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지장은 오대산 좌선대에서 지난해와 다르게 편안한 모습으로 정진하고 있었다. 이제는 지장의 주변에 살벌한 탱자나무 가시단도 치워지고 없었다. 탱자나무 가시에 찔리지 않고서도 졸음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좌선의 시간도 마음대로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었다. 한번 좌선에 들어가면 하루 이틀이고 간에 마음대로 시간을 움직였다. 삼내에 들면 시간은 순간이 되었다. 아침 햇살을 보고 좌선에 들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저녁놀이 지고 있는 것이었다. 선정 삼매에 들면 시간이 지장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장이 시간을 넘나들었다.

숙명통宿命通도 조금씩 열렸다. 사람들과 자신의 전생이 보였다. 지장은 전생에도 불법을 신봉하는 수도자였는데, 수행이 모자라 윤회를 끊지 못하고 왕가에 태어나 헛도니 영화를 누렸음을 깨달았다.

지장은 신통을 멀리했다. 신통에 매달려 자신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주문이나 외는 밀법사가 되는 스님들을 서라벌에서 많이 보았던 것이다. 살아생전 내내 고승으로 존경받는 명랑이나 혜통도 실제로는 신주神呪에 얽매여 부처나 보살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장의 수행력이 오대산 암자마다 소문나면서 수행자들 사이에 변화가 왔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지장을 따르는 승도들이 많아졌다. 보천은 자신의 깨달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자책하면서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버렸고, 급기야 진여원에서는 지장을 방장으로 추대하려고 했다. 그러자 지장은 거절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는 법이었다. 추대하는 자가 있으면 시기하는 자가 있게 마련이었다. 지장은 시비를 떠나 선정에만 머물고자 했다.

더구나 지장은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삼갔다. 자신의 신변은 아직도 안전하지 못했다. 왕궁에서 소외된 귀족들은 지장 자신이 불만을 품고 왕궁을 떠난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지장은 언제든 역모에 휘말릴 수 있었다. 실제로 소외된 귀족들은 지장 자신이 불만을 품고 왕궁을 떠난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지장은 일찍이 문무왕이 죽은 그해 야명왕자가 김흠돌 등의 반역 무리들에게 이용당할 뻔했던 역모를 잘 알고 있었다. 귀족들이 야명왕자를 왕으로 옹립하겠다는 명분으로 반역을 일으켰던 것이다. 만약 반역이 성공했더라면 야명은 반역의 괴수들에게 이용만당하고 틀림없이 비통하게 죽어갔을 터였다.

어느새 지장은 오대산도 자신과 인연이 다 됐음으로 꿰뚫어보고 있었다. 미세한 번뇌까지 씻어버리는 누진통漏盡通과 선정에서 자유자재하게 지혜를 얻는 천안통天眼通을 얻으려면 왕경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잊혀진 사람이 되어 더더욱 정진해야 한다는 것이 지장의 발심發心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중국 땅밖에 없었다. 좁은 신라 땅은 깊은 산중이라도 곧 소문이 빠르게 돌아버렸다.

지장은 초여름에 조공사가 당은포에서 출발한다는 이야기를 보천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견당사가 움직이려면 서너 달 전부터 준비해야 하므로 소문은 반드시 돌게 마련이었다. 특히 견당사를 따라가려는 승련들 사이에 퍼지는 소문은 무엇보다 빨라 오대산에까지 그 소식은 이미 전해지고 있었다.

시종 행자가 시주물이 넘치는 진여원에서 공양거리를 가지고 왔다. 그들은 여전히l 하루 한 끼의 공양만 했다. 시종은 몸에 병이나 좌선하지 않고 점심공양이 끝난 후 지장에게 무술을 전수해주는 일로 일과를 삼았다. 시종은 비호처럼 빠르게 막대기를 휘둘렀다. 대궁 훈련장에서 시위부 대감에게 배운 검법이었다.

좌서선대 절벽에서 떨어질 때도 고양이처럼 가볍게 뛰어내렸다. 지장은 낙법뿐만 아니라 검술을 호신용으로 하나하나 배웠다. 키가 9척이나 되는 지장은 힘이 장사였으므로 죽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났다. 호신술을 가르치는 시종도 등골이 오싹할 때가 많았다. 좌선 정진을 오래 한 까닭에 지장의 집중력은 바위라도 꿰뚫을 정도였다. 검객의 고수들은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빛에서 이미 승부가 나버리게 마련인데, 내공의 힘이 넘쳐나는 지장은 검법의 고수 시종을 압도했다.

지장은 공양를 하다말고 오대산의 동쪽 능선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선청과 시종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장은 눈앞에 안개처럼 무엇이 그려지는 것을 느꼈다. 아직 천안통이 열리지 못하여 상이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두 물체가 오대산을 향해 다가온다는 것만은 할 수 있었다.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두 사람이 오고 있어.”

선청도 무엇을 보았거나 아니면 지장의 마음을 읽었는지 컹컹 짖어댔다. 영문을 모르는 행자 시종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후, 지장은 그 물체를 정확하게 구분해내었다. 한 사람은 승려이고 또 한 사람은 여자였다. 지장은 갑자기 호흡이 막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숨이 막히거나 가빠지는 것은 그를 향해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다가오는 그것은 여자였다. 지장은 가만히 눈을 감고 소리 내어 관세음보살을 외웠다.

-나무관세음보살.

