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불교사상강좌 2월 특강 자료> 21세기, 왜 다시 유교인가 한형조_한국학중앙연구원, 고전한학 & 철학 <목차> 1장. (곤혹) 트로이의 목마, 혹은 飜案 한자어의 지배 -- 2장. (변명) 변명 혹은 위안으로서의 <實學> 3장. (전환) 유교를 보는 인식의 변화, 시선의 전환 4장. (도구) 21세기 글로벌 시대. 또 다른 '역사기술historiography'이 필요하다 -- 5장. (기획) 지금 여기, 유교의 최소한을 남긴다면? 6장. (컨텐츠) 유교 인문의 현장, 퇴계의 󰡔聖學十圖󰡕를 읽는다 1장. (곤혹) 트로이의 목마, 혹은 飜案 한자어의 지배 “우리가 같은 언어를 쓰게 된다면, 우리는 같은 역사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루스 이리가라이) 1. 두 세트의 한자말 - 한국어는 20세기 초 일제의 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 근본적 전환을 겪었다. 어휘의 주축이 <한자의 형상을 한, 서구의 문화와 지식>으로 <대체>된 것이다! - 저널이나 논문은 물론, 우리가 날마다 접하고 있는 신문이나 방송에서 쓰고 있는 한자말의 대부분이 서구어의 번안 개념들이다. - 전통 한자어는, 그것이 <현대>에도 통용되는 말일 때, 크고 작은 의미와 용법과의 <거리>를 갖고 있다. 1) 의미와 용법이 달라진 것들: 測量. 折衷. 橫說竪說. 完璧. 生産. 2) 가치가 뒤바뀐 것들: 功利. 穿鑿, 權利.(人之所以騖于權利, 溺于富貴, 犯難而不悔 者, 將以厚其身耳. 蘇軾, 󰡔老子註󰡕). 3) 세계관과 삶의 태도가 엇갈리는 것들: 自然. 本性. 事物. 心. 道德. 國家. 實學. 學 問. 工夫. 4) 문명이 충돌하는 것들: 道. - 이제 누구도 예전의 의미와 용법을 의식하지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옛 용어와 개념들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번안어로서의 역할에 더욱 충실해지고 있다. -> 트로이의 목마. 2. '哲學'이라는 말 - 번안어들의 지배와 전통 자원의 축출 - '哲學'은 전통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철학은 '필로소피(Philosophia)'의 번역어로 자리잡으면서 비로소 이 땅에 존재하게 된 학문이었다! 필로소피(Philosophia)는 처음에는 소리 그대로 比祿蘇費亞 혹은 飛龍小飛阿(*1912년, 李仁梓, 󰡔希臘哲學攷辨󰡕)라고 음사되었다. 그러다가 니시 아마네(西周)란 일본인이 고심 끝에 <哲學>이라는 이름을 창안(?)했고, 그것이 굳어져 유행되었다. 그러니, 동아시아의 전통에는 <철학>이 없다! 원효나 퇴계 율곡, 다산 혜강에게 이 말을 들이댔다면, 다들 고개를 갸우뚱거리거나 밥알을 뿜었을 것이다. “어디서 배운 문자속인가, 쯧!” *유교는 철학인가, 불교는 종교인가 - <철학>의 외양을 한 <필로소피>가 등장함으로써 전통 유학이나 불교는 때 아니게 정체성을 의심받고, 정당성을 도전받게 되었다. - 논리와 체계로 무장한 철학은 묻는다. “얘야, 유교는 일상의 조언들로 가득차 있던데, 그건 철학이냐, 잠언집이냐” 그리고 유일신의 초월성을 등에 업은 <종교>는 묻는다. “불교야, 너는 무신론같기도 하고, 다신론같기도 한데, 너를 <종교>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물음이다. 그것은 흡사, 선글라스를 낀 권력자가 상대방을 심문하는 자세같은 것이었다. *질문의 칼을 거꾸로 쥘 수 있어야 했는데... 그때 정신을 수습하고 이렇게 되물을 수 있었어야 했다. - “대체 철학은 무엇이고, 종교란 건 또 무엇이냐.” 