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비구니 계맥은 유지돼 왔다. 조선시대 감로탱화에 묘사된 비구니와 식차마나(비구니계를 받기 전의 여승)의 모습은 조선시대 비구니 계맥이 지속돼왔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또한 조선의 비구니들은 직접 법고를 치고 의식을 집전하는 등 작법승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도성내 양반집 부인들과 산중사찰을 연결하는 중간 역할을 하면서, 불교교단 내 상당히 비중있는 존재로 활약했다.”
8월 28일 열린 서울대 신양관에서 열린 제2회 규장각 한국학 국제심포지엄에서 ‘조선 비구니의 가시성·시각성·생명력: 감로도 속 여승의 도상’를 발표한 이향순 조지아대 교수는 조선시대에도 비구니 계맥이 꾸준히 유지돼왔으며, 비구니의 역할 또한 교단 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 교수는 또 “순천, 승주 지역에 전해오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을 도운 세 명의 비구니에 대한 전설은 일반인들이 비구니 승가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며 “이 환상적인 이야기 속에는 국난을 거치면서 지배층의 무력함에 절망한 민중들이 조선 유교사회에서 가장 타자성이 강한 비구니에게서 구세자의 이미지를 찾고자했던 절실한 심정이 담겨있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조선시대 비구니의 계맥을 문헌상으로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로 삼국시대부터 고려대까지 이어져오던 비구니 계맥이 조선시대에는 끊어졌을 것으로 추정해왔다. 또한 비구니들은 법고를 치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등 작법승으로는 역할하지 않고 승단의 보조적 역할에 그치고 있었다는 것을 통설로 받아들여왔다. 하지만 이향순 교수는 조선시대 감로도와 조선왕조실록의 정업원 관련 기사 등을 근거로 이같은 통설이 사실과 크게 다르다고 지적했다.
이향순 교수가 특히 주목한 점은 조선시대 감로도 속에 등장하는 비구니와 식차마나의 모습이다. 감로도(甘露圖)란 중생들에게 감로와 같은 법문을 베풀어 해탈시킨다는 의미의 불화로, 일반적으로 사찰의 영가단에 봉안된 신중도를 의미한다. 현존하는 60여점의 감로도 가운데 약 28점에 비구니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비구에게는 수염이나 수염자국을 그리는 대신 비구니는 매끄러운 피부를 그대로 묘사하거나 두건을 쓴 모습으로 표현함으로써 여승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또 일부 감로도에서는 비구니 혹은 식차마나라고 직접 기입함으로써 비구니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 교수는 “감로도에 식차마나가 나온다는 것은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던 한반도의 비구니계맥이 조선에 들어와서도 유지됐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며 “물론 이 도상이 식차마나의 존재를 입증하는 직접적 증거는 아니지만, 적어도 식차마나 도상은 조선의 승가가 수계 단계상 구속력이 가장 적은 단계에 대해서까지도 의식하고 있었고, 그 의식이 불화 조성에도 영향을 끼쳤음을 말해준다”고 주장했다.
감로도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조선시대 불교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감로도에는 조선시대 민중들이 신앙했던 불보살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유로 죽음을 맞이한 일반 민중의 모습, 또 그 의식을 집전하던 스님들의 모습이 그림의 형태로 생생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제2회 규장각 심포지엄의 제3세션 ‘조선사회의 도상적 기록으로서의 감로탱화’에서는 감로도를 주제로 한 다섯 편의 논문이 발표돼 조선시대 감로도에 담긴 다양한 사회상들이 제시됐다.
감로도는 7여래를 묘사한 상단과 스님들의 예불 모습을 표현한 중단, 그리고 일반 민중들의 모습을 묘사한 하단 등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민중들의 모습이 묘사된 하단 부분이다. ‘조선시대 감로탱화 하단장면과 사회상의 상관성’을 발표한 조계종 기획국장 미등 스님은 감로도 하단 부분에 등장하는 민화적 요소에 주목했다.
감로탱화 하단에는 떠도는 영혼들의 모습이 다양하게 표현돼 있다. 미등 스님은 조선시대 감로탱화 하단의 표현 형식을 크게 다섯가지로 구분했다.
첫 번째는 생업을 잃고 유랑하던 삶과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간 처절했던 삶이고, 두 번째는 장시와 관련돼 도둑, 시장에서의 싸움과 도박의 폐단 등이 드러난 것이며, 세 번째는 조선후기에 증가하는 연희패의 모습, 넷째 주인과 노비간의 갈등 모습, 다섯째는 조선시대 형률과 관련, 특히 간통사건과 관련해 민간에서 적용하던 체벌 방법과 내용들이다.
이에 대해 미등 스님은 “조선시대는 원혼과 고혼을 위해 수륙재와 여제(厲祭) 등의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었는데, 감로탱화 하단에는 여제에서도 다루어지지 않는 내용까지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다”며 “이는 불교가 민중과 함께 호흡하고 민중의 아픔을 치료하고자 했던 모습인 동시에 억불정책으로 불교가 어려웠던 시기에 종교적 생명력을 이어올 수 있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19세기 감로도의 인물상에 보이는 새로운 양상’을 발표한 국립경주박물관 김승희 연구원은 19세기에 들어 감로도에 나타나는 변화에 주목했다.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억울하게 죽은 영혼이나, 아귀, 지옥의 모습이 등장하던 하단의 그림들이 19세기 이후에는 김홍도의 풍속화를 연상시키는 장면으로 대체되고 있다. 김 연구원은 “그동안 하단을 주름잡던 어두운 죽음의 외피는 이제 왁자지껄한 시장과 유흥 등 발랄한 삶의 도상으로 바뀌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는 종루를 중심으로 한 저잣거리의 상인들과 봇짐장수, 행상, 말장수, 닭장수, 게장수, 도둑 등 다양한 군상들이 등장한다. 또한 죽음을 표현하는 그림 또한 <삼국지연의>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삽화류의 그림으로 변화하고 있다. 특히 각종 제물을 성대하게 차려놓고 굿을 치르는 모습은 점차 규모가 커져가는 무속의례를 반영하며, 무녀의 모습 또한 공작모를 쓰고 요령과 부채를 흔들면서 화려한 몸짓으로 굿판을 이끌어가고 있다.
19세기 감로도의 또 한가지 특징은 감로도 중단에 해당되는 재단 부분에 그 전까지 볼 수 없었던 청동향로와 대형 항아리 및 받침대, 그리고 연꽃과 모란을 장식한 모습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김 연구원 “18세기 후반 경화사족들로부터 부유한 중인층까지 널리 유행했던 골동이나 원예취미가 늦게나마 불화에 반영된 것”이라며 “대형 항아리에 꽂힌 화려한 꽃 장식은 당시 민간에서 유행한 민화풍의 기법”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조선시대 감로도는 불보살에 대한 예경의 표현을 넘어서는 세계를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는 조선시대 승가의 모습이 담겨져 있고, 또 한켠에는 민중들의 괴롭고 고단한 삶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당대 문인들의 미적 취향까지 포함돼 있다.
감로도에서 또 한가지 주목되는 점은 불보살과 승려들의 의식모습은 점차 간소화되는 반면 민중들의 모습을 표현한 하단부의 영역이 점점 넓어지고 상세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조선시대 불교가 중생들의 삶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간 민중불교의 흔적인 동시에 억불시대 조선 불교를 지탱한 생명력이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