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의미에서는 역사는 기억이다. 불교의 유식에서 만법유식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면 없는 것이라는 의미다. 역사에 있어서도 이런 의미는 비슷하게 적용된다. 역사학에서는 기억보다 기록이 더 중요하다. 기록이 없다면 기억에 의지해야 하는데, 문제는 흐릿한 기억과 정확한 기억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역사에서 새로운 기록의 발견은 매우 중요하다.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고, 이것은 역사가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익산미륵사 석탑에서 사리봉안기가 발견됨에 따라 삼국유사 무왕조에 대한 시비가 생겼다. 명백한 명문인 사리봉안기가 발견되면서 미륵사 창건에 관한 기존의 인식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국경을 넘은 지순한 사랑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은 삼국유사 무왕조의 기록을 로미오와 줄리엣을 능가하는 서사로 받아들였다.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간직한 고장에서는 일종의 자부심 같은 것도 있었다. 이를 주제로 논문을 발표하거나 책을 쓴 수많은 학자가 작가들은 자신의 사학적, 또는 문학적 성과에 나름의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모든 것들이 미륵사를 창건한 주역이 선화 공주가 아니라 좌평 사택적덕의 딸임을 밝히는 명문의 발견으로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사리봉안기의 원문을 번역한 동국대 김상현 교수에게는 직간접으로 압력 아닌 압력이 밀려들었다. “김 교수, 절대로 선화공주를 죽여선 안 된다. 사리봉안기의 기록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삼국유사의 기록 또한 가치가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달라…” 등등.

역사학자이면서도 특이하게 설화와 신화가 가득 담긴 삼국유사를 공부해 이 분야의 대가로 인정받는, 또 사리봉안기를 처음 해석함으로써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김상현 교수가 이와 관련해 논란을 일소시키는 자신의 입장을 지난 1일 밝혔다. 삼성뮤지엄아카데미(SMA) 강좌에서 ‘백제 무왕의 왕후와 미륵사 창건’이라는 강의 자리에서다.

김상현 교수는 이날 강의를 통해 설화적 문맥과 역사적 자료를 혼용해서는 안 되고, 이 둘을 잘 구분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강조했다.

김상현 교수는 미륵사 무녕왕대 창건설을 주장하는 사재동 교수의 주장은 여러 가지 연구나 조사 결과 미륵사의 창건시기를 사비시대 이전으로 올리는 것은 무리하므로 설득력이 약하다고 일축했다. 또한 삼국시대 미륵사 창건시기의 백제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사리봉안기의 기록과 13세기 일연에 의해 편찬된 삼국유사의 사료적 성격을 비교하면 봉안기의 기록에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해답 또한 분명하다고 단언했다. 또한 사리봉안기 중 ‘我百濟王后佐平沙宅積德女’를 ‘백제왕후와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 뒤에 이어지는 문장 등과 연관해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동의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일축했다.

또 3원의 가람배치로 된 미륵사이므로 각 법당의 창건자가 따로 있을 수 있고 그 창건의 시기도 달랐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미륵사 가람배치가 처음부터 마련된 기본설계에 따라서 건립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라고 조언했다. 또 역사는 지금 가지고 있는 자료로 말하는 것이며, 새로운 자료가 후에 발견된다면 그 때가서 새롭게 고치면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삼국유사 무왕조의 사료적 성격은 역사적인 기록과 설화적인 서술이 혼재하고 있으며, 일부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일치한다고 해서 설화적인 부분까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사서로서의 삼국유사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장점 못지 않게 여러 문제도 있다며 “삼국유사의 장점과 한계를 동시에 인식하는 일이야말로 이 책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 중요하는 점을 일찍부터 주장한 바 있다”고 상기시켰다. 김교수는 또 “사리봉안기의 출현으로 인해 삼국유사의 사료적 가치가 크게 손상되거나 혹은 평가절하 될 하등의 이유는 없다”며 “삼국유사가 소중한 만큼 그 장점과 한계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 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강의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