하는 수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렇게 뻗댈 수도 있어야 했다. “유교는 철학이 아니다. 그리고 불교 또한 종교가 아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되는가. 가르침이고 배움이면 족하지 않은가?” - 질문을 거꾸로 던질 줄도 알아야했다. “예수는 과연 깨달은 사람이냐.”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은 爲己之學인가, 爲人之學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핍박할 수 있었어야 했다. “주자는 學者란 <제 몸의 自得을 통해서, 바깥의 사물에 사사로이 유혹되지 않고, 자신의 내재적 本然의 善을 구현해 나가는 사람(學者於此反求諸身而自得之, 以去夫外誘之私以充其本然之善也)>이라고 했는데, 근대 이후 이 모델에 적합한 사람은 스피노자 말고 누가 있는가.” *'지혜의 학'으로서의 동서양의 만남 - 러셀 이래, 철학은 삶의 보편적 문제이며, 서양의 철학적 전통만큼 동양의 철학적 전통이 소중하다는 것, 그리고 그 둘의 융합이 몰고 올 문명사적 의미가 심대하다는 것을 인정해 가고 있는 추세. 서양에서도 철학을 과학의 오랜 시녀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그럼에도 미국 내에서의 동양철학의 위상 (철학과, 동아시아학과.) - 철학은 역시 지혜의 과학(Philosophy is the science of wisdom)이다. 여기 지혜란 삶의 기술(and wisdom is the art of living)을 말한다. 삶의 최종 목표는 행복인 바, 쾌락이 아니라 덕이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할 것이다.(Happiness is the goal, but virtue, not pleasure, is the road.) 이런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동양은 어느 전통보다 철학적이며, 이 기반 위에서 동서양의 철학은 절실하게 대화하고 풍요롭게 연대할 수 있다. 2장. (변명) 망국의 절망에서 변명 혹은 위안으로서의 실학까지 1. (20세기 초) 망국의 회한 - 20세기 한국은 유교를 버렸고, 지워나갔다. 왜? 제국열강의 각축기, 유교가 자주와 독립을 지키는데 ‘실패’했고, 그리고 이은 근대화에도 ‘장애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단재 신채호의 절망 “書憤,” 즉 “내 분함을 여기 적는다.”는 제목의 시. 浮虛之自六經開 자다 깬 허황한 소리, 六經에서 시작했지 快付秦家一炬灰 진시황이 시원하게 불을 잘도 싸질렀다 却恨當時燒未盡 아깝다, 그때 몽땅 다 태우지 못하고 漢庭猶有伏生來 漢 나라에 복생이란 자가 왜 또 나타나느냐 말이다. 2000년 전의 진시황을 원망하다. 상고사에서 위안을 찾다가, 결국 아나키즘으로 망명-> 朝鮮 1千年來 一大 事件은? 述懷2 鷄狗於人本無罪 닭이나 개가 무슨 죄를 지었겠나 只爲口腹日殺之 다만 사람들의 고픈 배를 위해 날마다 죽어나가는게지 惟有强權而已矣 여기는 다만 힘과 권력이 말하는 세상 空言仁義欲何爲 공허히 仁義를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席門談道眞适士 거적대기 깔아놓고 道를 논하는 저 우활한 선비 보소 手劒斬人是快兒 칼을 휘둘러 사람을 벨 줄 알아야, 진정 사내이지 云云聖哲果何者 聖王과 哲人을 운운해서 뭘 어떡하자는 건가 高標二字謾相欺 두 글자 높이 걸고 서로 속이면서 사는 사람들... 단재의 이 시각은 식민지로부터 해방되고 난 이후에도 한 세기를 풍미했다. 