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성(茶聖) 불리는 초의(1786~1866) 선사의 제다법이 ‘구증구포(九蒸九曝), 즉 아홉 번 쩌서 아홉 번 말리는’ 방식이었다는 주장이 최석환 월간 <차의 세계> 발행인에 의해 제기되면서 다계(茶界)에 논란이 일고 있다.
구증구포는 제다법에 해당되는 용어가 아니라 떡차(병차)를 만드는 방법이라거나 다만 제다를 할 때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 온 것이 다계의 정설이어서 최 발행인의 주장에 반론이 제기될 전망이다.
최 발행인(한국국제선차문화연구회장)은 지난 6월 6일 순천 송광사에서 ‘다맥의 재발견’이란 주제로 열린 학술세미나에서 “초의 스님이 구증구포로 제다했으며, 다맥이 대흥사뿐만 아니라 송광사로 이어졌다”고 주장해 논란의 불씨를 지폈다.
최 발행인은 ‘연해적전의 생애를 통해 본 선차문화의 재발견’이란 주제의 ‘논문’에서 연해적전(蓮海寂田, 1889~?) 스님의 삶과 행적을 조명하면서 이같이 주장을 펼쳤다. 그는 특히 지난해 대구 관음사 조실 원명(86) 스님과의 인터뷰에서 “연해적전 스님이 송광사에 주석하면서 송광사 다풍을 이어왔다”는 증언을 토대로 ‘초의의순→범해각안→금명보정→연해적전’으로 이어진 초의 스님의 또 다른 다맥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어 “응송 스님 중심으로 논의돼 온 초의 다맥이 대흥사와 송광사가 양대 산맥으로 흘러갔던 사실이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최 발행인은 이 논문에서 “1889년 4월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연해 스님은 33세 때 송광사 담허품준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1927년 4월 초의 스님 제자인 금명보정 스님으로부터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특히 43세 때인 1931년 송광사 삼일선원 원주를 맡으면서 금명보정 스님으로부터 제다맥을 이었고 스스로 제다법을 터득해나갔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최 발행인의 주장 가운데 특히 논란을 빚은 것은 ‘구증구포 제다법’ 부분이다. 특히 연해 스님이 구증구포 방식으로 제다했으며, 당시 대흥사, 화엄사, 보림사 등 사찰에서 행해지던 방식이라며 결론적으로 초의 선사의 제다법도 구증구포 방식이었다는 점을 거론했다. 그는 구증구포 제다방법이 산사를 중심으로 은밀히 전해졌으며 1929~1945년 사이 송광사에 주석하면서 다송자 금명보정 스님의 다맥을 이은 연해적전 스님을 통해 입증됐다고 주장했다.
최 발행인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소장이 반론을 제기했다. 박 소장은 “구증구포가 차를 만드는 방법이라는 인식이 큰 문제”라며 “제다를 할 때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상징적 의미”라고 강조했다. 박 소장은 “차를 아홉 번 찌고 말린다면 차맛의 고유성을 다 잃게 된다”고 지적했다.
최 발행인은 구증구포 외에도 이날 연해 스님의 음다법이 지금처럼 찻잎을 달여 마시는 전다(煎茶)법이 아닌 마른 찻잎을 끓여 마시는 점다(點茶)를 활용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도 박동춘 소장은 “용어 정의의 오류”라고 일축했다.
다음은 박동춘 소장의 반론 기고문 전문이다.
연해적전의 구증구포는 초의선사의 제다법이 아니다
지난 6월 6일 송광사에서는 “송광사 다맥의 재발견”이라는 학술 세미나를 주관하였다. 여기에서 발표된 2편의 논문은 대부분 학계에 알려진 바와 같다. 하지만 이날 발표된 4편의 논문 중에 논란의 소지를 제공한 것은 <<차의 세계>> 최석환 사장의 논문이다. 그는 <연해적전(蓮海寂田)의 생애를 통해 본 조선후기 선차문화의 재발견>이란 제하의 글에서 연해적전은 금명보정의 제자로 초의선사의 다맥을 이었다고 주장하는 한편 구증구포가 초의선사의 제다법이며 이 제다법이 대흥사, 보림사, 백양사, 송광사 등에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 논문의 모두(冒頭)에서 “현재 쌍계사에서 행해지는 다맥전수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도 지적하였다. 실제 쌍계사에서 행해지는 다맥전수는 명분상의 전수일 뿐 실체(제다법, 탕법)가 없기 때문에 논의의 대상은 아니다. 이 문제는 다분히 쌍계사의 문제일 뿐이다.
