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31일 <미디어붓다>에 게재된, “有見을 지니고 설법하는 혜민 스님은 힌두교 수행자인가? 도교의 수행자인가?”라는 다소 도발적 제목으로 혜민 스님의 7월 25일 대한불교진흥원 주최 다보법회 법문 내용을 비판했던 적연 이제열 법사의 기고에 대해 혜민 스님이 자신의 블로그(네이버 ‘혜민스님 블로그’)에 답변 성격의 글을 지난 9월 22일자로 게재했다. 이제열 법사가 혜민 스님 법문에 대해 “부처님이 강하게 비판한 삿트적 개념의 설법 안 된다”는 부제와 함께 비판한 글은 무려 105개의 댓글이 달리면서 한동안 <미디어붓다>의 지면을 뜨겁게 달궜다. 이따금씩 수준 이하의 댓글도 있었지만, 대부분 수준 높은 댓글이 달려 쌍방향 미디어의 특징인 인터넷 미디어의 특성과 장점을 아주 잘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뜨거운 공방에도 당시 입장을 내놓지 않았던 혜민 스님이 '혜민스님 블로그'에 게재한 글 ‘텅 빈 것이 살아 있다’는 제목의 글을 전문 그대로 게재한다. 거듭 당부하는 것이지만, 비난이 아닌 격조를 갖춘 법에 대한 논쟁이 있기를, 그리하여 건전하고 생산적인 토론문화가 이루어지기를, 또한 비법이 아닌 정법이 선양되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아울러 <미디어붓다>는 이 기고에 대한 격조를 갖춘 실명과 소속을 밝힌 이의 반론이나 견해가 있을 경우, 같은 비중으로 게재할 방침임을 밝혀둔다. <편집자>
텅 빈 것이 살아 있다
우리의 불성(佛性)은 텅 빈 채로 있다. 즉, 아무것도 없는 채로 살아있다. 그런데 이것을 경험하지 않고 관념으로, 생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마치 텅 빈 무언가가 따로 있다고 상(相)으로써 잡는다. 그래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무아(無我) 사상과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착각한다. 심지어는 있다, 살아있다는 말에 끄달려 힌두교의 범아론적 가르침과 뭐가 다르냐고 이의를 제기한다. 그래서 본래청정, 본래면목, 주인공을 말하는 선불교를 포함한 대승불교 전체가 다 부처님 초기 근본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없다는 것은 중생들이 몸을, 생각을, 느낌을 나라고 동일시하는 그 착각을 부처님께서 쳐 내신 것이다. 오온이 홀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연기되어서 아주 잠시 머무러 있는 것이지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따로 존재하는 자성(自性)이 없다는 말씀이다. 실제로 중생들이 나라고 집착하는 몸과 느낌과 생각의 관점에서 보면 틀림없이 무자성이고 무아다. 정말로 그렇다. 그런데 무자성이고 무아인 것을 깨닫고 난 후엔 어떻게 될까? 그 후의 일을 누군가가 진작에 소상히 일러 주었더라면 오랜 시간동안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고 고생도 덜 했을 텐 데 하는 것이 있다.
바로 그 무자성이고 무아이구나 하는 것을 무언가가 살아서 안다는 사실이다. 내가 무아임으로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이것이 끝인 줄 알았는데, 뭔가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살아서 안다. 이것이 가장 큰 신비이다. 아무것도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그 무엇도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분명 생각이 완전히 끊어지고 난 후에도 무언가가 살아서 텅 빈 가운데에서도 무아, 무자성이구나 하는 것을 즉시 안다. 지금 바로 텅 비여서 아무것도 없구나,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말하듯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고로 (이무소득고 以無所得故)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점을 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절대로 개념으로 생각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배고플 때, 아! 배고프구나 하는 것을 생각을 통하지 않고도 바로 즉시 알 수 있듯, 그냥 뭔가가 바로 안다. “나”라고 했던 것이 그리고 무자성인 세상이 둘 다 텅 비였다는 것을. 그리고 나와 세상을 둘로 나눈 것은 오직 생각이었다는 것을.
그런데 여기까지 오게 되면 텅 빈 것을 아는 그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찾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잘 찾을 수가 없다. 왜냐면 그 텅 빈 것을 아는 것이 따로 어떤 형상이나 자성(自性)을 가지고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텅 빈 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즉 앎과 텅 빔이 둘이 아니고, 텅 빈 채로 있는 것이 살아서 안다. 즉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마음이 살아 있고 그것이 엄청난 지성(知性)을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앎은 허공과 같이 텅 비였기 때문에 더럽혀 질 수가 없다. 허공에다 아무리 똥칠을 해 봐야 더럽혀 질 수가 없는 이유와 같다. 또한 이 앎은 몸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 몸 안팎 따로 없이 안다. 앎의 관점에서 보면 내 어깨가 결린다는 것을 아는 것이나 새소리가 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나 하등의 차이가 없다. 정말로 똑같은 앎이다. 즉 나무를 보면 바로 그 앎이 나무에 있다. 산을 보면 그 앎이 산에 있다. 뒤집어 말하면 나무가 있다는 것을, 산이 있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 바로 텅 빔 그 자체다. 그리고 그 텅 빈 앎은 어느 한 곳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고 안팎을 다 투과한다. 천지가 그냥 텅 벼있고 그러기에 주와 객, 나와 세상을 동시에 포섭한다.
분명 여기까지 읽고 나면 어떤 이는 또 관념으로 머리로 이해해서 나에게 따질 것이다. 부처님은 분명 없다고 하셨는데 어찌해서 있다고 하냐고. 없는 채로, 텅 빈 채로 있는 것도 있는 거 아니냐고. 아니면 반대로 텅 빈 것이라는 것을 또 다른 상으로 붙잡고 나서 노력해서 얻어야하는 어떤 대상, 목표로 만들어 버린다. 사실 둘 다 문제이다. 생각 속에 갇혀서 이해의 수준에서 바라보면 이처럼 항상 텅 빈 마음과 그 텅 빈 마음을 경험하는 뭔가가 따로 있다고 자꾸 이분화(二分化)하여 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서 텅 빈 마음을 관념으로 “내”가 얻으려고 하거나, 텅 빈 마음을 경험하고 나서도 “내”가 남아 있다고 생각으로 오해한다. 왜 이렇게 질문이나 오해를 하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생각이 완전히 끊어진 후, 의식이 다시 깨어나 주객을 포섭하는 앎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생각으로, 상으로 자꾸 잡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자성, 무아임을 바로 아는 앎은 연기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연기해서 일어났다고 하면 그 앎도 변할 수 있다는 말인데 그 깨달음은 변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텅 빈 앎은 세상에 자기 혼자 밖에 없다는 것을 또 스스로 안다. 텅 빈 마음이 깨어나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한다. 이것이 수행의 엄청난 묘미이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시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앎은, 그 텅 빈 마음은 부처도 알 수 없다는 도리가 바로 여기에 또 있다. 부처가 몸을 구중궁궐(九重宮闕)속에 숨겼다는 도리도 여기에 있다. 이 자리를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가 없으므로 시자에게 빗장 문을 잠그라는 도리도 여기에 있다. 선불교의 선(禪)자를 파자해 보면 왼쪽에 볼 시示와 오른쪽에 홀로 단單으로 이루어졌다. 즉, 선은 혼자밖에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삼계(三界) 안에 그 텅 빈 앎만 홀로 가득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