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그 어느 것 하나도 거저 주어지는 것이 없다. 모든 것들은 원인이 있으므로 반드시 결과가 있다. 이는 부처님을 비롯해 수많은 현자들이 깨우친 가장 단순하고 보편적인 우주의 법칙이다.

9월 9일 서울 마포 다보빌딩(대한불교진흥원) 3층 다보원 법당에서 열린 한 세미나를 경청하면서 다시 한번 그 진리가 확인되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도 당연시 해온 것들, 재가자인 우리가 쉽게 선방 문턱을 드나들 수 있고, 누구나 손만 뻗으면 팔만대장경의 요체들을 쉽게 접할 수 있으며, 생활수행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는 사실을 그동안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누군가 21세기를 살아갈 후대를 위해 그 문턱을 낮추고, 불서를 번역했으며,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불교계에 희사하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한 이들이 있었다. 이 사실을 세미나를 통해 확인했을 때 ‘세상은 정성과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다시한번 가슴을 내리쳤다.

불교 교단은 흔히 사부대중의 공동체라고 일컬어진다. 하지만 불교의 역사는 철저히 스님들의 역사였다. 사람들은 부처님과 그의 10대 제자들, 그리고 인도와 중국, 한국의 고승들을 조명하고 그들의 법을 찬탄한다. 그러다보니 사부대중 가운데 비구와 비구니의 이부중만 우뚝 존재할 뿐, 교단을 위해 공양물을 올리고 정성과 신심을 다해 뒷받침해온 재가불자들의 노력은 항상 그늘에 가려져왔다.

하지만 부처님 당시에도 유마거사라는 수승한 재가불자가 존재했고, 빔비사라왕이나 기타태자 같은 대화주가 승단을 보호했으며, 수행을 통해 아라한과를 이룬 수많은 재가자들이 불교를 지탱하는 커다란 버팀목으로 역할해왔다. 역사적으로 볼 때 건강한 승가가 유지되면 반드시 건강한 재가자들이 늘어났으며, 우수한 재가자들이 많을수록 승가 또한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이는 한국 근현대 불교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불교학을 하나의 학문적 체계로 정립한 불교학자들이 있고, 재가신도들에게 시민선방을 열고 참선을 지도해온 법사들이 있으며, 그리고 자신이 평생토록 모은 사재를 털어 법당을 짓고 불교방송국을 개국한 이도 있었다. 그들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우리는 절집 언저리를 빙빙 돌며, 다음 생에는 불법을 제대로 만나게 해달라며 빌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속세에 머물면서 어느 누구보다도 불교와 교단의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한국불교의 위대한 재가불자를 조명하는 세미나가 열렸다. 대한불교진흥원(이사장 민병천)은 9월 9일 오후 2시 다보빌딩 3층 법당에서 ‘한국불교를 빛낸 재가불자 3인을 조명한다’는 주제로 발표회를 개최했다. 이날 발표회에서는 대한불교진흥원을 세운 대원 장경호 거사, 한국불교학의 기틀을 마련한 혜안 서경수 교수, 보림선원을 통해 수많은 재가수행자를 배출해낸 백봉 김기추 거사를 집중 조명했다.

'장경호 거사의 대원불교운동'을 발표한 김재영 동방불교대학 교수는 장경호 거사의 삶을 ‘대원불교운동’이라고 명명했다.

김 교수는 “장경호 거사의 행적은 한 개인의 보살행을 넘어 근대적인 재가운동의 지평을 확장하고 그 질적 비약을 초래한 ‘하나의 운동’으로 평가돼야 한다고 생각해 대원불교운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장경호 거사의 수행은 생활선과 나눔을 기저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경호 거사는 일본에서 귀국한 뒤 통도사 구하 스님으로부터 '만법귀일 일귀하처'라는 화두를 받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선수행을 계속했다. 장경호 거사는 산사 중심의 의식과 기복에 치우친 소극적 관념적 무사안일주의에서 벗어나 불교를 민중들의 삶의 현장으로 끌어내고자 했다.

김재영 교수는 “장경호 거사가 1974년 불교계 최초의 시민선방을 개설한 것은 거사의 선사상의 취의를 들어낸 것”이라며 “참선을 산사의 선방에서 시민들의 삶의 현장으로, 기업인들의 사업현장으로 끌어내어 생활선, 노동선, 기업선으로 활선화(活禪化)하겠다는 원력을 세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어 “장 거사는 열심히 벌고 인색하리 만큼 절약 저축하였지만, 나누는데는 결고 인색하지 않았다”며 “자신의 전재산을 불교발전과 사회적 실천을 위해 내놓은 것은 진정한 보살행”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1960∼70년대 승단의 분파와 폭력적 종권투쟁으로 인해 불교계가 치명적 위기를 맞이한 상황에서 자생적으로 펼쳐지고 있던 광범위한 재가불교운동,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평생을 바쳐 추구해온 장경호 거사의 생활선과 나눔의 수행정신, 그리고 거사의 개혁의식은 대원불교운동을 접화시킬 수 있는 주체적 조건으로 작동했다”며 “새로운 전환을 갈망하는 시대적 요구와 장 거사의 수행정신 및 개혁적신이 하나의 역동적인 에너지로 융합하면서 대원불교운동은 새로운 희망의 기폭제로서 탄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했다”고 평했다.

