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걸음만 더 내딛으면 이별이다. 아버지는 딸을 떠나야만 하고 딸은 아버지를 보내야만 한다. 그런데 잡을 수 없다. 딸은 그저 사라져가는 아버지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불러줄 뿐이다. 무슨 운명의 장난이냐 하겠지만 거울에 비친 우리네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 떠나야 하고 떠나보내야 한다.
극단 양지무리(대표 남우성)가 9월 19일 막을 올리는 연극 ‘아버지의 가수’가 보여주고자 하는 우리들 삶의 모습도 이러하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다홍치마 두른 냥 풍요로운 삶을 바라며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삶의 끝에서 우리는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눈물짓는다. 왜 우리는 삶의 끝에서야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인지.
연극의 주인공 한세호는 무명작가다. 딸을 얻는 대신 아내를 잃은 슬픔을 간직한 가장이다. 슬픔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한세호는 언제나 아내에게 무관심했고, 자신의 일에만 매달려 살았다. 급기야 아내는 병을 얻었지만 남편을 위해 함구했다. 그리고 딸을 출산한 뒤 목숨을 잃게 된다. 그때서야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지만 소용없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우리는 삶의 끝에 섰을 때 비로소 뒤를 돌아보기 때문이다.
한세호는 늦은 후회 속에서 점점 자신을 잃고 방황한다. 그를 지탱해주는 것은 술과 아내가 즐겨듣던 이미자의 노래뿐이다.
딸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다. 슬픔을 느낄 어머니에 대한 기억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바라보며 성장할 뿐이다. 다행히 딸은 오페라 가수를 꿈꾸는 멋진 숙녀로 성장했다. 아버지이지만 아버지의 모습을 잃어버린 아버지를 볼 때면 그녀는 눈물을 쏟곤 한다.
아내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업을 평생 짊어지고 사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이야기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 함께 살지만 위태로운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꿈을 접고 악극 가수가 되어 마지막 노래를 선사하는 딸의 모습은 가족의 희망이기도 하다.
마지막 노래를 불러주는 딸의 모습을 보며 한세호는 아내의 포근한 환영 속으로 사라진다.
극은 가족의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만남은 헤어짐의 또 다른 표현임을 일러주고,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업을 쌓으며 살아가는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드러내지는 않아도 업, 연기 등 불교의 사상이 곧 우리 삶의 곳곳에 스며있음을 알려주며 자기 성찰의 기회를 만들어준다.
남우성 대표는 “‘아버지의 가수’를 통해 가족 구성원의 사랑의 결핍, 애증, 욕망 속에서 잠시나마 업경대에 자신을 비춰보는 시간을 갖게 되길 바란다”며 “이번 공연은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극단 양지무리는 불교 사상을 문화예술작품으로 표현하는 문화단체로 2008년 불교연극 ‘매혹-회암사의 눈물’을 공연했으며, 문화예술 공연에 불교의 사상을 결합시키는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사실 이번 작품은 사재를 털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불교연극을 추구하고 있는 남우성 대표의 간절한 발원이 담긴 역작이다. 목탁과 승려가 출연해야만 불교연극인 줄 아는 불교계의 문화수준이 한 단계 높아져야 한다며, 어려운 길을 택한 남 대표에게 불자들의 표 한 장 구매는 큰 힘이 될 것이다.
연극 ‘아버지의 가수’는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에서 9월 19일 오후 4시 개막해 9월 23일까지 공연이 이어진다. 공연시간은 매일 오후 4시와 7시 30분 두 차례다. 문의 : 극단 양지무리 (011-9044-40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