초의의순-범해각안- 원응계정으로 이어진 대흥사의 다풍을 이은 응송은 근. 현대 변혁기에 대흥사에서 출가하여 초의선사의 다풍을 현재로 이어준 인물로 평가한다. 그의 공적은 1980년 5월, 문화재관라국 문화재연구소에서 발행한 <<전통다도풍속조사>>에서 “(응송) 스님은 대흥사 주지와 방장 등을 역임하면서 대흥사에서 살아온 대흥사의 산 역사로 130여 년 전 초의가 이곳에 남겨 논 다풍을 그대로 간직해 온 스님이다” “오늘날 우리가 초의를 이야기하고 우리 차의 전통을 이야기하게 된 것도 거의 이 응송노장의 공로다”라고 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실제 응송은 불교정화이후 초의의 <<동다송>>, <<다신전>>을 수습하였고 초의와 경화사족들의 교유사를 밝힐 수 있는 묵적을 모아 연구하였다. 이뿐 아니라 초의선사가 전해 준 대흥사의 제다법을 연구하고 규명하는데 심혈을 기우렸다. 따라서 그의 이런 노력은 초의선사의 다법을 이어지게 한 힘이요,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 보존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라는 점에서 응송의 공은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하겠다.
이미 최 사장의 논문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초의선사의 다풍이 대흥사와 송광사로 이어졌음을 이미 학계에 밝혀진 바이므로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따라서 초의의 법계와 다풍이 범해각안-금명보정으로 이어진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최 사장은 송광사 박물관장 고경스님의 <연해국신(蓮海國臣) 약보(略譜)>를 인용하여 청허 이후의 법계를 차와 연결하여 그 의미를 광의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다.
다시 말해 고경 스님의 <연해국신(蓮海國臣) 약보(略譜)>에는 청허(淸虛) - 부휴(浮休) - 벽암(碧岩) - 취미(翠微) - 백암(栢庵) - 무용(無用) - 영해(影海) - 풍암(楓岩) - 묵암(黙庵)-제운해징(霽雲海澄) - 보광정선(葆光晶宣) - 원응계홍(圓應戒洪) - 백봉필한(白峯必閑) - 서룡혜감(瑞龍惠坎) - 혼허품준(渾虛品俊) - 연해국신(蓮海國臣)으로 법계가 이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초의의 법계는 청허휴정(淸虛休靜) - 편양언기(鞭羊彦機) - 풍담의심(楓潭義諶) - 월담설제(月潭雪霽) - 환성지안(喚惺志安) - 호암체정(虎巖體淨) - 연담유일(蓮潭有一) - 완호윤우(玩虎尹佑)-초의의순-범해각안-원응계정-응송영희로 이어진다. 이 자료에 의거해 본다면 연신은 부휴의 법계이고 초의는 편양의 법계를 이었다. 따라서 초의와 연신의 법계는 다르다.
그런대도 이런 법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차까지 연결한 점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물론 초의에게 대승계를 받은 범해가 초의의 다풍을 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범해가 금명에게 계를 내린 것도 분명한 상황이다. 연신이 금명에게 계를 받았다면 초의와 연결할 수 있는 고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나 초의와 연해를 연결할 법맥의 고리를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이런 상황인데도 최 사장의 논문에서 연해가 구증구포로 차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대구 관음사 조실 원명스님의 증언을 토대로 초의- 범해-금명으로 이어진 제다법이 구증구포라고 주장한 것인데 실제 이는 오류가 심하고, 논의 확대가 자의적이기에 논증을 거친 논문인지가 의심된다. 필자가 원명스님의 증언에 대한 진위 문제를 가늠할 일은 아니다. 물론 잡지에 그의 증언을 단순 취재로 쓴 글이라면 그 진위를 가릴 필요가 없다.
