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암스님 기고] 왜, 굳이 부처님의 복(福)인가?
“‘등 값’은 잘못된 표현…정성이 깃든 ‘등 공양금’으로 바꾸자”
작년 5월 16일 동국대운동장에서 열린 부처님오신날 연등회 행사장면
올해 부처님오신날이 한 달 여 앞으로 다가왔다. ‘환생도량’을 표방하는 안성 도피안사에 주석하면서 ‘금강경환생대탑’ 세우기 불사원력을 세우고 있는 송암 스님이 이번엔 부처님오신날과 등공양에 관한 글을 보내왔다. 송암 스님은 “사월초파일·부처님오신날은 절에 등공양 올리는 날이라는 걸 온 국민이 다 안다. 말하자면 묵시적으로 공인된 전법의 날이다. 따라서 이때를 맞이하여 불자들은 거국적으로 복 짓기 운동을 열렬하게 펼쳐나가자”고 제안한다. 편집자
사람은 복덩어리[福團]이다
1. 삶은 복에 의해 좌우된다
인간의 삶을 어떤 주재자나 정해진 자신의 팔자나 운명이 주관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운명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복을 운명이라고 말하면 될 것이다. 사람은 복에 의해 그 삶이 좌우되어서다. 따라서 복은 삶에서 절대적이다.
사람은 복이 있어야 육도(六道) 중에서도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다. 복이 있어야 부처님 가르침도 만나고, 복이 있어야 좋은 나라에 태어나고, 훌륭한 부모나 현명한 자식을 만나고, 어진 아내나 유능한 남편을 만나고, 의좋은 형제와 자매를 만나고, 내지 다정한 친지와 신의 있는 친구를 만나고, 공부도 많이 할 수 있고, 시험을 봐도 합격하고, 몸은 건강하고 취업도 잘되고, 진급이나 승진도 빠르게 되고, 내지 식복(食福)·처복(妻福)·안복(眼福)·청복(聽福) 등등, 가히 인생사 복으로 시작되고 복으로 살아가고 복으로 끝난다고 말할 것이다. 복에는 왕후장상, 남녀노소나 갑남을녀, 빈부귀천이나 동서고금마저도 없다. 누구나 복을 입에 달고 복타령을 소리 높여 부르며 살아간다.
복이 없으면 평화 시에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고, 복이 적으면 온갖 고생을 하고, 뜻을 이루기가 어렵고, 사람 가운데서 인정받기조차 어렵다. 복이 부족하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어쩌면 사람의 삶에서 복을 빼면 삶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아마도 70억 인류 중에서 복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복이 있어야 그 힘으로 죽어야 복된 죽음이다. 이처럼 복이 많을수록 고통이 적고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간다는 사실에 누구도 의의(異義)가 없을 것이다. 인간 삶의 ‘행·불행’은 복에 좌우된다고 할 것이다. 어찌 감히 복을 소홀하게 대하랴.
2. 복의 정체는? ‘주고[授]·받음[受]’이다. 한마디로 ‘주는 것’이다
베푸는 것이다. 베풀고 나면 돌고 돌아서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결국 ‘주고받는’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이 세계도 그렇다. 생각해보자. 사람의 참모습과 세계[宇宙]의 참모습은 어떻게 생겼을까? 또 인생과 세계의 궁극적 비밀은 뭘까? 답은 역시 ‘주고·받음[授受]’이다. 이 ‘주고·받음[授受]’이 인간과 세계의 참모습이고 본 바탕이며 비밀 아닌 비밀장(秘密藏)이다.
먼저, 이 세계는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이 세계를 움직이는 최고의 가치[진리]는 무엇일까? ‘주고·받음[授受]’이다. 46억 년 전, 지구가 만들어질 때도 ‘주고·받음[授受]’으로 시작됐다. 다른 별들과 수없이 부딪쳐 그 속에서 준 것도 있고 받은 것도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금(金)도 지구와 다른 행성의 부딪침에서 온 것이고, 심지어 인간마저도 저 멀리 다른 행성, 우주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주고·받음[授受]’이 지구와 세계의 형성이고 참모습이며, 우주의 불가사의한 불문율이다.
다음으로 인간은 무엇인가? 역시 ‘주고·받음[授受]’이다. 심리적·물질적 모든 걸 통틀어서 ‘주고·받음[授受]’이다. 구체적으로 생각과 말과 행위를 끊임없이 긴밀하게 ‘주고·받음[授受]’이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먼저, 주어야 받는다!’다. ‘주는 것’이 ‘받는 것’이고, ‘받는 것’이 곧 ‘주는 것’이 된다. ‘주고·받음[授受]’은 둘이 아니다[不二]. 이런 입장에서 인간 삶의 진실은 시공을 초월해 ‘무엇을 얼마나 줄까?’다. 한발 더 나아가 불교의 눈으로는 (무량한 은혜를) ‘이미 다 받았다. 주는 일만 남았다’가 된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연기(緣起)·중도(中道)’, 곧 ‘법(法)’이며, ‘정법(正法)’이라고 말씀하셨다. 세간의 철리(哲理)이며, 천리(天理)이고, 누구나 사무쳐 꿰뚫어 알아야 할 철리(徹理)다.
