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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스님과 나는 오후 4시쯤에 남경 국제공항을 나와서 바로 택시를 불러 무호시蕪湖市로 가고 있었다. 나는 특별히 무호시를 찾아갈 이유는 없었으나 고현스님의 일정을 따르고 있었다. 고현 스님은 무호시 광제사廣濟寺 주지에게 무언가를 부탁한 듯했다. 아마도 지장스님과 관련된 무엇이 아닐까 하고 짐작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나의 관심사는 천년 전 지장스님이 신라에게 가지고 간 금지차의 형태적 특성을 살펴보고 차의 성분을 분석해보는 것이었다. 물론 대원사에 중국의 구화산에서 가져와 기르는 금지차의 잎을 이미 본 적이 있지만 현지에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삼국사기』에 신라 흥덕왕 3년(828)에 사신 김대렴이 중국에서 차씨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어 성행하였고, 차는 이미 선덕여왕(632~647)때부터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으나 지장스님이 신라의 금지차를 중국으로 가져가 구화산에 퍼뜨렸다는 얘기는 몹시 흥미로웠다. 그렇다면 지장보다 먼저 태어난 고승들인 원광이나 자장, 원효 등이 수행하면서 마신 차가 혹시 토종 금지차가 아닐까도 싶은 것이었다.
금지金地는 김지장이 심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일 터이고, 1699년경에 중국의 유원장이 지은 『개옹다사介翁茶史』에는 공경차空梗茶란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구화산에는 공경차가 있는데 이는 김지장이 심었다(九華山有空梗茶 是金地藏所植).
대체로 안개와 구름이 끼어 기후는 늘 온윤하고 구화산에 심은 바 맛이 자연의 것과 같지 않았다(大抵煙霞雲霧中氣常溫潤餘地植味自不同).
공경이란 말 그대로 줄기가 대나무처럼 비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리라. 『구화산지』에는 금지차란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줄기는 가는 대처럼 속이 비어 있다(梗.空如筱).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지장이 들고 온 차씨였다고 한다(相傳金地藏유來種).’
고속도로 저편으로 석양이 뿌연 황사속에서 기울고 있었다. 이따금 장강長江이 고속도로 가까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날은 금세 어두워지려 하고 있었다. 나는 시가지 한복판에 있다는 아름다운 경호鏡湖와 무호시 유적들을 보고 싶었으나 땅거미가 지면 허사가 될 것이므로 오전 비행기를 타고 올 것을 하고 후회했다.
“광제사에는 몇시쯤 도착하겠습니까?”
“5시가 조금 넘을 것 같습니다. 절문을 닫을 시간이지만 공항에서 전화해두었으니 매표소 사무실 문으로 들어갈 수는 있습니다.”
나는 고현스님이 무슨 이유로 서둘러 광제사로 가고 있는지 궁금하여 참지 못하고 물었다.
“스님, 광제사에서 급하게 볼일이 있습니까?”
“급한 것은 아닙니다만, 아주 어렵게 약속을 받아낸 것이 있습니다.”
“지장스님과 관련된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고현스님은 더 이상 밝히지 않았다. 약간 초조한 듯 이맛살을 가끔씩 찌푸렸다. 광제사는 지장이 구화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동안 수도를 한 곳이었다. 말하자면 지장이 은둔지를 찾아 탐색하여 잠시 머물던 절이었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지장이 잠시 머물렀다고 해서 광제사 일대의 언덕인 자산 서남쪽을 소구화소구화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문득 나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지장이 잠깐 동안 머물렀던 광제사, 광제란 지장보살의 서원인 광제중생廣濟衆生의 준말이 아닐 것인가.
나는 널리 중생을 구제한다는 광제사의 뜻보다 ‘잠깐 동안’이란 기간 때문에 소리치고 있었다. 차씨는 보통 2년 안에 심어야 싹이 튼다는 얘기를 국내에서 차 재배자에게 들었던 것이다. 건조한 상태에서 오래되면 두꺼운 껍질 안의 수분이 말라 발아되기 전에 죽기 때문이었다. 물론 볍씨 한 알이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발아된 예외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식 밖의 얘기였다.
-그렇다면
지장이 구화산으로 가지고 간 차씨는 적어도 2년안에 심었다는 추정이 가능했다. 지장이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견당사를 따라 장안으로 들어갔다가 명산을 순례하고 당시 고승들을 친견한 후 구화산으로 왔다는 행로는 차씨를 통해서 볼 때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긴 행로로 몇 년에 걸쳐서 구화산으로 왔다면 이미 차씨는 죽어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장이 구화산으로 들어간 행로는 최단 거리인 ‘양주-무호-지주-구화산’의 코스가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고현스님이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있습니까?”
