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개성외곽 봉동역에 내려진 평불협 지원 밀가루 60톤.

평불협 대표단과 조불련 대표단이 밀가루를 하역한 봉동역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국토는 분단되었지만, 연면히 흐르는 남북 형제의 피는 뜨거웠다. 어려울 때 돕고, 여유가 있을 때 마음을 나누는, 그리고 곤궁할 때 도움을 받고 그 고마움을 잊지 않는 그런 따뜻한 광경이 지난 10월 13일 북녘 땅 개성시내에 있는 민속여관 식당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막 밀가루 60톤을 개성 외곽 봉정역에서 인계하고 시내로 돌아와 가진 오찬 자리였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합니다. 권력도 변하고, 빈부도 변하고, 사상도 변합니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은 피를 나눈 민족, 형제의 끈끈한 끈입니다. 형제가 어렵고 힘들 때 조건 없이 도움을 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주었다고 상을 내어서도, 받았다고 겸연쩍어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부처님께 귀의한 일불제자가 아닙니까. 무주상보시를 실천해야할 불자들이며, 같은 핏줄을 나눈 같은 겨레 형제이니 고맙거나 미안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조건 없는 보시, 자비, 사랑이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는 불자들에게 주어진 공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평불협) 회장 법타 스님>

봉동역에서 밀가루 60톤 인수인계를 마치고 개성여관에서 오찬을 하는 남북의 불자들.
“쉽지 않은 일인데 이렇게 개성까지 60톤이나 되는 밀가루를 가지고 찾아와 주셔서 너무나 고맙습니다.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이며, 그 고마움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평불협 법타 큰스님은 너무나 자주 만나 뵈어서 이제는 허물이 없을 정도입니다. 늘 친근함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평불협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운동을 하는 불교계에서는 유일한 민간단체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더 어렵고 힘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자주 잊지 않고 도움을 주셔서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평불협과 조불련이 더 노력을 해서 통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그동안 쌓아온 우의와 신뢰를 단단히 해나갔으면 합니다.” <조선불교도연맹(조불련) 부장 차금철 스님>

13일 개성방문에 앞서 12일 영등포 대선제분에서 밀가루 상차를 하는 모습.

13일 아침 북으로 향하는 밀가루를 실은 트럭.
10월 13일 새벽, 서울 삼선교에 위치한 평불협 본부로 모두 7명의 불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12일 오후 영등포 대선제분 공장에서 밀가루 60톤을 상차할 때 만났던 얼굴들이다. 서둘러 파주를 거쳐 개성으로 가야하는 임무를 띤 평불협 대표단들이었다. 평불협 회장 법타 스님(동국대 정각원 원장)을 비롯해 신창수 평불협 이사, 밀가루 구입에 큰 힘을 모아준 (주)아이네임즈의 권순상 고문 등으로 구성된 평불협 대표단은 9인승 승합차을 타고 개성으로 향했다.
임진강을 건너 남북출입사무소에서 출경 허가를 받아 육로를 이용해 개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 천리타향보다도 더 멀게 느껴지는 곳, 북녘을 향해 달리는 차안에서 차창 밖을 바라보며 드는 마음은 몹시 착잡했다.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같은 민족끼리, 같은 단군의 자손끼리 이렇게 서로 갈라져서 만나지 못하고 왕래를 하지 못하며, 형제는커녕 철천지 원수가 되어 살아가고 있을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북의 동포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데, 남쪽에서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 기막힌 현실, 어려울 때 돕고, 형편이 피면 잊지 않고 갚는 아름다운 관계를 남과 북이 가질 수는 없을까, 삼엄하게 짐을 살피고 몸을 수색하는 과정을 거치며 참으로 안타깝고 서글픈 생각을 감출 수 없었다.
이미 10여 년 전, 일주일 동안 평양을 비롯해 사리원과 평성시 일대를 돌아본 터라, 북녘 땅 방문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육로를 통해 북녘 땅에 들어서는 느낌은 색달랐다. 금강산을 들어갈 때와는 달리 개성으로 달려가는 느낌이 더 착잡하게 다가왔다.
“반갑습네다. 법타 큰스님, 신 이사님, 그리고 이학종 선생. 오랜만에 뵙습니다.” 조불련 차금철 부장스님이 반갑게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 평양과 금강산 신계사, 그리고 중국과 말레이시아 등에서 여러 차례 안면이 있던 터라, 오랜 지기를 만난 듯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눴다.
잠깐 인사를 나누고 서로를 소개한 다음, 차금철 스님 등이 탑승한 조불련 승합차를 따라서 개성 시내로 들어섰다. 가까운 곳이지만 개성을 방문하기는 처음이어서 시종 두 눈이 바빴다. 시내를 거쳐 우리로 따지면 70년대 농촌 풍경을 연상시키는 봉동역 부근으로 도착했다. 남쪽이나 북쪽이나 가문 날씨로 개천은 대개 메말라 있었다. 드디어 봉동역. 남쪽에서 올라오는 밀가루 등 물품들을 내려놓는 장소로 사용되는 벌판에 있는 기차역이다. 마을 앞 논밭 가운데로 난 철도역은 역사도 없는 곳이었다. 벌판 같은 곳에 밀가루 60톤을 쌓아놓으니, 제법 그 양이 많다.
“스님, 고맙습니다. 잘 활용하겠습니다.”
“형편이 되면 더 많이 가져왔어야 하는데, 이제 물꼬가 터졌으니 앞으로 더 자주 만납시다.”
차금철 스님과 법타 스님이 하역 광경을 바라보며 정겹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제 조계종 민추본에서도 100톤, 오늘 평불협에서 60톤(300포대), 도합 160톤의 밀가루가 갑자기 조불련 앞으로 전달되었으니, 조불련의 창고가 부족하겠다’는 법타 스님의 조크에 ‘창고는 아주 넓다. 그런 염려는 마시라’는 차금철 스님의 맞장구에 남과 북의 불자들은 함박웃음을 쏟아냈다.