위 두 가지를 정리해보면 인간과 세계[우주]의 참모습과 원리는 ‘주고·받음[授受]’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주고·받음[授受]’, 과연 무엇을 주고받느냐? ‘모든 걸 다 주고받는다!’다.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서로 끊임없이 ‘주고·받음[授受]’에서 모두의 삶은 동시에 그리고 거대하게 이루어져 간다. 동업중생(同業衆生)의 개공성불도(皆共成佛道)가 삶의 목표가 된 이유다. 혼자 성불은 진정한 성불이 아니라는 거다.
불자(佛子)에게는 이 ‘주고·받음[授受]’이 신앙이고, 주는 게 소원성취, 주는 게 건강, 주는 게 명예, 주는 게 체통, 주는 게 참된 인간, 주는 게 영웅이고, 주는 게 보살성인이며, 나아가 성인 중의 성인[聖中聖]이다. 불자가 일생동안 지녀야 할 삶의 화두는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줄까?’가 된다. 그게 인간의 가치이고 삶의 성공이다.
이 엄연한 사실[授·受]은 크게 보거나 작게 보거나, 얼핏 보거나 자세히 보거나, 젊은 사람이 보거나 노년이 보거나 언제 누가 어떻게 보더라도 보는 만큼이고 사실 그대로다. 도무지 변함이 없어 지극히 공평하기에 천고만고의 진리다. 세간이던 출세간이라고 뽐내던 ‘주고·받음[授受]’의 공평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 흙과 바위 물과 공기서부터 초목과 준동함령(蠢動含靈), 미물곤충과 금수축생(禽獸畜生), 내지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일체 만유(萬有)가 상호 ‘주고·받음[授受]’으로 촘촘하게 이루어져 있다. 일물(一物)도 비켜갈 수 없다.
이 ‘주고·받음[授受]’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불교의 신앙이고 선(禪)이고, 해결해야 할 화두(話頭)다. 선이나 염불(念佛), 교학(敎學)을 깊이 이해하고 내지 체험한다는 것은 결국 ‘주고·받음[授受]’에 대해서다. ‘주고·받음[授受]’에 대해서 생각의 힘이 커진다는 것이고, 그 실상을 체험, 일상에 실현한다는 것이다.
3. ‘주고·받음[授受]’의 줌[授]은 존재[福]고, 존재의 의의다
복은 반드시 규칙이 있고 순서가 있다는 걸 말했다. 먼저 (복을) 주어야[授福:作福] 다시 (복을) 받는다[受福:享福]는 사실이다. 이 세상[인간과 세계]의 구조가 ‘주고·받음[授受]’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은 복을 ‘주고·받음’이다. 주는 쪽은 복을 짓는 일이고[作福], 받는 쪽은 복을 받는 일이다[享福]. 남에게 물건을 주거나 돈을 주면 받는 입장에선 복이 된다. 입장이 바뀌어 준 사람이 다시 돌려받아도, 복을 받는 것이다. 이런 ‘주고·받음[授受]’의 복은 생명운동이고, 정체되지 않고 활발발한 공기의 순환이며 흐르는 물이다[上福若水]. 복은 살아 움직이고, 빛처럼 무진장 퍼져나가는 파장이다. 그러므로 운동하지 않고 순환되지 않는 복은 없다.
인간은 부모로부터 태어나 가족과 친지, 지인과 사회구성원들로 확장되어 뻗어나간다. 이 ‘주고·받음[授受]’의 규준(規準)을 들고서다. 인간에 대한 교육이고 사회화의 과업수행(課業遂行)이다. 결국 ‘주고·받음[授受]’의 원활함과 능숙함을 몸에 익혀 나가는 것이다. 이점을 분명히 알아서 누구나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주고·받음[授受]’을 실현해 살아가야 함에도, 정작 ‘주고·받음[授受]’을 모른 채, 마냥 머리를 들이밀고 내닫는 멧돼지처럼 무턱대고 살아가고 있다.
보통사람도 인생을 살면서, 출세하고 부모 모시고 자식 키우고 좋은 평판 받고 부(富)를 쌓고 이름을 내고 진급을 하고 사람노릇 하는 데는 그만한 복이 있어야 한다. 부자는 말할 나위조차 없다. 따라서 보통사람에게나 부자에게나 삶은 곧 복이고, 복에 의해 그 자리가 정해진다. 따라서 일체 존재는 ‘주고·받음[授受]’, 한마디로 주는 것이고 ‘줌[授]’이다. 복은 남에게 주어야 받는 것, 베풀어야 얻는 불문율이다. 또한 복을 온 곳으로 되 돌려보낼 줄 아는 사람이 복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이고, 다시 복을 짓는 현명한 사람이다. 복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지랑이 같은 행운이 아니고, 분명한 오늘의 현실이고 눈앞의 일로서 직하(直下)의 삶이다. 밝은 눈[眼目]이다.
