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타 스님이 들려주는 금강산 전설] 12 - ‘이허대’ 전설
옛날 경상도에 성은 리씨나 이름이 없이 사람들 속에서 리 서방이라 불리는 한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그는 남달리 총명하고 재능 또한 뛰어났으나 서자로 태어난 탓에 수모를 면할 수 없었고 나라 위해 힘껏 일하려 해도 양반 사회는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울분과 원망에 차있던 리 서방은 내 차라리 이름난 명산 금강산에 들어가 풍월을 벗 삼아 자연을 즐기리라 마음먹고 야속한 세상에 원한의 눈물을 뿌리며 집을 나섰다.
큰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여 금강산 어구에 들어서니 기기묘묘한 산천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 모두를 반기는 듯하였다.
높은 봉우리들은 구름 속에 아득히 보이고 발아래를 굽어보면 맑은 물이 희고 깨끗한 돌을 씻으며 흘러 내렸다. 한쪽을 바라보면 옹긋쫑긋한 기암괴석들이 금방 떨어질듯 그 사이사이에 댕댕이넝쿨, 칡넝쿨이 얽혀있고 머루 다래 또한 무르익어 향기롭기 그지없었다.
이 서방은 다래 넝쿨 밑으로 다가가 탐스런 다래를 한참 따먹은 다음 아름답게 우짖는 새소리를 들으며 걷다가는 서고 서서는 한참 주위를 경탄 속에 바라보다가는 다시 걸으며 산세 따라 옮겨가는데 머리위에서 깍깍 하는 까치소리가 들렸다.
“이 근처에 사람이 있나보다. 까치가 우는 걸 보니....”
그때 비로봉 쪽에서 인기척 소리가 너더니 사나이가 날랜 걸음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옷은 언제 해 입었는지 갈기갈기 해진 것을 몸에 걸치었고 길게 자란 머리터럭은 대강 뭉그려 머리에 얹은 사나이는 손에 장검 같은 것을 지팽이 삼아 들고 있었다.
....벽상에 걸린 칼이....병자국치를 씻어볼까 하노라.
차림새는 비록 남루하나 거침새 없고 기세당당한 그 모습은 읊조리는 시조에 담긴 애국의 넋이 그대로 몸에 밴듯 하였으나 나이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인적 없는 산 중에서 뜻밖에 사람을 만난지라 리 서방은 어리둥절하여 걸음을 주춤하고 있는데 어느새 옆에 와 선 사나이는 공손히 말을 건네었다.
“어디서 오는 길손인지 보아 하니 금강산의 묘한 풍치에 반한 듯하오이다”
리 서방은 그 말에 수긍하며 역시 공손히 머리 숙여 답례하였다.
“초행길에 향방 없이 산중을 헤매다가 이렇게 놓은 뜻 품고 사시는 귀인을 만났으니 정말 반갑소이다.”
“나는 손이 생각하는 그런 위인은 못되오이다.”
이렇게 말하며 잠간 미소어린 표정을 짓던지 사나이는 “우리서로 산중 벗이 되었으니 이왕이면 함께 다리쉼도 하는 겸 이야기를 나눔이 어떠하오이까.”하며 성큼 성큼 걸어 건너편 바위 돌 위에 올라 걸터앉았다.
리 서방은 어둠이 깃드는 산중의 저녁을 걱정하던 중인지라 사나이의 뒤를 따라 그 곁에 가 앉았다. 사나이는 노을 속에 잠긴 금강산의 풍치를 이윽토록 바라보며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리 서방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음절절반 섞인 투로 이렇게 말하였다.
“손은 나이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어찌하여 홀로 이 산중에 들어왔소이까. 내 이 산중에 살며 보느라니 금강산의 경치를 탐내어 오는 이도 있고 이곳에 산다는 신선을 만나 하늘에 날아오를 꿈을 안고 오는 이도 있고 인정사정없는 각박하고 야속한 세상을 원망하며 자연을 벗 삼아 잠시나마 마음 편히 살고자 오는 이도 있더군요. 대체로는 이러할 뿐 금강산의 진미를 알고 진실로 즐기고 정을 붙이는 이는 별로 없었소이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딱히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마음만 서글퍼지고 답답할 뿐이외다. 인생길에 안으로는 부자간에 의리가 제일중하다 하건만 내 서자의 불우한 처지에 있는지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니 이 몸은 사람값에 들지 못하는 불우한 인간이라 하지 않을 수 없고 밖으로는 나라 위해 충성하는 것이 백성의 도리라 하면서도 신분이 천하다고 세상은 이 몸을 용납하지 않으니 세상에 태어난 보람 과연 어디에 있다 하오니까. 이래저래 살 길도 막히고 갈 길도 막막하여 빈부귀천 따로 없는 이 산중에 몸을 의탁코자 하였나이다.”