그것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유교를 보는 <주류의> 시선이다. 2. (1930-1980) 20세기 역사학의 빅브라더 '實學' 터졌던 울분이 가시고 나자, 이윽고 성찰의 시간이 도래했다. *조선학의 발흥 계기는 셋이다. 1) 이른바 內鮮一體의 억압에, 2) 점차 ‘모던modern’해지는 근대 문명에 조선인들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3) 자주와 독립의 의지가 물 건너가겠구나 하고 우려했다. 鄭寅普(1893-?), 安在鴻이 주도하여 '실학'을 천양하고, ‘조선 후기 개혁적 지식인’들을 발굴. 요약하면, “조선은 암흑의 시대가 아니다. 조선 후기 일단의 지식인 관료들이 新我舊邦, 즉 고식과 비효율, 경직된 조선의 유교문화를 혁신하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 노력이 우호적 여건을 만났다면 자주적 개화와 근대화가 가능했다.” *실학의 세부 코드들 (1) 실용: 서양의 응용기술이나, 세계관 인식의 전환, 그리고 천문학적 영역의 지평을 확장한 사례들. (다산 정약용=‘수원 화성 지을 때 擧重機 설계 운영'하여 거금 절약.) (2) 실무: 제도적 관심과 사회개혁안. (3) 사회: 유교의 형식적 의례적 문화의 고식성을 비판하고 가부장적 의식과 불평등 구조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 (4) 사상: 주자학의 ‘뜬 구름잡는’ 형이상학적 논의, 四端七情論같은 ‘공리공론’을 혁파하고, 현실적 인간을 직시하고, 그들 사이의 문제를 ‘기술적으로’ 풀어가는 새 사상을 보여주는 논의들. *실학의 목표는 '근대문명'이다 실학의 규정은 다음과 같다. “실학은 '반(反) 주자학'을 표방하고, ‘근대'를 지향’했다.” -> 20세기 역사 연구의 시선과 방법을 지배한 빅브라더! 3. (1990-2000) 흔들리는 ‘실학’의 성채 (내적) 연구역량의 축적 + (외적) 시대적 환경의 변화: 시대정신과 환경의 변화가 ‘실학’의 혁신 혹은 내파를 요청하고 있다. P.S. 전통의 재고는 근대화 산업화의 성공이 가져다 준 선물... 컴플렉스 극복, 도구로서의 전통 인식! 3장. (전환) 인식의 변화, 그리고 유교 전통의 여러 자원에 대하여 1. 유교 자본주의론, 유교 근대화론(Confucian Modernism) *한국의 가족중심의 문화와 높은 교육열, 그리고 근대와 민주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집단의식과 권위에의 순종을 급속한 근대화를 성공시킨 요인이다! 2. ‘實學’을 넘어서, 백화하는 전통의 자원들: 전통에 대한 ‘정보’와 컨텐츠에 대한 수요가 팽창. -> 그동안 실학의 빛에 눌려 그늘져 있던 분야의 연구와 정보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중. *문화컨텐츠 가령, ‘생활’에 대한 풍부한 정보들. 복식과 음식, 수사와 형벌, 놀이와 문화 등이 대표적이다. 歡言自酒家 이 화상, 지금 술 한잔뿐이 안 마셨다고 둘러대고 있지만 儂言自娼家 틀림없어, 룸살롱에 갔다 온거야 如何汗衫上 아니라면 어째서, 내 루즈 자국이 儂脂染作花 당신 와이셔츠 흰 칼라 위에 빨갛게 번져 있지 (文無子 李鈺, 1760-1813) 또, 영화와 드라마 등에서 일어난 한류 붐을 주목한다. 그 안에 담긴 전통적 요소와 주제들. (1) 가령, 드라마 <대장금> + 영화 <왕의 남자>: 󰡔朝鮮王朝實錄󰡕의 기사 한 줄에 영감을 받음. 영화 <血의 淚>는 궁중에서 일어난 암살과 그 수사여서 당시의 법의학적 정보에 기반. 그러나 20세기 그동안 이 분야의 연구를 충분히 하지 못했다. ‘왕실’에 관한 연구 저작이 20세기 100년 간 5권 정도에 불과하다면 믿을 것인가. 이 또한 실학의 그늘이었다. (2) 대만대 역사학과 우짠량(吳展良) 교수와의 대화. 대만의 연속극과 대비해서 본 한국의 영화-드라마. “기이한 인간들이 기이하게 행동하는 것에 질려 TV를 보지 않은지 오래다. 그런데 한국이 왔다. 감정과 정서가 살아있고 관계를 중시한다. 