그러니까 베풀어야 부자가 되고 베풀어야 출세하고 베풀어야 진급하고 뜻이 이루어진다. 이 세상 그 어떤 일도 베풀지 않고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따라서 ‘성공하고 싶으면 베풀어라!’가 된다. 이런 사실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잘 알고 제 때에 실천하는 눈 밝은 사람들이 있다. 바로 미국의 이름난 부자들, 록펠러나 철강왕 카네기,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다. 그들은 ‘주고·받음[授受]’의 철리를 잘 안다. 나라가 어려우면 자신들에게 세금을 더 받으라고 집단으로 성명서를 낼 정도다. 어쩌면 그들은 부처님을 몰라도 부처님 가르침을 너무나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베푸는 그들은 점점 더 몸과 마음이 기쁘고 건강하여 생명력 넘치게 살아갈 것이다.
저, 세간살이뿐만 아니다. 출세간살이도 마찬가지다. 출가자가 갖추어야 할 일체 위의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부단히 헌공을 통해 작복(作福)해야 한다. 삶 자체가 복이고, 도(道)를 이루고 불사(佛事:衆生濟度)를 이룸에는 특히 복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출가자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돈이 있으면 온 곳으로 돌려보내는 일, 부지런히 베풀어서 복을 지어야 한다.
따라서 모든 불교도(佛敎徒)는 헌공으로 복 짓는 수행을 때마다 곳마다 빠짐없이 부지런히 해야 한다. 작복은 ‘출가·재가’의 구분이 없는 기본수행이고 신앙생활의 핵심이다. 물론 ‘주고·받음[授受]’으로 서다. 복은 세간과 출세간에 두루 통하는 종횡무진의 햇빛임에랴.
4. 복(福:‘주고[授]·받음[受]’)을 가로막는 세 가지
‘주고·받음[授受]’이라는 천고만고의 진리, 그 거울[法鏡]에 비쳐진 내 인생을 살펴보자. 어디에서 일이 막혔고, 어디에서 일이 풀렸는지를 먼저 살펴보자. 더욱 ‘주고·받음[授受]’의 진실모습, 복의 정체가 청천백일하에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먼저, 자신의 소원이 어디에서 막혔는지? 왜, 일이 잘되어 가다가 어긋났는지를 살펴보자. 거기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비록, 자신이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부지런히 일했다고 해도, 남에게 주지 않고 사람들에게 베풀지 않아서 일이 막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는 베풀었다고 해도 그 베풂이 부족해서 확 열리지 않았고, 뻥 뚫리지 않았을 것이다. 복력(福力)이 부족했던 것이다. 일의 장애는 ‘주고·받음[授受]’을 소홀히 하거나 실현하지 못해서 생긴다. 정신질환, 물질의 궁핍이나 인간관계의 불화와 불편을 초래한다.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본다.
첫째, 탐욕(貪欲), 자신의 욕심이다. 우주와 인간세상의 법칙이 ‘주고[授]·받음[受]’임을 앞에서 말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주는 것은 싫어하고 받는 것만 좋아한다. ‘주고·받음[授受]’의 원칙에 크게 어긋난다. 아상(我相)의 작동, 욕심 때문이다.
인간의 욕심이 ‘줌[授]’을 가로막아 받기만 하려고 한다. 이 지구상의 삼라만상을 통틀어 욕심에 사로잡혀 ‘주고·받음[授受]’의 진리를 등진 생명체는 인간뿐일지도 모른다. 유일하게 인간만이 ‘주고·받음[授受]’의 진리를 제멋대로 자기위주로 조작하려 한다. 결국 욕심 때문에 서로 다투고 싸우며 원수가 되고 칼바람을 일으킨다.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서고, 자기가 더 갖기 위해서다. ‘줌[授]’과는 철저하게 반대다. 이런 어리석은 욕심의 끝은 고통을 불러오고 병을 얻으며 명예를 잃고 부모형제와도 척을 지는 외로운 신세가 되고 끝내 허무와 죽음에 이르고 만다.
인간욕심은 허무와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인간의 고통과 실패와 병은 모두 욕심 때문에 생기고, 이 욕심 때문에 생로병사의 수레바퀴에 깔려서 허덕거린다. ‘줌[授]’이 이세상의 준엄한 법칙인데, 욕심에 사로잡혀 ‘줌[授]’의 우주천연질서와 인간의 본분을 어겨서다. 고통스러운 삶을 자초했다.
복(福)은 ‘줌[授]’인데도 가로막는 장애물은 자신의 탐욕이고, 주기 싫어하는 인색한 마음이다. 욕심은 받기만 하려고 하는 거친 마음이다. ‘주고·받음[授受]’의 법칙 속에서 주지 않고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이다.