이렇게 진속을 터져놓은 리 서방은 자기도 금강산의 신선을 사귀어 눈물 없고 고통 없다는 신선세계에도 가보고 싶었다고 고백하였다. 리 서방의 가식 없는 이야기에 감동된 사나이도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 내 나서 자란 처지 그대와 다를 바 없고 이 산중에 들어올 때 먹은 생각 또한 그대와 같았구려. 하지만 사람차별 없는 자연에 정붙이고 오래 사는 사이 내 마음도 달라졌구려.”
이렇게 말하다가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 내 이곳에 와 살면서 들은 이야기도 많고 보고 느끼며 감동깊이 체험한 것도 참으로 많소이다. 예로부터 금강산은 천상천하 으뜸가는 명승지라 하늘의 신선, 선녀들도 이곳에 내려 즐기었고 황홀경의 경치에 매혹되어 이 승지에 그대로 눌러 앉아 살기도 하고 돌산의 굳어져 그 흔적을 남기기도 하였다누만. 천태만상을 이룬 금강산의 뭇봉우리들과 계곡, 명소마다 이런 이야기가 깃들지 않은 곳이 없다오. 또 세상 사람들은 금강산이 하도 부러워 여기 와보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았고 지어 유언으로 후세에 남기기도 하였다오. 어찌 그 뿐이겠소. 금강산에는 나라를 지켜 용맹을 떨친 애국적인 장군들과 명인들에 대한 감동 깊은 이야기도 정말 많소이다. 이런 이여기를 들으면서 금강산의 장엄하고 도고하며 기묘하고 신기한 모습을 보면 가슴속에 단군조선의 넋이 안겨오고 금수강산 이 나라를 지켜 싸운 선조들의 숭고한 뜻이 눈물겹게 새겨지는 것이 아니겠소.”
내금강 풍경
그러면서 그는 예로부터 충과 효는 하나로 이어져있다 하였거늘 여기서 힘과 지혜를 키워 도탄에 빠진 민생을 건지고 외적을 막아 나라를 지키면 이것이 진실로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하였다.
이렇게 말하며 리 서방의 동정을 눈여겨 살피던 그는 문득 통쾌하게 웃으며 흥분속에 잠겨있는 리 서방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젊은이, 우리 서로 속을 털어놓았으니 이제 마음을 합치고 뜻을 같이 하면 어떻겠소?”
“진정 제 소원하는 바로소이다. 이렇게 무지한 소인을 너그러이 대해주니 정말 고맙소이다.”
리 서방의 응답에 사나이는 다시 다짐을 받듯 진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속으로 사귄 벗은 오래 가기 어렵고 시세에 따라 사귀는 벗은 중도에 변하기 쉽다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벗을 사귀는데서 의리와 믿음을 첫째로 꼽았고 겉과 속이 다름을 금물이라 하였다오. 그러니 우리 이제 사귐은 의리와 뜻을 중히 함이요. 야속한 세상의 온갖 풍파에도 변치 않을 그런 약속으로 삼아야 되리라고 믿소이다.”
“내 어른님의 그 뜻을 백번 죽더라도 어기지 않을 것이오니, 두고 시험해 보소이다.”
이렇게 서로 험로를 함께 헤쳐 갈 의리와 믿음을 주고 맺으며 다짐하는 사이에 해는 기울고 어둠이 사방 골짜기에 깃들었다.
“ 자, 이제는 내 집으로 함께 갑시다.”
이렇게 말하며 사나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류 다른 지팡이를 들어 어둠을 깨치는 듯 주위를 한번 휘둘렀다. 리 서방은 의아한 듯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것이 무엇인가 물었다.
“이것 말인가? 대대로 물려받아오는 보검이지요. 이 보검을 억세게 틀어잡고 내 뜻을 키우고 신념을 굳힌답니다.”
사나이는 자랑삼아 검을 한번 쓸어보고 얼굴에 긍지에 찬 미소를 담았다. 이때 이서방도 마음속에 긴장이 풀린 듯 웃음어린 어조로 말하였다.
“ 이제껏 뜻 깊은 연약을 하였으나 통성명은 못하였소이다. 나는 리 서방이라 하오이다.”
“참 그랬댔구만. 나도 이름이 따로 없고 성은 허씨라 하오. 그러니 이름 없는 두 사람이 하나로 되었은 즉 이제부터 이름을 ‘이허’라 함이 어떻소이까.”하며 허씨도 호탕하게 웃었다.
리씨와 허씨가 서로 손을 맞잡고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을 따라 한동안 걸어갔다. 비취색 감도는 물길을 가운데 두고 갖가지 나무통이 빼곡이 들어섰는데 그 속에 우뚝 솟은 벼랑 밑에 자연굴이 있었다. 그리고 그 굴 옆으론 크지 않은 폭포가 쏟아 내리는데 그 밑에는 물안개 피어나는 소가 있었다.