그리고 건전한 정의로운 결말을 갖고 있고, 요컨대 ‘인간성(humanity)를 포기하지 않는다. 한류의 중심에 바로 ’유교가 있다.‘ 정작 너희 한국인들은 그 점을 모르고 있는 것같다.” *상품 개발과 디자인 - 글로벌 경쟁에서 정체성 있는 상품개발과 디자인. (전통의 문양과 색감, 복고적 재질과 기술을 이용한 다양한 산업 응용). -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仁寺洞의 골동이나, 차, 그리고 옷과 노리개를 찾고, 전통의 음식을 찾아 즐기면서 한국을 느끼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인의 사고방식 보이는 유교는 사라졌지만, 보이지 않는 유교는 아직도 건재하다. - 의회제도와 정당정치, 그리고 법률의 운용: 100년 너머의 근대적 제도의 수입정착에도 불구하고 거기 ‘한국적’ 성격이 분명히 작용하고 있고, 이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기형’, 혹은 ‘불합리’로 보이게 한다. - 기업환경과 기업문화: 포드 식의 분업과 잭 웰치 류의 능률주의가 ‘합리적’이긴 하지만, 한국인들의 정서에는 矯角殺牛의 우려, 혹은 買櫝還珠의 어리석음으로 귀착될 수도 있다. *의미와 가치 위와 연관하여, 한국인들은 100년의 서구적 가치, 이를테면 과학적 사고에 입각한 능률과 효율 등의 구호에 마지못해 적응하려 노력했지만, 내심 매우 불편해 온 것도 사실이다. 이즈음, 근대적 가치와 개발에 대한 폐해가 커지고, 생태와 환경 등이 새롭게 화두로 떠올랐다. - 포스트-모던의 등장: 이와 더불어 “근대와 그토록 불화하던, 그리고 불편해하던 유교 전통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새롭게 조명이 일고 있다. 실학은 근대를 지향하는 것으로 가치를 삼았으나, 포스트-모던 시대는 유교 바로 그것의 원론에, 구체적으로 주자학적 사고와 지향의 가치에 대해 100년 이래 정면에서 목소리를 높이게 된 것이다. (1) 서구에서는 이미 氣學의 사고를 넘어 理學의 재발견이 한창이다. 2004년 11월 ｢하버드 다산학대회｣에서 뚜웨이밍은 유교적 가치의 제고에 있어, 피에르 아도Pierre Hadot가 앞장선 '그리스 로마의 지혜'의 재발견을 동반자로 여기고 있었다. 계몽적 이성 너머에서 매킨타이어는 다시금 <德을 요청>하고 있고, 푸코는 스토아적 이성을 새롭게 제창했다. 소외와 생태를 둘러싼 담론이 무성하고, 근대의 위기가 운위될수록 한때 우리 손으로 추방한 理學에 대한 그리움은 깊어간다. 과연 그렇다. 목적 없는 삶,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리면, “음미되지 않는 삶”을 우리가 어떻게 견디겠는가. 일찍이 니이체가 근대의 종말을 예언하며, “인간은 초극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것, 그리고 하이데거가 과학과 기술로 소외된 존재자를 구원할 '존재의 철학'을 숲 속에서 읊조린 것도 지구적 규모, 문명적 차원에서 일고 있는 '理學의 재발견', 그 르네상스의 다양한 목소리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미래가 이들 理學의 공통 가치들이 대화하고 연대하면서, 그것을 氣學의 현실주의와 접목한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2) 진보적 교회에서의 강의의 경험. 주제는 주자학의 理의 자연신학과 기독교의 초월자 신학의 대비.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 주자학과 다산의 ‘신학(theology)'을 간략 소개. 강의가 끝난 후의 한 노인의 질타. “민주화의 동력은 기독교에서 왔다. 