‘주고[授]·받음[受]’의 진리는 공평하다. 인간에게도 만상(萬象)에게도―. 그럼에도 주지 않고 받기만 하려는 인간의 욕심은 공평함을 잃어 지구에 재앙을 불러온다. 인간이 마구 욕심을 부려 지구의 질서가 무너진 것이다. 인간과 우주의 법칙을 거스르는 ‘주고[授]·받음[受]’의 위배를 경각심을 가지고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때가 되었다.
둘째, 진에(瞋恚), 자신의 화내는 마음이다. 평소 친구에게 온갖 대접을 하고 수시로 선물을 주고 두터운 우정을 나눠 친구복(親舊福)이 생겼다고 해도, 어느 날 한번 느닷없이 화를 내면 평소에 쌓은 친구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마른 나뭇잎이 불에 타듯이 친구복도 화의 불길에 일시에 다 타버린다.
셋째, 우치(愚癡), 자신의 어리석은 마음이다. 어리석은 마음은 복으로 더 큰 복을 짓는 법을 모르고, 인생에 가장 귀한 돈의 가치를 모른다. 알다시피, ‘돈’은 돌고 돈다는 뜻이고, 그건 곧 ‘주고·받음[授受]’이다. 따라서 돈은 돌아야 한다. 마치 사람 몸의 피와도 같다. 돌지 않으면 썩고 마침내 죽는다. 그러나 피[돈]가 돌아야 한다고 거꾸로 돌면 안 된다. 피가 거꾸로 돌면 또한 죽는다. 마찬가지로 돈이 돌아야 한다고 아무데나 돌리면 큰 일 난다. 패가망신하게 되고 결국 나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한다.
돈을 한갓 술꾼에게 주어도 돌긴 하되 더욱 폐인이 되고, 돈을 노름꾼에게 주면 돌긴 하되 결국 패가하고 만다. 일도 않고 먹고 노는 한량에게 주면 죽을 때까지 남의 신세만 끼치는 안타까운 인생이 되고 만다. 복 짓는 일에 이 어리석음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도 같다. (참고로 돈의 가치를 본다.)
※돈의 정체, 세상의 모든 가치는 돈으로 통합되어간다.
대개의 사람들은 돈을 모르거나 오해하거나 일정부문만 안다. 따라서 돈을 제대로 대접할 줄도 모른다. 돈은 점잖고 의젓하고 초월적이다. 해서, 돈은 군자이고 신사이며 보살이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위세를 과시하거나 함부로 까불지 않는다. 설령, 부당한 대접을 받아도 묵묵히 참고 과한 대접을 받아도 섣불리 들뜨거나 내색하지 않는다. 다만, 그 돈을 쓰는 사람이 문제일 뿐이고, 누가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서 돈은 묵묵하게 그 용도를 다할 뿐이다.
특히, 자본주의가 발달한 오늘날 돈은 더더욱 사람이다. 사람은 많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 특성을 모두 돈으로 치환한다. 돈을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사람이 가진 복과 인격, 거기에 재능과 노력, 시간과 자본을 투자하여 사람의 가치를 형성하고, 하나의 가치수단인 돈으로 통일한다. 돈은 사람이 지닌 모든 가치를 종합하여 하나로 치환한 매개체다. 그러므로 베푸는 일, 보시는 더욱 중요한 일이 됐고 가장 고귀한 일이 되고 있다. 돈은 인격이다.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사회를 건강하게도 하고 병들게도 해서다.
다음으로 자신의 소원이 어디에서 뚫렸는지? 어떻게 소원이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자.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몰래 돕듯이 일이 잘 된 것을 살펴보자. 거기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바로 남에게 베풂, 보시(布施)를 했기 때문이다. 베푼 보시의 힘에 일의 장애가 확 뚫렸던 것이다. 남에게 베푼다는 것을 선행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실재로는 선행이 아니다. 스스로의 복(福:善行)을 짓는 일이고, 자신의 복을 창고에 저장하는 일이다. 일이 잘 되는 것은 그걸 돌려받은 것이며 그걸 꺼내 쓰는 것에 불과하다.
5. 사람들이 즐겨 쓰는 두 단어
현대인들이 즐겨 쓰는 두 말이 있다. ‘행복’과 ‘스트레스’다. 먼저, ‘행복’이다. 행복은 뜻밖[意外]에 얻는 복[幸福]을 말하기도 한다. 정당한 노력의 대가가 아닌 것일 수도 있다. 또는 ‘줌[授]’ 없이 받기만을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저러나 복은 바름[正]에서 온다. 분명한 사실은 사람은 누구나 바름을 좋아한다. 그 이유는 본성(本性)이 바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름은 무엇인가? ‘주고·받음[授受]’이고, 곧 ‘줌[授]’이며 복(福)이다. 복은 ‘줌[授]’에서 생긴다. 따라서 복을 받으려거든[享福] 먼저 복을 지어야[作福] 한다. 끊임없이 주어야 하고 베풀어야 한다. 정상적인 인간관계나 부의 축적, 지위의 향상은 복을 지었을 때 가능하다. 복의 정체(正體)다.
