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 스님의 성품과 행적은 작금의 교단안팎에서 야기되고 있는 수행의 상실과 서구기독문명의 급속확산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불교의 바로미터라 할 것이다.”
하춘생 교수(동국대 경영대학원)는 3월 25일 통도사 해장보각에서 열린 ‘월하 대종사 탄신 100주년 학술세미나’에서 이 같이 발표하며 조계종 제9대 종정이자 영축총림 통도사의 초대 방장인 노천당 월하 대종사의 포교인식과 실천이념을 조명했다.
하 교수는 월하 스님을 ‘청정가풍 불조혜명’의 기치를 든 행동가이자 ‘군단포’로 상징되는 실천가이고 ‘합리적인 절대권력’의 교화행자이자 ‘하심의 화신’으로 칭송된 육바라밀행자라고 평가하며 일화를 소개했다.
하 교수는 통도사 정화 당시 167명의 대처승이 집단으로 이혼해 법적 하자 않는 비구 신분을 취하게 된 것은 월하 스님의 원융무애한 통솔력 덕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월하 스님은 통도사와 해인사를 위시한 경남지역 사찰정화의 노정은 경향각지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원융무애한 모습으로 당시 비구측의 사찰인수과정에서 야기된 대처승과의 유혈사태로 전국의 사찰이 아비규환이었던 저간의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다”며 “강한 듯 온화한 월하 스님의 자세는 스승인 구하 스님의 사상과 리더관을 그대로 계승한 성정의 일면”이라고 설명했다.
월하 스님의 ‘군단포(軍團砲)’와 같은 포교원력은 통도사 대중 포교당을 대표하는 서울 강남 구룡사가 설립될 당시에서도 빛을 발했다.
하 교수는 “월하 스님은 구룡사 건립불사에 친히 발걸음해 법문과 격려를 해줬고, 더욱 놀랄 만한 일은 통도사가 소장하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금란가사와 자장율사의 금란가사를 구룡사의 천막법당으로 이운해 친견법회를 갖도록 허락하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하 교수는 “그것은 예전에 없던 금기를 깨는 일이었다”며 “통도사 대중은 물론 문화재청 관계자들이 모두 반대에 나섰지만 월하 스님은 포교불사에 지극한 도움이 되는데도 문화재라는 그 자체만으로 비공개 소장만을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하 교수는 “월하 스님은 통도사 포교당이 법문을 요청할 때마다 마다하지 않고 노구의 법체를 이끌고 설법의 여정에 올랐다. 위엄과 권위를 내세우며 직접 대중을 찾아가기보다는 대중으로 하여금 참례를 해주기를 기다리는 교만을 월하 스님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며 “통도사 조실 스님이, 방장 스님이, 종정 스님이 법회도량을 설시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통도사 포교당에 대중의 발걸음이 분주해지는 일은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회고했다.
1986년 7월 ‘86전국불교청소년하계수련대회’에 전국의 청소년학생 2천6백여 명이 몰려든 유례없는 성황과 통도사 대중의 우려에도 통도사 설법전 불사를 가능케 한 것도 월하 스님의 진정한 교화행자로서의 면모 덕분이었다고 하 교수는 설명했다.
하 교수는 “월하 스님은 청정가풍을 실현하기 위한 지계정진의 끈을 놓은 바 없으며 밖으로는 처처에 대중포교도량을 시설해 전법교화에 거침없는 행보를 보여줬다”며 “탄신 100주년을 즈음한 다각적인 행적 조명을 계기로 월하 스님의 출가정신이 ‘희망’으로 다가서는 이유는 그 때문”이라고 정리했다.

월탄 스님은 '월하스님의 정화불사'를 주제로 기조강연를 시작하기에 앞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이날 세미나에서는 조계종 원로의원 월탄 스님이 ‘월하스님의 정화불사’를 주제로 기조강연했고, 소운 스님(동명대 교수)이 ‘계율정신에 입각한 월하스님의 수행’을, 이혜숙 교수(금강대)가 ‘근대불교복지의 회고와 전망-월하스님의 자비원 설립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