개성 성균관 전경. 지금은 고려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균관 길을 함께 거닐며 담소를 나누는 법타스님과 차금철 스님.
기념촬영을 하고, 서둘러 개성시내에 있는 민속여관으로 향했다. 점심을 하고 개성시내 관광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빠듯하기 때문이었다.
민속여관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하고 있었다. 본래 100칸 한옥이었다는 이곳을 여관과 식당으로 개조해서 개성관광을 하는 외국인들이 주로 이용한다고 차금철 스님이 소개했다. 조랭이, 약호박밥, 버섯요리 등 개성음식을 차려놓은 여관에 들어서니 새벽부터 서두른 탓에 마침 찾아온 시장기에 군침이 돌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오찬이 이어졌다. 조국의 평화통일과 평불협, 조불련의 발전을 기원하는 건배사와 함께 오순도순 대화는 시종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 한옥으로 이루어진 민속여관은 고도의 숙박시설답게 고즈넉한 분위기가 그만이었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 일행은 민속여관 일대를 돌아봤다. 여관 그 자체로 훌륭한 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최근 남북관계가 얼어붙으면서 남쪽 방문자의 개성시내 관광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개성시내 관광을 하도록 노력했다는 차금철 스님의 말씀에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밀가루를 전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지만, 사실 개성시내 문화유적을 돌아보는 것도 내심 기대를 했던 터였다.
오후 4시 30분까지는 출입사무소에 도착해야 하므로 발길을 서둘렀다. 먼저 선죽교에 들러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의 유적을 살펴보았다. 충신을 기리는 마음은 남이나 북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선죽교 위에 흐릿하게 보이는 붉은 선 같은 것이 정몽주의 피라는 설명을 들으며, 개성박물관으로 향했다.
개성박물관은 본래 고려 성균관으로, 이 자리에 고려의 문화유적을 모아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들어선 마당을 지나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니 고려시대의 청자와 금동탑, 고려사절요 등 고려의 유물들이 차례로 전시되어 있었다. 시설의 수준은 많이 낙후되었지만, 열심히 설명하는 안내원의 노력만큼은 세계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능수능란했다.

고려 성균관 왼쪽편 언덕에 옮겨놓은 개성불일사지 5층석탑의 위용.
박물관 외곽에는 불일사탑, 현화사탑 등 개성부근에 있는 절터에 있던 탑을 옮겨다 놓기도 했다. 유창한 해설자의 안내로 박물관을 돌아보니 다리가 뻑적지근해졌다. 탑을 돌아보며 신라탑과 고려탑의 특징 등에 대해 ‘얄팍한’ 지식으로 설명을 해주니 북 안내원이 ‘혹시 탑을 연구하는 선생님이냐?’고 묻는다.
남북의 불자들이 함께 정겹게 어울려 고려의 문화를 감상하고, 시간에 맞춰 남쪽으로 가는 통로인 출입사무소를 향했다. 짧은 만남이지만 헤어지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아쉬움이 남는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헤어짐, 하루빨리 통일의 그날이 오도록 함께 노력하자는 말과 함께 긴 악수로 남과 북의 형제들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헤어졌다. 10월 13일, 착잡하고, 즐겁고, 또 바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