그러나 복을 짓지 않고 받으려고만 하는 데서 정신적인 장애인 스트레스가 생긴다. 일상에서 ‘스트레스’라는 말을 자주 입에 올리는 것은 베풀지 않고 받으려고만 하는 자기불만에 기인한다. 그럼에도 오늘날 현대인이 입에 달고 사는 ‘스트레스’라는 말에 대해, 자신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다. 남이 쓰니까 무턱대고 따라서 쓸 뿐이다. 바름을 상실한 말이다. 작금, ‘스트레스’를 아이나 어른이나 구별 없이 수시로 쓰고 가장 즐겨 쓰는 말이 됐다. 유행어는 흘러가기라도 하지만 이 말은 그럴 기미마저도 없다.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대다수의 정신질환의 병인(病因)은 ‘주고·받음[授受]’의 법칙을 어겨서다. 야박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한마디로 베풀지 않고 남을 돕지 않아서 생긴 병들이다. 우울증에 걸리기 전, 어려운 사람을 찾아가 팔을 걷어 부치고 봉사를 했다면 우울증은 감히 범접도 못했을 것이다.
현대인의 언어공해 중에서 이 두 단어가 대표적인 말이라고 할 것이다.
왜, 굳이 부처님의 복(福)인가?
1. 복의 근원이신 부처님
인류유사이래로 성인들은 많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히 부지기수다. 그렇지만 다 같은 성인은 아니다. 일별하여 이른바 사대성인(四大聖人)의 면면을 살펴보자.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봐도, 중국의 공자를 봐도, 기독교의 예수를 봐도 석가모니처럼 베풀고 베풀어서 성인이 된 분은 없다. 부처님은 심지어 자신의 목숨마저도 수없이 베풀고 베풀었기에 사람들은 성인 중에 성인[聖中聖]이라고 우러른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저 한량없는 과거세, 인행시(因行時)에서부터 엄청 베푸신 분이시다. 한갓 축생인 새끼 낳은 어미호랑이에게마저도 자신의 몸을 베풀고 베풀어서 마침내 그 복으로 깨달음을 성취한 분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만복의 근원, 무량한 지혜를 갖춘 지혜의 왕이 된 면모이시다.
인류 이래, 우리 부처님처럼 베풀고 베풀어서 성인이 되고 깨달은 분이 누가 또 있는가?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몸마저도 베푸셨기에 성불의 과(果)를 이루셨고, 만복(萬福)의 근원이 되셨다. 자신의 헌신을 통해서 얻은 인격체, 일체중생을 사랑하시는 대자대비의 인격체, 생사를 해탈한 초월의 근원적인 인격체다.
쉽게 말해, ‘줌[授]’을 철리(哲理)로, 법(法)으로 사신 분이다. 오로지 주기만 하고 사신 분이기에 결국 온 세상이 그 분의 것이 됐다. 다 내놓으면 다 자기 것이 된다고나 할까. 목숨마저 남에게 주어서 성불을 얻었기에 복의 근원이고 무량대복전(無量大福田)이다. 그런 분에게 공양할 수 있다면 가장 큰 복이 될 것임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한마디로 복이 있어야 지혜를 얻고 생사해탈을 할 수 있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부처님 당시 ‘보시의 법’으로 설해졌고, 대승불교의 육바라밀다에 와서 그 중요성과 그 위대성이 더욱 강조되고 거기에 맞는 삶의 덕목으로 ‘보시바라밀다’가 선포된다. 주고도 줬다는 생각도 없이 무조건 주는 것이다. 따라서 보시는 총체적이고 결정적인 수행이고 결정적인 인격체다.
심지어 보시는, 불교의 핵심덕목이라고 일컫는 불살생의 지계(持戒)보다 앞서 나온다. 굶주린 호랑이에게 몸을 던지는 것이 살생에 관계된 일임에도 도무지 서슴없다. 따라서 불교는 복 짓는 가르침, 보시바라밀다가 핵심인 무상(無上)의 가르침이다.
재가는 재물을 베풀고 출가는 법을 베푼다. 그러나 재물을 베풀어도 베풀었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법을 베풀어도 법을 베풀었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無住相]. 이것이 ‘보시바라밀다’이고 또한 ‘반야바라밀다’이다. 재물이 곧 법이 되고, 법이 곧 재물이 되어 무한자유를 얻는다. 둘 다 해탈이 되고 무량대복전이다.
이런 점에서 최고의 삶[福源]을 사신 분은 부처님이시다. ‘주고·받음[授受]’의 진리를 고스란히 드러낸 분이시고, 인간 삶에 무엇이 핵심인가를 몸소 나타내 보이셨다. 불교의 온갖 수행도 알고 보면 ‘주고·받음[授受]’의 능력을 극대화 시키는 일이다. 다른 건 치장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2. ‘보시바라밀다’는 마음의 문을 여는 것
부처님께 공양올리면 부처님께 다가가는 일이고, 부처님을 향해서 내 마음의 문을 여는 일이다. 비로소 무량대복전(無量大福田)인 부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 보시자가 무량대복전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다.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은 항상 실험적이다. 그 누구도 앞을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오직 바르게[正] 산다. ‘주고·받음[授受]’의 실현이다. 이것만이 자기를 구제하고 남을 구제한다. ‘연기(緣起)·중도(中道)’의 진리다. 물질의 세계도 실험적이다. 변하고 운동하기 때문이다. 부득이 가상(假像)을 설정하고 실험을 통해 사실로 다가가서 확인한다. 이른바 과학이다.
