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오래전에 있는 이야기이다.
유점사는 1,000여년간을 내려온 큰 절로 신계사, 표훈사, 장안사들과 함께 금강산의 4대절로 손꼽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유점사는 금강산의 모든 절을 통솔하는 본사가 되었고, 다른 모든 절은 본사의 지시를 받는 말사로 지정되었다. 본사는 매일 말사들로부터 그날의 불공정형을 보고 받았고 다음 날에 해야 할 일들을 알려주었다.
당시에는 이 일을 연락원을 통하여 수행하였는데 유점사 주지는 자기 절에서 매사에 책임성이 높고 일에 성실하며 동작이 날랜 한 어린 소년에게 이 일을 맡겼다.
소년은 주지가 시키는 일이라 거역할 수는 없었으나 일은 참으로 고되었다.
낮에는 조금 눈을 붙인 다음 곧 절에서 제기되는 잔심부름을 해야 하였고, 날이 어두워지면 본사를 떠나 신계사에 들렸다가 비사문을 지나 험한 비로봉 준령을 넘어 표훈사, 장안사까지 가야 했다. 그리고는 다리쉼을 할 겨를도 없이 곧 금장골로 해서 외무재령을 넘어 유점사의 아침종이 울리기 전에 되돌아와야 했다.
이 길은 200리가 넘었으며 내리막보다 오르막이 많았고 가파른 벼랑길은 짐승도 넘나들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소년은 두려움도 괴로움도 잊고 오직 맡은 일을 책임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줄곧 뛰어다니곤 하였다.
이렇게 몇 해 세월이 흘렀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200리길을 뛰어다니며 단 한 번도 종소리가 울린 다음에 유점사 뜰 안에 들어선 일이 없었다. 비사문을 지키는 비로봉의 범도 소년의 지성에 감동되어 길을 비켜주었고 은사다리, 금사다리는 은빛, 금빛 뿌리며 가파른 비로봉 마루에 사다리를 놓아주었다.
사람들은 소년의 이러한 근면성에 대하여 칭찬하며 저 소년은 생전에 생불을 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소년이 금강산 호랑이를 타고 다닌다고도 말했다.
“왜 그 비사문을 지키는 범이 있지 않아. 그 범이 소년을 등에 태워가지고 비로봉을 넘겨준대….”
사람들의 칭찬은 대단하였다. 그러면서도 너무나 고생스럽게 살아가는 소년을 동정하고 가엾이 여기면서 주지를 두고 몰인정한 사람이라고 욕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해 섣달 그믐날이었다.
이해 겨울은 날씨가 어찌나 변덕스러운지 내일이 설날이지만 아직 고산지대에는 얼음이 한 번도 제대로 생기지 못하였다.
그래서 모두가 “올해는 겨울이 없이 해를 넘기나보다.”고 말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점심때부터 갑자기 날씨가 흐리더니 이윽고 하늘이 보이지 않게 함박눈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어찌나 눈이 많이 내렸는지 순식간에 개골산은 하얗게 덮였으며 만물상의 기암괴석은 밋밋한 눈 산이 되어버렸고 구룡동의 깊은 골짜기는 펑퍼짐하게 되었다.
모두가 100년 내의 큰 눈이라고 하는데 저녁때부터는 세찬 바람이 휘몰아쳐와 온 천지가 눈보라 울부짖는 소리에 떨고 있었다.
하건만 이날도 소년은 저녁을 대충 먹고 나서는 신들메를 고쳐 매고 길을 떠났다.
신계사를 지나 구룡동에 들어서니 눈이 허리를 쳤다. 그러나 소년은 헤엄치다시피 하여 비사문을 지났고 안간힘을 다 써서 비로봉에 올라섰다.
그런데 벌써 삼태성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여느 날 같으면 그는 늘 저 별을 외무재령에서 보곤 하였던 것이다.
“늦겠구나!”하고 생각한 소년은 두 주먹을 부르쥐고 내리뛰었다. 표훈사, 장안사에서 일을 보고 외무재령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날이 푸름푸름 밝아왔다. 소년은 죽자 하고 뛰었다. 그 모습은 표범처럼 날래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유점사를 3리가량 앞둔 한 못에 이르렀을 때 “땡 땡”하는 종소리가 울려오는 것이 아닌가. 소년은 뛰던 걸음을 멈추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설날 아침 추위는 금강산의 겨울이 비로소 닥쳐온 듯 맵짰으나 소년의 누더기 베옷에서는 김이 문문 피어올랐고 눈썹과 이마, 앞가슴에는 성에가 하얗게 서렸다. 누구나 소년의 이 모습을 보면 가엾은 그를 와락 끌어안지 않고서는 못 견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을 어긴 소년은 이대로 유점사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독기어린 주지의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렸고 부처님도 자기를 책망할 것만 같았다.
“아! 끝내 일을 저질렀구나!”
소년은 자기를 죄진 사람으로 치부하였다. 이제 절에 돌아가면 무사할 것 같지 않았다.
“오늘이 바로 나의 명이 끝나는 날인가부지!”
이렇게 생각한 소년은 인정사정 모르는 세상을 원망하며 살얼음 진 못에 뛰어들었다.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소년의 길지 않은 생애는 야속한 세상에 슬픔의 흔적만을 남긴 채 끝나고 말았다.
‘한생을 부처를 위하여 바쳐왔건만 차려진 것은 죽음뿐이로구나.’
성실하고 순박하게 살려고 애쓴 귀여운 소년의 죽음을 남몰래 슬퍼한 노승들은 부처님이 소년을 가련하게 여기어 일찍 극락에 부른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그들 자신도 이 말을 믿지 않았고 스스로 얼굴을 붉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얼마 후부터 소년이 빠져죽은 못을 ‘소년소’라고 부르게 되었고 우점사의 삼성각 안에는 범 잔등에 걸터앉은 한 소년의 그림이 걸렸다. 유점사 스님들은 그 그림이 세상에 깊은 여운을 남기고 간 어질고 착한 소년의 모습이라고 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