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응 스님은 불교계에서도 ‘가장 눈 밝은 스님’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선방에서 평생토록 지내온 스님들은 눈이 밝다기보다는 맑은 쪽에 가깝다. 눈이 밝은 이들은 스님이나 속인을 막론하고 대체로 세상에 대한 뚜렷하고 폭넓은 시야를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94년 종단개혁 당시 개혁회의 기획실장을 맡으며 현재 조계종단의 큰 틀을 짰으며, 이후 조계종 기획실장, 해인사 주지 등 굵직한 자리들을 거치면서 종단의 주역으로 활동해온 현응 스님은 최근에는 교육원장을 맡아 취임한 지 두 달 만에 조계종 승가교육의 대변혁을 예고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현응 스님의 철학과 사론이 담겨있는 책 <깨달음과 역사> 개정판이 출간됐다. 이 책은 원래 1990년에 출간됐다 절판됐지만, 최근까지 강원의 학인들이 복사본을 만들어 돌려볼 정도로 줄곧 회자되던 책이다.

<깨달음과 역사>의 개정판 출간은 책에 담긴 현응 스님의 사유와 주장들이 조계종 안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의미한다. 더구나 교육을 통한 승가의 개혁을 시도하고 있는 현응 스님의 철학이 담겨있는 책이기에 현 시점에서 더욱 생명력을 부여받은 책이라 하겠다.

현응 스님은 “이 책은 내가 평소에 갖고 있던 사유들을 풀어낸 것으로, 조계종 승가교육 속에 이같은 내용들을 녹여가고 싶다”며 “이번 기회를 통해 여러분들에게 내 생각들을 검증받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처음 이 책을 받아들었을 때, 책 제목이 <깨달음의 역사>가 아닌, <깨달음과 역사>라는 사실이 매우 의아스러웠다. ‘스님=불교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선입견이 아마 그런 의아한 마음을 일으켰던 것 같다.

이 책을 관통하는 두 가지 키워드는 제목에 담긴 그대로 ‘깨달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과, ‘불교는 살아있으며 시시각각 변화·발전하고 있는 유기체’라는 것이다.

<깨달음과 역사>는 ‘보디사트바’라는 단어를 현응 스님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산스크리트어에서 보디사트바는 보디(붓다)와 사트바(중생)을 합친 말로, 우리말의 ‘보살’에 해당된다. 현응 스님은 석가모니 대신 깨달음을, ‘인격체로서의 보살’ 대신 역사라는 광범위한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사트바’를 중생 대신 ‘역사’로 해석했다는 점이다. 중생들의 시시각각 변화하는 마음, 수천 수만년간 쌓아온 중생들의 공업(共業), 그 거대한 유기체를 역사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대승(大乘)의 또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현응 스님은 이에 대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중생을 보살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역사적인 의미가 담길 때 대승불교가 된다. 누구나 사트바의 경계에서 살고 있다. 막시즘을 추구하는 이들을 막시즘사트바라고 한다면, 신을 추구하는 이들은 가디즘사트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세상을 가장 적극적이고 자유로우며 뜨거운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보디사트바’라는 것이 이 책의 요지다”라고 말했다.

스님은 책 전반에 걸쳐 ‘깨달음’에 대한 현대인들의 오해를 지적하고 있다.

“나 역시 어려서는 깨달은 자가 초인적인 능력을 얻게 되어 과거·현재·미래의 일을 내다볼 수 있고 물 위를 걷고 하늘을 날 수 있으리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역사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는 불교 안에 개인의 삶은 물론 사회와 민족 등의 모든 문제를 사회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원리와 법칙, 그리고 그에 따른 실천방식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어느 때인가 나는 이러한 여러 유형의 생각들이 ‘깨달음’과 ‘역사’의 문제에 대한 혼돈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깨달음의 세계’와 ‘역사에서의 변화와 발전의 문제’는 서로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이 부분에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깨달음이란 삶의 영역이 공(空)임을, 비실재(無我)임을, 가설적이요, 환상적임을 깨닫는 일이다. 역사의 세계는 존재의 실재를 잠정적으로 인정하고 그를 바탕으로 존재의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일이다. 깨달음과 역사의 변증법적인 통일구조는 삶이 환상임을 깨달은 토대 위에서, 그리고 사회적 문제는 그것들의 역사의 검증으로 도출된 방편바라밀을 통해 해결해 나가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깨달음과 역사의 조화로운 삶의 모습이야말로 ‘열린 보살’의 역사적인 삶으로서, 그것은 환상적인 삶이 환상적인 세계를 구현해 나가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을 일러 불국토 청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20년전 <깨달음과 역사>를 통해 ‘붓다의 진리’와 ‘중생들의 공업의 산물인 역사’가 함께 나아가는 길을 모색해온 현응 스님은 이제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불교는 변하는 것이고, 시대의 변화에 부응해가야 한다는 명제를 조계종의 교육개혁으로 현실화시킬 직전에 와있는 것이다. 이상주의자의 고민이 현장에서 얼마나 힘을 발휘할 것인가, 그 성공여부에 조계종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다.

이 책의 또다른 묘미는 마지막 6장에 실려있는 ‘젊은 날의 단상’이다. 편집자가 거의 우격다짐을 하여 넣게 되었다는 6장에는 책의 전체적인 내용과는 색깔이 조금 다른, 현응 스님의 문학적 감성들이 물씬 풍겨나는 글들이 담겨있다.

가야산에서 불어오는 봄바람과 헤르만 헤세의 소설 <지와 사랑>의 골드문트를 동경하던 20세의 열혈청년의 월담기, 비행기 안에서 본 헐리우드 영화 ‘Defending your life’에서 발견한 불교적 세계관, 하와이 해변 야자수 아래에서 블루 하와이를 마시며 오랜 벗과 나눈 이야기들이 ‘젊은 날의 단상’에 담겨있다.

이 내용들은 얼핏 보기에는 책의 주제와 무관해 보이지만, 사실상 <깨달음과 역사>에 방점을 찍는 이야기들이라는 것이 기자의 생각이다.

보살도를 향해 나아가는 한 수행자의 삶의 단상들은 그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좋은 나침반이 된다. 아마, 그 수레에 함께 올라타고 새로운 불교,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자는 의미를 전하기 위해 스님은 그 쑥스러운 ‘월담기’를 공개한 것이 아닐까.

현응(玄應)스님은

1955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다. 불교에 인연이 있어 1971년 해인사로 출가해 종성(宗性) 화상을 은사로 수계했다.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하였고, 민족문화추진위원회의 국역연수원에서 수학하다가 봉암사, 해인사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하기도 하였다.

해인사승가대학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불교단체(대승불교승가회, 선우도량, 실천불교승가회 등)를 결성하여 활동했으며 사찰과 종단 소임을 역임했다(총무원 기획실장, 중앙종회의원, 불교신문사 사장, 해인사 주지).

현재는 조계종 교육원장으로 선출되어 재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