불교는 관찰이다. 변함과 실체 없음의 ‘무상(無常)·무아(無我)’를 관찰하는 것이다. 결국, 공을 관찰하는 공관(空觀)이다. 공관의 진리가 삶의 대명제이므로 과학을 능가하고 과학을 이끈다. 사람의 마음이 이 세계를 지었음[一切唯心造]이다. 그렇다, 일체유심조다. 성취나 성공도 보시를 통한 마음의 원만으로부터다.
일의 성사(成事)에 앞서 마음의 구김이나 부족이 없도록 때마다 베푼다. 무릎 꿇고 올리는 기도에 앞선다. 따라서 보시인 공관의 진리가 종내 인간정신과 과학정신을 이끌어 간다. 참으로 탁월한 가르침으로 시공을 초월하는 만유(萬有)의 실재(實在)다.
‘사월초파일·부처님오신날’, 중생에게 복 짓게 하려고 오셨다
1. 우리 부처님께서는 인간에게 복을 짓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복이 무엇인가를 몸소 보여주시고, 복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어떻게 해야 그 복을 지을 수 있고, 받을 수 있는가를 깨닫게 하려고 몸소 오신 것이다. 그러니까 뭇 중생들을 복 받는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주고[授]·받음[受]’, 상의상관(相依相關)인 인간의 본성과 우주만유의 질서를 깨닫게 하려고 인간세계에 오셨던 것이다.
우리 부처님께서 남들이 꿈에도 가지 못해 안달하고 몸부림치는 그 좋은 하늘나라[도솔천]를 떠나서, 고통 많은 이 사바세계에 짐짓 오신 까닭은 중생들로서는 알 수 없는 심정이다. 인간자신이 지은 자기욕심에 짓눌려 고통에 허덕이는 인류를 구제하려고 하늘나라를 떠나셨던 것이다. 대자대비가 부처님 별명이 된 연유이다.
한마디로 복을 짓게 하려고 오신 것이고, 더 직접적으로는 돈을 잘 쓰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 인간자신이 지닌 참된 가치를 잘 쓰도록 인도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게 생사해탈이라는 거다.
불자들이 늘 다짐하는 삼귀의 중에 첫 번째가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이다. 곧 ‘지혜와 복덕’을 원만구족한 부처님이시다. 부처님의 두 발에 귀의한다는 뜻인데, 여기서 두 발은 ‘지혜와 복덕’을 말한다. 따라서 불교도(佛敎徒)가 갖추어야 할 건 지혜는 말할 것도 없고 복덕을 갖춰야 한다. 아니, 복덕이 곧 지혜이고, 지혜가 곧 복덕이다. 가정을 유지하거나 불사를 짓거나 개인적으로 공부를 해도, 인생은 누구나 ‘지혜와 복덕’이 구비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부처님께서는 오셨다.
부처님의 ‘지혜와 복덕’의 자비를 입고서야 비로소 사람의 뜻이 성취될 수 있고, 그 뜻이 순조로울 수가 있고, 남에게 더 큰 이익을 줄 수도 있다. 참모습을 되찾는다고 말한다. 거기엔, 재복(財福)도 있고, 법인연(法因緣)도 있다. 또한 재공양(財供養)이 법공양(法供養)임도 알게 된다. 모두 무아행(無我行)이다.
부처님께 공양하면 이 세상이 그대로 진리세상이 된다. 스스로 마음 문을 여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부대중이나 전 국민, 나아가 인류가 법회 때 참회를 하고 다짐을 하며 절을 하고 공양금을 헌공하는 건 부처님을 향하여 마음 문을 여는 일이고, 진리세상을 만드는 무량대복을 짓는 일이고, 무량대복전의 주인이 되는 일이다. 공양과 베풂의 보시는 인간을 깨달음에 들게 하는 복덕구족이기에 인류의 희망인 ‘세계평화·인류행복’의 불국토를 성취한다.
2. 여태껏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던 일
우리는 안다. 조금이라도 남에게 베풀어 본 사람은 안다. 신앙생활을 통해 베풀어본 사람은 체험적으로 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변함이 없다. 남에게 베풀거나, 불사에 보시하면 그 이상의 돈이 들어온다는 사실을―. 또는 어딘가에서 돈이 들어와 그만큼, 내지 그 이상 채워진다는 사실을 잘 안다. 나갈 돈이 안 나가거나 저절로 줄이게 되어 채워진다는 것도 안다.
