉긋하게 지펴서 손으로 골고루 덖어내서는 멍석이나 자리에 대고 또 손으로 비비며 진을 빼야 한다. 이렇게 중간에 쉬는 일이 없이 덖고 비비기를 아홉 번을 거듭했을 때 비로소 찻잎새 깊숙이에 갊아진 차의 온전한 참모습을 찾아낼 수가 있게 된다. 완성된 차는 백지로 싸서 결이 고운 오동으로 만들어진 네모난 차통에 담았다. 차라리 차라 하기보다는 정성의 덩어리라 해야 옳을 일이다. 더불어 차를 향기롭게 우리기 위해서는 차에 못지않게 물도 중요하다. 옛 다인들은 강물 줄기의 한가운데서 떠올린 물을 으뜸이라 했고 그 다음이 샘물이며 우물물은 마지못해 쓰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백화사에서 응송스님과 같이 찍은 지산 화중스님(우측).
예용해는 마치 에세이처럼 글을 정리하고 있지만 이것은 지산 화중의 인터뷰를 통한 회고라고 사료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록인 응송이 <동다정통고>에서 말한 대둔사의 제다법이다. 응송은 본인의 저서 <동다정통고>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차를 대한지도 정말 오랜 세월이 흘렀다. 거의 70여년을 하루같이 차를 함께 하면서 감회도 많았다. 초의선사의 유작인 <동다송>을 연구하여 그 제법대로 차를 만들기도 하고 혹은 사미시절 대흥사에서 배운 방법도 생각해 보곤 했으나 좋은 차를 만들어 좋은 물에 달여 그 중정을 얻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한 가지 터득한 것은 무념의 경지에서 정한 마음으로 차를 대하면 그 차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알았다.”그러면서 같은 책 27쪽에서 <대흥사 작설차와 다풍>을 기록하고 있다.
필자는 본 논고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현장조사를 병행하였다. 그것은 대둔사에서 전승되어 온 제다법을 재현하여 그 맥이 어디까지인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런데 예용해의 기록에서 전하고 있는 그대로의 제다법을 현장에서는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하여 본 논고가 제다법을 정리하는 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대둔사의 다풍과 초의의 제다법>이라는 논제로 재정리할 예정이다. 본 기고에서는 예용해의 기록으로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