유교나 불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나는 동의 “그러나, 거대담론의 시대가 지나고, 일상과 가족, 비즈니스가 문제가 된다면... 우리는 전통으로부터, 그 ’범속한‘ 분야에서, ’짜잘한‘ 지혜와 관리의 노하우를 배워야 할 것이다.” *전통을 ‘도구’로 이용하고, ‘다양하게’ 접근하자 21세기, 역사에서 ‘구원’을 생각하는 시절이 가고, 이제는 ‘유희’로서, ‘도구’로서 전통과 유교를 인식하고 이용할 수 있는 시절이 도래했다. 지금 서점가에는 바로 그런 책들이 장안의 지가를 끌어올리고 있다. 조선의 뒷골목의 건달들, 소외받은 기생들, 자기고집으로 똘똘뭉친 아웃사이더들, 경전 한 권을 수억번이나 읽었다는 반쯤 미친 사람들, 저 구석의 시시한 일상 간찰들, 왕실의 의궤와 독특한 혼례 절차들, 음풍농월이라 하여 비난받던 한가한 자연시들, 독특한 사물 인식과 분류, 그리고 미신과 災異들, 그리고 국왕의 리더십과 관료들의 정치과정과 노하우, 그리고 士林들의 사회정치적 의사소통 방식까지... 4장. (도구) 전환의 시대, 또 다른 '역사기술historiography'이 필요하다 1. 실학 다음의 역사관 實學은 한 시대의 ‘역할’!! 이었다. 그런데 이제 20세기 실학의 '도구적' 역할이 다하고, 21세기 글로벌 강국으로서의 새로운 역사인식의 도전에 직면한 것이다. 2. 도구로서의 '역사' 역사를 과거의 사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역사’와 그 해석을 ‘도구’라고 단언하는 위의 논점에 크게 반발할 것이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아니어도, 모든 인식은 관심의 결과이다. (사례1) 가령, 누가 사마천의 󰡔史記󰡕를 ‘객관적 사실들의 집적’이라고 말하는가. 그의 󰡔사기󰡕는 그의 鬱結의 반영이다. 그의 좌절과 방황, 꿈과 희망이 그만의 <역사>를 만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과장하자면 역사는, 적어도 역사기술 historiography은 소설이다. 그래서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작자의 마음을 읽는 일이다. 燕巖 朴趾源(1737-1805)은 이렇게 술회한 적이 있다. “그대가 태사공의 󰡔사기󰡕를 읽었다 하나, 그 글만 읽었지, 그 마음은 읽지 못했군요. 왜냐구요. <항우본기>를 읽을 때는 제후들이 성벽 위에서 싸움 구경하던 것이 생각나고, <자객열전>을 읽으면 악사 고점리가 축을 연주하던 일이 생각난다고 하십니까. 이것은 늙은 서생의 진부한 말일 뿐이니, 부뚜막 아래에서 숟가락을 주웠다는 소리나 무에 다르겠습니까. 아이가 나비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발은 반쯤 내고, 뒷발은 비스듬히 들고, 손가락을 벌려 살금살금 다가가, (손을 척 내뻗어)... 잡았구나 싶었는데, 웬걸, 나비는 저만큼 호로록 날아가 버리고, 사방을 둘러보면 아무도 없습니다. 혼자 멋쩍게 웃다가 한편 부끄럽고 한편 화가 나는 것, 이것이 사마천이 책을 저술할 때입니다.” 足下讀太史公, 讀其書, 未甞讀其心耳. 何也. 讀項羽思壁上觀戰, 讀刺客, 思漸離擊筑, 此老生陳談, 亦何異於廚下拾匙. 見小兒捕蝶, 可以得馬遷之心矣. 前股半跽, 後脚斜翹, 丫指以前手, 猶然疑蝶則去矣. 四顧無人, 哦然而笑, 將羞將怒, 此馬遷著書時也. (“答京之, 燕巖集 卷5) *(사례2)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교수의 󰡔일본정치사상사연구󰡕의 경우 이 책은 익히 아는 대로, 일본의 근대를 성립시킨 사상적 기원을 '古學의 주자학 비판'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늘 이런 의문을 가져왔다. “일본은 아시아제국에서 자발적 독자적 근대화에 성공한 유일한 케이스이다. 