불사를 받드는 일이 공덕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사공덕은 일상(日常)의 일이 잘 되고 소원이 성취되는 근원적인 힘이 된다. 이러한 공덕을 짓는 일은 때가 있다. 시절인연이 성숙해야 한다. 마치 봄이 왔음을 알면 때에 맞춰 씨앗을 뿌려야 하는 것과도 같다. 이 때를 놓치거나 다른 일에 양보하거나 빼앗기면 공덕을 지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다른 것은 양보해도 공덕 짓는 일은 양보하지 않는다. 씨앗을 뿌리는 일을 미루지 않는 것과도 같다.
또한 가난하다고 보시하지 않으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어렵다고 주저앉으면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 ‘주고·받음[授受]’의 존재가 갖는 법칙을 어기기 때문이다. 기어이 실현해야 한다. 사람이 어려울 때 일어설 용기가 필요하고, 가난할 때 보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주고·받음[授受]’을 실현하는 진정한 용기이고 자신의 참모습이며 참된 삶이다. 만고의 명감(銘感)을 본다.
‘부처님 당시, 사왓띠의 난다 여인이 올린 빈자일등(貧者一燈)의 용기와 서원을 이제 다시 본다. 사왓띠에 난다라는 가난한 여인이 살고 있었다. 난다 여인은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이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밥을 빌어 겨우 목숨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사위성 안이 떠들썩한 것을 보고 난다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까닭을 물었다.
“부처님께서 이 성으로 오신답니다. 오늘 밤에는 왕과 백성들이 수만 개의 등불을 밝혀 연등회를 베풀고 부처님을 맞이한답니다.”
난다 여인도 등불을 켜 부처님께 공양하고 싶었으나,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여인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동전 두 닢을 빌어서 기름집으로 갔다. 기름을 어디에 쓰려느냐고 주인이 물었다.
“이 세상에서 부처님을 만나 뵙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제 부처님을 뵙게 되니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등불이라도 하나 밝혀 부처님께 공양할까 합니다.”
난다 여인은 부처님이 지나가실 길목에 등불을 밝히고 빌었다.
“부처님, 저는 가난해서 아무것도 공양할 것이 없습니다. 보잘 것 없는 등불 하나를 밝히오니, 이 공덕으로 저도 오는 세상에 부처를 성취하여지이다.”
밤이 깊어 다른 등불은 다 꺼졌으나 이 여인의 등불만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등불이 다 꺼지기 전에는 부처님이 주무시지 않을 것이므로 제자 아난다가 가사 자락과 손으로 끄려하였으나 꺼지지 않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야, 부질없이 애쓰지 말아라. 그것은 가난하지만 마음 착한 여인의 넓고 큰 서원과 정성으로 켠 등불이니 결코 꺼지지 않으리라. 그 등불의 공덕으로 이 여인은 오는 세상에 부처가 되리라.”
저 가난한 사왓티의 여인에 비하여, 오늘 우리는 굉장히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3. 불사(佛事)는 원력(願力)으로 하는 일
첫째, 불사는 원력이 있어야 한다. 불사는 자기를 구제하고 가족을 구제하고 사회와 나라를 구제하고 일체중생을 구제해서다. 그런 대단한 불사라도 먼저, 자신의 건강이 좋아야 하고, 불사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주머니에 돈도 있어야 한다. 이처럼 여러 가지를 갖춰야 불사공덕을 짓는다. 불사는 때를 얻어야 하고 준비가 돼야 한다는 말이다. 묘기(妙機)와 묘연(妙緣)의 기연(機緣)이다. 원력이 없으면 이런 여러 가지가 갖춰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둘째, 불사는 지혜로워야 한다. 사람이 아무리 복으로 산다고 해도 세상의 모든 복을 다 지을 수는 없다. 가진 재산도 재산이려니와 이 세상 곳곳마다 일일이 뛰어다니면서 선행을 이루기는 도무지 어렵다. 그러므로 복의 핵심이 되는 불사공덕을 성취하면 되고, 불사 중의 불사인 ‘각불사(覺佛事)’를 받들면 된다. 남에게 주고도 줬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 무주상(無住相)의 보시행(布施行)이다. 바로 부처님 크신 원력에 동참하여 복을 짓는 일이다.
원력과 지혜와 복덕의 불사는 사람들을 절로 인도하는 전법으로부터 절 안의 신앙대상을 모시거나 거기에 따른 시설건축 등등이다. 의례, 사람들은 절에 오면 부처님을 생각하고 법을 생각하고 스님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대웅전도 짓고, 금강경환생대탑도 짓는다. 부처님과 관계된 일을 두루 한다. 불사공덕으로 지상과업(至上課業)인 ‘중생성숙과 국토성취’를 원만 한다. 부처님의 뜻을 받드는 일에 원력과 지혜와 복덕이 있어야 한다.
‘사월초파일·부처님오신날’은 전 국민이 복 짓는 날이고, 전 국민이 복 짓는 운동을 다짐하는 날이다
1. ‘사월초파일·부처님오신날’은 전 국민이 복 짓는 날
‘사월초파일·부처님오신날’은 전 국민이 복 짓는 날이고, 전 국민이 복 짓는 운동을 벌이고 다짐하는 날이다. ‘사월초파일·부처님오신날’은 전법(傳法)의 날이고 전법을 다짐하는 등공양[傳燈] 날이기 때문이다.