“지장스님이 바랑에 넣어 가지고 간 차씨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차를 연구하는 임 박사님답습니다.”
“지장스님이 구화산으로 들어간 코스의 비밀은 차씨에 있습니다.”
고현스님은 공항에 내려 무호시로 가고 있는 동안 처음으로 웃었다.
“하하하. 부처님은 하나의 물방을 안에 우주가 들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임 박사님은 한 알의 차씨 안에 지장스님의 비밀이 들어 있다고 하는군요.”
“스님 제 추리는 간단합니다. 차씨는 적어도 2년 안에 심어야 싹이 틉니다. 그렇다면 지장스님이 신라에서 가지고 온 금지차도 2년 안에 심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장스님은 신라에서 구화산까지 2년 이내에 도착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신선한 추정입니다. 한 알의 차씨를 통해서 행로의 기간을 추정하는 얘기는 처음 듣습니다.”
택시는 강서성과 안휘성의 경계선에 있는 마안산시馬鞍山市를 넘어서고 있었다. 허공에는 새떼가 둥지를 찾아 날고 있었다. 우리가 가고 있는 무호시는 인구 50만 정도의 작은 도시였다. 오늘의 숙박은 광제사 부근에 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택시가 광제사에 도착했을 때는 석양의 잔광이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고현스님은 광제사 앞에 조성된 공원의 분수대 가운데에 있는 특이한 조형물을 사진 찍으려고 했지만 빛이 미미하므로 셔터가 작동되지 않았다. 라이트를 터뜨려야 할 정도로 어두웠다. 나는 어이가 없어 한마디 했다.
“이것을 보기 위해 달려온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황당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고현스님이 보충설명을 했다.“지장이성금인(地藏利成金印)이라고 부릅니다. 당 숙종이 지장스님의 덕을 흠모하여 하사한 금인입니다.”
“고장 공원에 설치된 조형물을 보려고 서둘러 왔다는 말입니까?”
“물론 그건 아닙니다. 비밀의 장소에서 진짜 지장이성금인을 보러온 것입니다.”
“비밀의 장소라니요?”
“그건 나도 모릅니다. 공개한 적도 없고 반출을 극도로 제약하는 중국의 중점 문화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중국의 국보인 셈입니다.”
“그런 보물을 오늘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몇 년 만에 이루어진 성과입니다. 이곳 방장스님께서 안휘성 종교국장에게 가까스로 허락을 얻어냈다고 합니다.”
그제야 나는 그림자처럼 드러나 지장이성금인을 모델로 만든 조형물을 살펴보았다. 사각의 금인 상단에는 꿈틀거리는 용들이 새겨져 있고 상단 가운데는 뿔처럼 생긴 것이 삐쭉 솟아 있었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 더 이상은 자세히 볼 수 없었다. 나는 분수대 난간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바로 그 때 키가 아주 작은 단구의 승려가 달려왔다. 광제사 주지였다. 고현스님과는 친분이 두터운 모양으로 주지가 앞서 걸었다. 날이 어두우니 참배를 먼저 하라는 배려였다.
우리는 매표소 사무실 문을 통해 광제사로 들어갔다. 절의 가람은 언덕위로 계단 사이사이에 한 채 한 채 지어져 있었다. 여러 채의 법당을 지나 우리는 드디어 구화행궁구화행궁에 도착했다.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왔으므로 숨이 찼다.
여러 채의 법당을 그냥 지나쳤던 나는 비로소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마치 순국 선열에 대한 묵념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신라대각新羅大覺이란 편액 밑에는 오불관을 쓴 지장보살이 순국 선열처럼 늠름한 기상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신라대각.
두말할 것도 없이 신라인으로서 대각을 이룬 지장을 가리키는 편액이었다. 지장은 법당 안의 붉은 조명 속에서 드러나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눈길을 더 사로잡은 것은 그 옆의 지장스님 입상이었다. 지장이 구화산으로 들어가 지장보살이 되기 전의 모습인 수행자 상이었다. 입상은 지장이 젊은 수행자로서 광제사에 잠시 머물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유명교주幽冥敎主
나는 입상위에 걸린 액자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단 넉 자의 글씨지만 그 의미는 컸다. 마침내 수행자 지장은 광제사에서 구화산으로 들어가 보살도를 이룬 후 입적후 유명(저승)의 교주인 지장왕보살이 되었기 때문이었다.<계속>
글 정찬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