그런데, 왜 마루야마 교수는 일본의 근대화 성공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해야 했을까.” 한국의 남정네들의 약간 야비한 속담처럼, “잡은 물고기에는 미끼를 줄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해답은 󰡔일본정치사상사연구󰡕의 영문판 서문에 있었다. ‘근대의 초극!’ 전일본을 국제적 침략 전쟁에 동원하던 시절, 그는 평양으로 징집되어 떠나기 직전, 젊은 아내와의 이별에, 성큼 다가온 전쟁과 죽음의 공포를 밀쳐두고, 그 경황없는 시기에, 이 책을 쓰고 있었노라고 술회했다. 그렇다. 마루야마 교수는 ‘근대의 합리성을 지키는 것’을 영혼의 책무로 생각했기에, 그 구원의 열망을 꿈에 담아, 이 책을 쓴 것이다. (참고): 이른바 '객관적 사실'은 없다. 있더라도 칸트가 갈파했듯이, 그 '물자체(thing in itself, Ding an sich)는 알 수 없다. 불교는 有無와 是非, 同異를 동일한 것으로 본다. 식민사관과 실학 또한 서로 대립하지만, 공생적으로 얽혀 있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없었다면 실학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개발도상국의 굴욕을 벗어나겠다는 열망이 없었다면, 실학은 고집되거나 강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E.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일깨우고 있듯이, 역사는 사실의 기록에서부터 이미, 그리고 그것을 선별하여 읽을 때는 더욱,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연관 고리를 찾고 그 의미를 해석할 때, 역사가의 <주관>에 의존한다. 그 주관은 당대의 현실과 조건, 문제의식과 편견에 깊이 물들어 있다. 그런 점에서 객관적 사실은 없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실학>은 法이 아닌 相이다. 쇼펜하우어식으로 말하자면, 실학이라는 <표상>은 식민사관의 <공포>와 근대화의 <욕망>이라는, 즉 <의지>의 <산물>이다. 의지가 없다면, 혹은 의지의 방향이 다르다면, 그때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요컨대, 실학의 관점이 아니어도 조선 후기를 볼 수 있다. 물론, 그것 또한 선택되고 해석된 것이겠지만, 만일, 우리가 객관적 法, 혹은 <물 자체>를 볼 수 없다면, 전혀 다른 주관들과 해석들을 통해 역사 해석의 일면성의 지배를 제어하고,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열어놓아야 한다. 실학이라는 일면성의 해석을 유보하고 변명을 그친다면 거기 새로운 천지가 펼쳐질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래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는 시절을 살고 있다.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었고, 눈부시게 빠르게 이룩한 근대화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시대는 근대의 극단에서 그 폐해인 생태와 소외를 넘어 탈근대의 가치를 모색하는 시대로 전환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근대가 낡고 있으므로 실학 또한 시들한 이념이 아닌가. 아 참, 잊었다. ‘실학’에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산업화와 성장과 더불어 짙어진 ‘그늘’에 있던 사람들이 민주와 평등을 열망하면서 ‘실학’에 또 다른 목소리를 부여했던 것이다. 