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촌 선생님은 당신의 일생에 고스란히 시대를 담고 계신 분입니다.”
옥중 제자 신영복 교수는 노촌 이구영 선생을 이렇게 표현했다. 남파 간첩으로 복역한 전향 장기수이자 전통 한학자였던 노촌 이구영 선생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가 제작됐다.
‘경계에 선 인생’. 영화의 제목 그대로 노촌은 남과 북, 전통과 현대를 가르는 철조망 한가운데서 살아간 인생이었다.
남파간첩으로 파견됐다가 전향 장기수의 삶을 산 그는 동시에 전통 한학자이기도 했다. 1920년 충북 제천의 연안 이씨 명문가에서 태어난 노촌은 학교를 다니지 않고 부친 밑에서 전통 한학을 배웠다. 열여덟 살이 되면서 서울 영창학교에 입학한 그는 이곳에서 사회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사회주의라고 믿게 됐다.
노촌은 의병에 투신한 부친과 숙부, 그리고 고향의 친척 아저씨뻘 되는 벽초 홍명희의 영향으로 식민지 치하에서 강한 민족의식을 갖게 됐다. 1943년에는 독서회 사건에 연루돼 1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공간에는 사회주의 계열에 참여해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시기에 월북했다.
1958년 북파 간첩으로 내려온 노촌은 군산 앞바다에서 북으로 돌아가는 공작선 접선에 실패하고 경찰에 체포됐다. 당시 그를 체포한 경찰관은 일제 때 그를 고문했던 경찰이었다. 노촌은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고 대전교도소에 수감됐다.
복역한지 17년이 되던 해 육사 교관이던 신영복 씨가 1975년 통혁당 사건에 연루돼 대전교도소에 들어왔다. 4년과 노촌과 한 방을 쓴 신영복 씨는 그로부터 한학과 서예를 배웠다.
그가 장기수로 복역하는 동안 신영복 교수 외에도 심지연 경남대 교수를 비롯한 시국사건 투옥자들의 그의 문하에서 한문과 서예를 배웠다.
1980년 출소한 후 그를 따르던 이들은 인사동에 이문학회(以文學會)라는 공부 모임을 만들었고 20여년간 그 모임을 이어왔다. 한명숙 국무총리의 남편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 김명호 성균관대 교수, 문우서림 김영복 대표 등이 그의 문하를 넘나들었다.
2006년 10월 20일 노촌이 영면하기까지 수많은 문인들의 그의 밑에서 고전과 문학, 시대와 생명을 공부해왔다.
경계에 선 인생을 제작한 정창영 감독이 이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한 것은 2004년 12월이었고, 선생이 세상을 뜨기 전까지 노촌과 그의 제자들을 촬영했다.
정 감독은 “사실 내가 노촌 이구영과 이문학회를 영화로 만들면서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그가 겪었던 파란만장한 삶보다는 그가 이문학회에서 목요반이나 월요반 제자들과 만나면서 보여줬던 좌나 우를 넘어서는 인간에 대한 예의였다. 그것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고 다른 이를 존중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스승과 제자 사이를 넘어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애정과 존경,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생명의 영원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이문학회(以文學會)는 글로써 친구를 사귀는 모임을 뜻한다고 한다. 스승이나 제자가 아닌, 마음으로 만나는 친구 말이다.
‘경계에 선 인생’은 3월 29일 오후 1시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상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