이 담소 곁에 이른 허씨는 “여기가 내 집이요.” 하며 한발 앞서 풀잎으로 엮어 세운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 불을 켰다. 잣기름으로 만든 등불은 꽤 밝아 책도 읽을 만하였다. 자연 동굴속이라 어중충한 감도 없지 않았으나 짐승가죽으로 꾸려놓은 방안은 아담하고 정돈되어 있어 아늑한 감을 주었다. 허씨는 송이가 소북이 담겨있는 바구니와 대통에 담은 술을 내놓으며 자리를 권하였다.
“이만 하면 신선도 부러울 것 없지요. 갖가지 산열매와 솔잎으로 술을 빚고 송이와 산채로 안주하고 또 이런 것도 있소이다.”
허씨는 잘 닦고 구운 잣과 밤까지 내 놓았다. 그리고는 리씨에게 한잔 부어주며 어서 마셔보라고 권한 다음 자기도 한잔 마시면서 말을 이었다.
“여기에 신선과 좀 다른 것이 있다면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마련한 것이고 익은 음식이라는 것이라 할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건너며 한잔 두잔 권하고 받는 사이에 만시름이 풀리었다. 허씨와 리씨가 기쁨 속에 잠기고 즐기는 마음 방안에 가득 찼다. 거나하게 취한 허씨는 소매 속에서 피리를 꺼내들더니 한번 들어보라고 하였다. 조용하면서도 구성지게 울리던 피리소리는 점차 곡절 많은 세월 속에 서린 인생의 고충을 파헤치는 듯, 야속한 세상을 저주하며 울분을 토하는 듯 세차게 울리면서 리 서방의 가슴에 파고들며 심금을 울리었다. 격동된 리 서방은 열기 띤 얼굴로 허씨의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다가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며 한 곡조 지어 불렀다.
벗따러 벗따러 갔더니
익는 벗 선 벗 다 있었네
이 벗 저 벗 다 벗이나
좋고좋은 벗 내 벗뿐이로세.....
이처럼 흥에 겨워 춤추며 노래하던 리 서방은 놀란 듯 입을 다물고 문밖을 눈여겨 보았다. 그 모양을 본 허씨는 웃음 속에 리 서방을 이끌고 문 앞에 다가서며 저 밖을 한번 내다보라고 하였다. 자연 속에 펼쳐진 신기한 광경에 리 서방은 정신마저 어리벙벙해졌다. 분명 꿈은 아닌데 꿈속에 든 듯하였다. 은반 같은 달은 고요히 물속에 잠기고 은은한 달빛에 주위는 밝은데 흰 두루미떼 내려와 우줄우줄 춤추고 있었다.
“저 두루미란 날짐승도 음률을 알고 태평한 자연을 즐기나봅니다. 나도 처음에는 놀랐소이다. 그런데 두루미뿐이 아니고 피리소리 곱게 울리면 산중의 뭇짐승도 방해를 끼칠세라 조용조용 모여든답니다. 그러니 이 어찌 신선세계 아니겠나요.”
이렇게 말하며 허씨는 금강산이야말로 천상천하 그 어디에 가도 볼 수 없는 절승이고 내 나라의 자랑이라고 하였다.
이튿날 허씨와 리씨는 아침 일찍 잣나무 숲으로 들어가 아침 해 솟는 동해바다의 절경을 바라볼 겸 우뚝 솟은 큰 바위위에 올라섰다. 이때 허씨가 기름종이에 정성껏 싼 무엇인가를 내놓으며 이런 책을 읽어본 일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펴보니 그것은 병서였다. 책명을 들은 일이 있으나 아직 보지 못하였다고 리 서방이 대답하였다.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소. 그러니 우리 서로 뜻을 합쳤으니 시간을 공연히 허비치 말고 배우고 익힘이 어떠하오.”
허씨의 손을 맞잡으며 리 서방은 흥분된 심정을 터치었다.
“내 이제부터 정성들여 배우리다. 허형은 나를 친동생으로 믿고 사정보지 말고 종아리를 치며 가르쳐주기 바라오이다.”
이때부터 리씨와 허씨는 분과 초를 아껴가며 밤에는 병서를 읽고 낮에는 지리를 통달하여 무예를 익히었다. 그러는 과정에 리씨는 몰라보게 담이 커지고 칼 쓰고 활 쏘는 재간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어느 날 그들은 저들에게 애국의 넋을 심어주고 두려움 모르는 용맹과 힘을 안겨준 이 금강산을 지켜 살며 이 길에서 변치 말고 운명을 끝가지 같이 할 철석의 맹세를 다지고 처음 만났던 선돌위에 ‘리허대’라는 글발을 새기었다. 이 글발은 새기던 날 저녁노을은 재능과 용맹을 겸비한 금강산의 이허장군을 축복하듯 주변의 뭇 봉우리들과 계곡을 붉게 물들이었고 두 장군의 기쁨에 넘친 호탕한 웃음소리는 이허대 골안에 메아리쳐 울리었다고 한다.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 회장 법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