산업화의 요청은 실학에 ‘과학’과 ‘기술’을 말하게 했고, 在野의 저항적 요청은 실학에서 ‘민주’와 ‘민중’을 찾아 읽었다. 󰡔牧民心書󰡕 권8 簽丁에 있다. “哀絶陽” 蘆田少婦哭聲長 갈밭 마을 어린 아낙, 통곡소리 질펀하다 哭向縣門號穹蒼 관아에 대고 울부짖는 소리, 하늘까지 울리네 夫征不復尙可有 전쟁터에 보낸 남편들, 더러 못 돌아온 안타까움은 있었지만 自古未聞男絶陽 내 아직, 남자가 자신의 성기를 잘랐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舅喪已縞兒未燥 시아버지 3년상 치른지 오래고, 갓난 새끼는 아직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三代名簽在軍保 三代의 이름이 몽땅 군적에 올라 있네 薄言往愬虎守閽 살펴 달라 읍소해도 범같은 문지기가 가로막고 里正咆哮牛去皁 집달리 성질 부리며 내 소 끌고 가버렸네 磨刀入房血滿席 칼 갈아 방에 들어가더니, 피가 온 자리에 그득하네 自恨生兒遭窘厄 “내가 이 물건 때문에 이런 곤욕을 당하지!” 蠶室淫刑豈有辜 蠶室의 궁형 받은게 무슨 잘못이 있었으랴 閩囝去勢良亦慽 閩 땅 거세 풍습도 그 또한 슬픈 일인 것을 生生之理天所予 생명을 이어감은 하늘이 내게 준 소명이고 乾道成男坤道女 남녀의 일은 하늘과 땅의 길인데 騙馬豶豕猶云悲 불 까고 거세한 말돼지도 보기에 애달픈데... 況乃生民思繼序 하물며 후손을 잇고 싶은 生民들이야 오죽하리 豪家終歲奏管絃 부유하고 권세있는 집은 해도록 풍악과 잔치를 벌이면서 粒米寸帛無所捐 한 톨 곡식, 베 한 조각도 내놓지 않는다네 均吾赤子何厚薄 이 땅의 백성들 모두 같은 자식인데 이렇게 달리 대접할 수 있는가 客窓重誦鳲鳩篇 객창에 하릴 없이 앉아 鳲鳩篇을 다시 읽는다. *“이 시는 嘉慶 계해년(1803년) 가을, 내가 강진에 있을 때 지었다. 갈밭에 사는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군적에 등록되고, 관리가 소를 빼앗아 갔다. 그 백성이 칼을 뽑아 자기의 생식기를 스스로 자르면서,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당했다’고 말했다. 그 아내가 잘린 물건을 가지고 관가에 가니, 그때까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아내가 울며 호소했지만 문지기가 막아버렸다. 내가 듣고서 이 시를 지었다.” 此嘉慶癸亥秋, 余在康津作也. 時蘆田民有兒生三日, 入於軍保, 里正奪牛, 民拔刀自割其陽莖曰, 我以此物之故, 受此困厄. 其妻持其莖, 詣官門, 血猶淋淋, 且哭且訴. 閽者拒之. 余聞而作此詩. 산업화와 근대화의 성공, 민주화의 일정한 성취가 이루어진 지금, 실학을 외치던 목소리는 가라앉고, 그와 더불어 전통과 유교를 둘러싼 다양한 담론과 정보들이 棼興하고 있다. 이제, 기존의 '변명'이나 '위안'으로서의 실학은 잊고, 유교 자체에, 탈이념적으로, 선입견 없이, 컨텐츠로 접근해야 한다. 쇼펜하우어가 칸트의 저작을 두고 한 탄식: “평가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해하기는 정말 어렵다.” 유교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유교는 하나의 이름이 아니다.” 조선의 주자학이 증거하고 있듯이, 주자학 또한 단일한 체계가 아니라 자신 안에 수많은 유형들을 품고 있는 ‘우산’ 혹은 ‘둥지’같은 것이다. 거기에는, ‘아직 오지 않은 유학’까지 있다. 오지 않은 유학은 유학의 최소한 위에 서 있을 것이라Minimalist Confucianism, 안심해도 좋다. 유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그것은 얼마나 다행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