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본다는 것은 꽤나 짜릿한 일이다. 그것도 글 꽤나 쓴다는 친구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은 재미와 흥분 두 가지를 겸비한다.

더구나 한국의 대표시인으로 꼽히는 고은의 이야기라면, 이건 얘기의 차원이 달라진다.

1976년 여름부터 쓴 고은 시인의 일기 ‘시대의 비탈에서’ 첫 번째 편이 <유심> 2009 3~4월호에 실렸다. 언제까지의 이야기가 연재될 것인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이번호에는 1976년 6월 17일부터 8월 27일까지의 일기가 게재됐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들이 많이 등장한다. 하루 걸러 함께 밥을 먹는 민음사 박맹호 사장을 비롯해, 한완상, 김우창, 백낙청, 최인훈, 서정주, 신경림, 구상 등. 해장국으로 유명한 청진동 골목에서 고은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문학동지들이었다.

그 와중에 월남은 북베트남을 중심으로 통일을 이룩하고, 김지하는 여전히 재판을 받고 있으며, 카터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한국의 유신체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 소식에 시인들은 또다시 술잔을 기울인다.

동일방직 처녀들 300명이 노조지부장과 총무를 경찰이 잡아간 것에 항의하기 위해 반나체로 시위를 감행했고, 판문점에서 미군 2명이 북한군의 도끼에 맞아 죽은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을 이쪽의 전과로 만들어 북괴군 3명 사살이라고 보도한 MBC 사람들은 보안대에 붙들려가 명태가 된 모양이다. 그래서 또다시 술잔을 기울인다.

8월 2일에는 김윤수가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좀 싱거웠지만, 어쨌든 방금 감방에서 나온 이를 붙잡고 또 소줏판을 벌였다. 다음날 마포경찰서 유치장에서 잠이 깼다. 폭우 속에서 1차, 2차, 3차 부르다가 통금을 어긴 것이다.

고은 일기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것은 술이다. 누구와 술을 마셨고, 그 다음날은 숙취이고, 그 다음날엔 금주 선언이고, 그 담날엔 술로 머리가 나빠진 것 같다는 한탄이다. 스스로 ‘들개가 술 먹는 것처럼 먹고 있다’고 할 정도다. 젊은 시절 그렇게 술을 마시고도 아직까지 노익장을 자랑한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고은 일기를 읽기 전 서정주의 <천지유정>을 연상했다. 자신의 시가 탄생하기까지 긴 여정과 순례의 과정을 보여주는 독백같은 일기 말이다. 하지만 고은의 시 이야기는 ‘낮에 시가 왔다, 저녁에 또 시가 왔다’는 말 밖에 없다.

대신 70년대 중반 한국의 문단을 이끌어가던 문인들이 누구와 어떻게 만났으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그리고 계간지 무엇을 창간하고 무엇에 글을 썼던 지를 들려주는 현대문학사에 가깝다.

내가 태어나기 열흘 전부터 쓰여지기 시작한 일기, 내 생일날엔 이 분 무엇을 하셨나. 낮에는 함석헌 옹을 만나 인도 이야기를 나누고 밤에는 그만, 몽정을 하셨구나.

어디선가 새로운 생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는 그 때, 유신 체제는 더욱 강고해지고, 6∙25가 또 언제 발발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나날이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