먼저, 누구에게 복을 짓게 하고 전법을 다짐하게 할까? 가족부터다. 아이에서부터 노년의 부모에 이르기까지 다 같이 등공양으로 전법을 다짐하여 복을 짓는다. 나아가 가까운 이웃과 친지와 지인들에게 등공양으로 복을 짓도록 적극 인도한다.
‘사월초파일·부처님오신날’은 절에 등공양 올리는 날이라는 걸 온 국민이 다 안다. 말하자면 묵시적으로 공인된 전법의 날이다. 따라서 온 나라가 복 짓는 운동을 펼치는 날이 되어야 한다. 이런 ‘사월초파일·부처님오신날’, 바야흐로 이때를 맞이하여 불자들은 거국적으로 복 짓기 운동을 열렬하게 펼쳐나가야 한다.
각 절마다 또 이곳 안성 도피안사로 친구들의 손을 잡고 복 지으러 몰려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전 국민이 자발적으로 찾아오도록 만들자. 때는 바야흐로 호시절 만화방창이다. 곧 산수유가 피어나고 개나리와 진달래 철쭉들이 피어나고 산벚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 온 산에 지천이 될 것이다. 또한 모란동산에는 꽃 중의 꽃인 모란이 온 힘을 기울여 피어나, 복 짓기 운동을 벌이는 우리 불자들에게 기쁨을 더할 것이고, 환영할 것이다.
온갖 꽃들이 겨우내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봄단장으로 그렇게 나타낼 것이다. 마치 복 짓는 운동을 벌이는 불자들을 맞이하는 뜻을 전하는 것처럼 바람을 따라 하늘하늘 손짓할 것이다. 그러나 바깥 경계뿐이랴, 복 짓는 자기 안의 불가사의 경계와 가관(可觀)의 무한열락은 또 어쩌고?
2. 등공양은 무량대복전(無量大福田)의 주인이 된다
등공양은 자신의 닫힌 마음 문을 여는 일이고 또한 복 짓는 일이다. 등공양은 나와 가족이 부처님과 똑 같아지는 걸 말하고, 무량대복의 주인공이 됨을 말한다. 이처럼 고귀한 등공양을 가장 적극적으로 행하신 분이 이곳 개산조이신 광덕대선사이시다. 대선사께서는 심지어 서울의 수많은 동네 이름도 법등(法燈), 곧 잠실법등, 송파법등 등으로 바꿔놓았다. 등불을 전하는 전등(傳燈)은 복을 전하는 것이고, 법을 전하는 전법(傳法)은 복을 함께 쓰는 일이다. 최고의 복 나눔, 최고의 법 나눔이 전법이고 전등이다. 등불 밝히는[點燈] 일이고 등불[明燈] 올리는 일이다.
‘사월초파일·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이웃이나 친지들에게 “등공양 올리고 복 받으세요”라고 말해야 한다. 누구에게든지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등공양금을 ‘등 값’으로 둔갑시켜서는 안 된다. 누가, “등 값, 얼마에요?” 묻는다면 등을 파는 가게 주인에게 등 값으로 돈을 주는 것과 같다. 그런 결례를 해선 안 된다. 반드시 ‘등공양금’이라고 말한다.
그럴 때, 불자들은, “부처님께 올리는 등공양금은 정해지지 않았어요. 등공양 발원자가 정성껏 내면 됩니다!”라고 답한다. 그래도 재차 물을 경우, “대개 신도들이 올리는 공양의 기준은 얼마 정도로 하는 가 봅니다”하고 공손히 답한다. 신앙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맛 나는 음식을 아름다운 그릇에 담듯이―.
복의 근원이신 부처님을 바르게 믿으면 부자가 된다. 불교를 잘 믿어 금생에 부자가 됐는데도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오늘의 부자들도 많다. 자식이 부모를 모실 때 좋아하시는 걸 드리듯이 부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드린다. 지혜의 등, 복덕의 등을 부처님께 올린다. 이것이 사랑받는 일이고 부자 되는 길이다.
등공양의 등불[燈明]은 복이다. 능히 어두운 곳을 밝혀주는 공능(功能)을 지녀서다. 지혜로 미혹에 빠진 중생을 깨어나게 하는 것과 같다. 등불은 복이고 지혜이며, 등등상속(燈燈相續)은 연기이고 중도이며, 등등무수(燈燈無殊)는 백 천 등의 근본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등공양을 올린 등명불자(燈明佛子)는 어디에도 걸림 없이 마음 가는대로 맡겨두는 등등임운(騰騰任運)의 경지, 임성소요(任性逍遙)다. 무공용(無功用) 무조작(無造作)의 경지를 노닌다. 굳이 애쓰지 않고 일부러 짓지 않는다. 등명불자는 참으로 무량대복전(無量大福田)의 자유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