이날 두 번째 발표인 서경수 교수의 삶을 조명하기로 한 이민용 영남대 교수가 병환으로 참석을 하지 못함에 따라 이용부 전 문공부 종무관(대한불교진흥원 이사)과 김규칠 대한불교진흥원 상임이사가 대신 ‘내가 만난 서경수 교수’를 주제로 발표를 했다.

서경수 교수의 제자이기도 한 이용부 전 종무관은 “1986년 9월 24일이 86아시안게임이 개회되는 날이었는데, 그날 서경수 교수가 전화를 해 개막식 빵빠레가 울리니까 미영이(서 교수 미망인)한테서 애가 나왔다면서 막내딸이 태어난 사실을 알려주었다”며 “그로부터 딱 20일이 지난 뒤 인도철학과 졸업사진을 찍으러 가다가 도로에서 사고가 나 유명을 달리했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 전 종무관은 “서경수 교수는 근대불교100년사 편찬책임을 맡는 등 근대 불교연구의 틀을 제시한 불교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이한상 거사가 불교신문을 처음 주간지로 발행했을 때 주필로 활동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종립학교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불교 교과서를 만드는 사업을 총괄한 분이었으며, 삼보법회와 삼보학회를 창립하는데 기초를 세우고, 대학생불교연합회를 결성해 대학생들을 직접 이끌고 다니면서 길을 제시한 분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전 종무관은 이어 “대학생들에게 일본불교를 체험시키고, 일본 학생들을 한국으로 데려와 한국학생들과 유대관계를 맺도록 했다”며 “또한 당시에는 스님이 공부를 많이 하면 속퇴한다고 생각해 제자들에게 공부를 안시키는 것이 절집 풍토였는데, 서경수 교수를 비롯해 이기영, 박성배 교수 같은 분들이 큰스님들께 '한국 불교계에도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진언하여 많은 스님들이 종비생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고 전했다.

이 전 종무관은 또 “한번은 레포트를 안냈다고 야단을 치길래 부처님이 무슨 레포트 같을 것을 썼느냐고 대들었더니 다음날 교실에 들어가자 서 교수님이 다른 학생들에게 ‘저기 부처 온다’라고 농담을 한 적도 있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서 교수는 진정한 불교학자이기도 했지만 위트 넘치는 참으로 멋있는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마이크를 건내받은 김규칠 상임이사는 “대학생 시절 불교장학생 시험을 볼 때 면접관으로 만난 것이 서경수 교수와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며 “그 분은 젊은 학생들에게 역사적 사료로서의 사찰뿐만 아니라 수행 현장으로서의 사찰, 스님, 재가불자를 상당히 강조했던 분”이었다고 말했다. 김 이사는 이어 “서 교수는 불교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했다”며 “그분의 문제의식이 현대 한국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김 이사는 또 “한번은 칠판에 공(空)이라는 한 글자만 써놓고 아무런 말도, 아무런 설명도 없이 1시간여 강의가 끝난 적이 있었다”며 “구구하게 설명하지 않고 번뜩이는 선적 지혜로 나타내셨던 분”이라고 평가했다. 김 이사는 “서경수 교수가 제기한 한국불교의 문제점은 아직 그대로 한국불교계에 남아있다”며 “그분이 제시한 이 시대의 과제는 아직도 우리에게 문제의식으로 던져져 있다”고 지적했다.

‘새로운 생활수행을 주창한 김기추 거사’는 김 거사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김광하 작은손길 대표가 발표를 맡았다.

김광하 대표는 “대학 졸업후 직장생활을 하다 1978년 백봉 선생이 계시던 부산 보림선원에 입주를 했고, 여기서 1년반 동안 선생을 가까이 모시면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백봉 거사와 청담 스님의 짤막한 일화를 소개했다. 청담 스님이 “백봉, 머리 깍읍시다”라고 하자, 백봉 거사가 “나는 재가로 있을랍니다”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김광하 대표는 “백봉 선생은 깨달음을 이룬 뒤에도 속가에 머물면서 재가자들에게 불교를 가르치는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며 “이는 일제강점기부터 유신시대까지 우리 민족이 겪었던 갈등과 모순을 불교적인 진리로 끌어안고 극복하고자 했던 선생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이어 “백봉 선생은 재가불자가 전통적인 화두수행을 하기 어렵다는 사실에 착안해, 재가불자의 수행현실에 맞는 새로운 화두(새말귀)를 창안하기에 이르렀다”며 “선생이 창안한 새말귀에는 전통적인 선의 가르침과 보살의 행원이 함께 담겨있다”고 설명했다.

새말귀 수행법은 형식은 화두이지만 행주좌와에서 일념으로 화두를 드는 수행과 달리 재가자가 생활 속에서 시간이 날 때 여김(念)을 일으키는 수행방식이다.

김광하 대표는 “백봉 선생은 스스로 ‘앉은뱅이 부처는 없다’라고 말하며, 재가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좋은 방편을 찾아내는 노력을 한 순간도 그치지 않았다”며 “백봉 선생이야말로 유마거사의 행을 몸소 실천하신 진정한 수행자였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