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장인이 탄생하는 것은 참으로 희유한 일이다. 장인을 소중히 생각하는 풍토가 갖춰지지 않은 시절에 장인을 만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최근 들어 장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조금씩 개선되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장인에 대한 평가는 박한 편이다. 하물며 50년 전이랴!
50년 전 탱화에 발을 내딛은 서강 정규진 선생의 삶은 그래서 불연(佛緣)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참으로 묵묵하게, 인고의 세월을 불보살님을 그리며 살아온 한국불교미술원 원장 서강 정규진 불모. 그가 자신의 50년 탱화 인생을 총 정리하는 책을 펴냈다. 책 제목은 『불교와 탱화』(도서출판 중도)다. 이 책에 대해 감히 ‘결집’이라는 찬사를 던지는 이유는 한 부처님께 귀명한 장인의 반세기가 농축된 역저이기 때문이다.
역저의 기준이란 것이 부피가 많거나 내용이 심오하다던가 하는 것이지만, 이 책 만큼은 한 장인의 수도자와 같은 삶의 흔적이자 궤적이라는 점에서 역저의 범주를 확대시켜도 좋을 듯싶다.
불상이나 탱화는 불교의 교리를 형상화한 교리의 변상이다. 이것이 불상과 탱화가 예배의 대상이 되는 이유다. 탱화는 티베트에서는 탕카(tanka)에서 연원한다.
이 책의 특징은 그동안의 불화집이 그림 위주로 구성된 데 비해, 그림과 그 그림이 나오게 된 배경과 신앙의 대상인 성보로서 어떻게 받들어 모셔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까지도 상세히 기술함으로써 불화의 교과서라고 불릴만하다는 점이다. 서강 원장이 그린 탱화나 옛 탱화를 소개하고 각각에 대해 유래와 설명을 친절하게 곁들였다. 지난 50여 년간의 화필 작업을 바탕으로, 탱화의 기초에서부터 전문분야까지 전 과정을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서강 원장은 “탱화를 조성하는 마음가짐은 망념을 쉬고 적정 속에서 사심을 버리는 것이며, 광명변조한 화엄사상이 지닌 불보살과 아라한들의 무한한 아승기의 표현으로 형상들을 조성해야 하므로 경전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강 정규진 불모는 16세(1960년대 초반)에 불교에 귀의하여 근대 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대불모 보응당 문성스님의 제자인 회응당 상균 스님의 회상에서 사사한 정통 불모의 맥을 잇는 분이다. 불화의 기법을 습득하면서 한편으로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주경야독으로 마치고 서라벌예대를 다니며 당대 산수화의 대가였던 소정 변관식 선생과 연정 안상철 선생으로부터 사사하기도 했다. 20대 때인 속초 신흥사 탱화불사를 시작으로 반세기 동안 전국의 사찰을 거의 거쳤다. 1970년 청진동에 한국불교미술원을 설립 연구실겸 작업실로 활용하면서 본격적으로 탱화불사에 주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규진 불모는 이 같은 자신의 삶을 ‘금강삼매의 각오로 탱화삼매에 빠져 정진하다보니 어느 날 문득 허공 속의 빛을 감지하게 되었다고나 할까’라고 정리한다. 서강 정규진 불모. 그는 이 책의 말미에서 후학들에게 반세기 불모의 삶에서 얻어진 경책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평생 탱화에 정진하다보니 훌륭한 화원이 되려면 반드시 읽어야 할 경전이 화엄경이요, 법화경이며, 능엄경이다.” 단순히 붓을 놀리는 것으로는 불모, 즉 불보살을 탄생시키는 성스러운 불사를 할 수 없다는 당부의 말이다.
불교 TV 회장 성우스님은 정규진 불모에 대해 “반세기 동안 불교계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선조사스님과 화승(畵僧)이 이루어 놓은 한국불화의 전통과 맥을 이어가야한다는 확고한 신념과 신심으로 전통 불화의 계승은 물론 그 발전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함으로써 한국불교 전통문화로서 불화의 위상이 우리 사회에 확고히 뿌리 내리도록 했다”고 평가했다. 석정스님도 “불교 미술을 배우려는 화원은 물론 불자들도 불교공부를 위해서도 꼭 읽어야 할 책이며 한국불교를 알고자 하는 분이라면 꼭 읽어야할 책”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죽는 날까지, 더 이상 붓을 들 수 없을 때까지는 불화를 조성하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서강 정규진 불모. 그는 이승의 인연이 지속되는 한 늘 간직하고 있는 화두, 즉 ‘여러 가지 채색으로 여러 가지의 형상을 그리지만 형상 속에 채색이 없고 형상을 떠나서는 여러 빛깔의 채색을 찾을 수 없다. 이뭐꼬?’를 놓지 않겠다며 굳게 입을 다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