그러나 본 논문은 송광사에서 주관한 공식 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이라는 점에서 그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실제 그의 증언을 토대로 연해적전이 초의의순-범해각안-금명보정의 다풍을 이었다고 한다면 구증구포로 차를 만들었다는 원명스님의 증언은 학계에 밝혀진 사실과는 다르기 때문에 이 문제를 잘 규명하여 논문을 개진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의가 구증구포로 자를 만들었다는 그의 논의는 오류의 정도가 심한 것이다.
초의의 다풍, 특히 제다법의 실체를 규명할 자료는 풍부하다. 우선 초의가 1830년에 편찬한 <<다신전>>과 1837년 저술한 <<동다송>>에 드러난 제다법에는 어디에도 구증구포를 언급한 바가 없다. 따라서 구증구포는 초의의 제다법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한데도 이런 오류가 나온 것이 못내 아쉽다. 바로 필자가 이 글을 쓴 연유는 여기에 있다. 이런 오류와 문제점을 지적하여 바로 잡고자함이니 개인의 글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구증구포는 언제부터 회자되었을까. 이는 몇 년 전 한양대 정민교수가 이유원의 <<임하필기>>의 <호남사종>에서 “정약용이 보림사 승려들에게 구증구포의 방법을 가르쳤다”는 내용을 발굴한 후이다. 그는 구증구포를 9번 찌고 말린다고 번역하였다. 당시 필자는 차와 관련된 문헌에서 구증구포의 제다법을 언급한 기록이 없다는 점을 들어 구증구포는 제다의 차수(次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차를 만드는 원리에 따라 덖고 말리는 것이라 번역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논쟁은 얼마 후 다산이 1830년에 이덕휘(李德輝:1759∼1828)에게 보낸 걸명시(乞茗詩)에서 삼증삼쇄를 언급한 자료가 발굴됨에 따라 잠잠해 지는 듯했다. 그러던 차제에 송광사에서 초의의 제다법이 구증구포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이미 초의의 제다법은 <<동다송>>에 언급한 바와 같이 “솥이 뜨거워지기를 기다렸다가 찻잎을 넣고 급히 덖어내는데 이때에 불을 늦춰서는 안 된다. 알맞게 덖어내어 대자리에 넣고 여러 번 가볍게 둥글리듯이 비비고 떨어서 다시 솥에 넣고 불을 점점 줄이면서 덖는”방법이었다. 초의의 제자 범해의 <초의차>에도 “깨끗한 솥에서 정성을 다해 덖어내(空鐺精炒出)/ 밀실에서 잘 말리네(密室好乾來)’라 하였으니 초의차의 제다법은 범해에 의해 더욱 상세히 드러낸 셈이다. 응송의 제다법도 이와 같다.
한편 그의 오류는 점다법에도 있다. 그는 “연해 스님의 음다법은 지금처럼 찻잎을 달여 마시는 전다(煎茶)법이 아닌 점다(點茶, 마른 찻잎을 끓여 마시는 법)법을 활용했다”라고 하는 것인데 이는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탕법이었다. 이를 점다법으로 본 듯하다. 그의 오류는 전다법과 점다법의 용어를 잘못 본 것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점다는 고려 때 유행하던 탕법이다. 단차를 맷돌에 갈아 가루 낸 후 거품을 내는 탕법으로 고려 때 유행했다. 이는 차문화의 전성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다도의 극치미를 드러낸 탕법이었다.
그가 점다법이 전다법으로 바뀐 것을 일제 압정기로 상정했는데 그렇다면 그가 말한 전다법은 다관에서 차를 침출하는 방식을 말한 듯하다. 이 또한 전다법이라 통칭된다. 따라서 그의 주장한 “점다(點茶, 마른 찻잎을 끓여 마시는 법)법”은 바로 전다법이지 점다법이 아니다. 이는 용어 정의의 오류에서 빗어진 일이다. 따라서 초의의 제다법이 구증구포라는 논의와 연해의 점다법의 오류가 선풍이 올곧은 송광사가 주관한 세미나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소장 박동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