지장은 낭낭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움막을 나섰다. 오대산 깊이 들어가 버릴까 생각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낭낭을 옆에 두고 자신의 수행력을 점검하고자 했다. 이미 자신과 낭낭이 잔영을 지웠다고 여기던 터였다. 그러니 낭낭을 피한다는 것은 몇 년 동안 고행한 수행자로서의 자세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낭낭은 깨우침으로 제도 받아야 할 지장의 한 중생일 뿐이었다.

-그래, 낭낭을 있는 그대로 맞이하자.

지장은 그런 생각으로 마음이 편해졌다. 호흡이 시작하는 곳도 보통 때와 같이 단전으로 내려갔다. 선청이 컹컹 짖으며 움막 아래로 달려갔다. 시종은 그제야 사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물었다.

“스님, 누가 오고 있는 것입니까?”

“선청의 옛 주인이다.”

“그렇다면 낭낭 아씨라는 말입니까?”

“그래, 맞다.”

시종도 낭낭을 남천 갈대밭에서 몇 번이나 보아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시종은 낭낭이 온다는 말을 듣고는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먼저 암자에 가 있을 터이니 낭낭이 오거든 함께 그곳으로 오너라.”

“그러겠습니다.”

지장은 띳집 암자로 올라갔다 .산벚나무에는 눈송이 같은 꽃봉오리가 물방울처럼 맺혀 있었다. 오대산은 서라벌보다 개화가 늦어 달포가 지나야 꽃봉오리들이 만발할 것이었다. 그러나 띳집 방 안에 시종이 꺾어둔 산벚나무 한 가지에서는 꽃들이 흰나비처럼 날개를 활짝 펴고 있었다.

잠시후, 암자에 시종과 선청을 앞세우고 낭낭이 나타났다. 낭낭은 수행자가 된 지장을 보자마자 눈물을 쏟아냈다. 선청도 눈을 찡그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시종도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그러나 지장은 담담하게 말했다.

“낭낭이 여기를 찾아오다니 반갑소. 어서 올라오시오.”

지장은 마루에 앉아 낭낭의 절을 합장하면서 받았다. 시종이 무쇠 솥에 찻물을 끓였다. 찻물이 끓는 동안 지장은 낭낭의 손을 잡아주었다.

“스님의 야윈 얼굴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낭낭은 고개를 숙인 채 찻물이 쏴쏴 끓는 소리보다 작게 말했다. 지장의 변해버린 모습을 바로 볼 수 없었다. 지금은 대궁에서 살던 지장의 아니었다. 지장의 퀭한 눈에서는 형형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차를 마실 때도 낭낭은 눈이 부시어 지장을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홀짝거렸다.

시종은 잔가지에 불을 붙여 찻물을 다시 끓였다. 차를 몇 잔째 마시며 마음의 안정을 찾은 후에야 낭낭은 바랑을 풀어 가지고 온 짚신을 꺼냈다. 망태처럼 큰 짚신을 꺼내자 시종이 웃음을 터뜨렸다.

“낭낭 아씨, 짚신이 나룻배 같습니다.”

“시종의 말이 맞군. 세상에서 가장 큰 짚신일 것이야.”

낭낭은 지장의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이 짚신은 스님께서 신으라고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선청이 마무로 올라와서 꼬리치며 짚신을 이리저리 핥았다. 그것은 선청이 기분 좋을 때 나타내는 버릇이었다.

“낭낭의 마음을 알겠소. 나더러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짚신이 되어 살라는 뜻 아니오?”

“아닙니다. 미천한 제가 스님께 어찌 그런 부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무엇이오.”

“이것저것 손재주를 부리다 보니 이렇게 큰 짚신이 되고 말았을 뿐입니다.”

시종도 짚신을 한 켤레 받았다.

“낭낭 아씨, 저는 변한 것이 없어요? 맞혀보세요.”

“호호호, 스님이 되셨네요.”

“그렇습니다. 이름은 시종이고, 스님들이 저를 부를 때는 시종 행자라고 합니다.”

그날 밤, 지장은 낭낭을 객사가 여러 개인 진여원으로 보냈다. 암자는 두 칸 띳집으로 지장이 거처하는 방 한 개에다 시종이 자곤 하는 부엌 겸 방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지장은 시종더러 난낭을 진여원으로 안내하게 하고는 자신은 말없이 바랑을 꾸렸다. 바랑에는 낭낭이 가져온 짚신과 보천에게 받은 차 씨 서너 봉지를 넣었다. 짚신은 깨달음을 이룬 뒤 중생의 발이 되어 살라는 화두였고, 차는 그에게 생사를 바꾸어 놓은 신물神物이었던 것이다. 오대산 골짜기 다랑논에서 거둔 황립도黃粒稻 볍씨와 약초 씨앗도 챙겼다.

-그래, 이제 낭낭은 사랑하는 여인이 아니라 나의 선지식이다. 짚신처럼 중생의 발이 되어 살라고 화두를 준 선지식이다.

지장은 낭낭과 우연히 만나 차 한 잔에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으니 더 이상 오대산에 남아 있을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지장은 진여원의 방장으로 추대되어 서라벌까지 자신의 신분이 알려지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무엇보다 더 치열하게 정진하기 위해서는 신라 땅을 떠난 신라인들에게 영영 잊혀진 수행자가 돼야 한다고 믿었다.

낭낭이 곤히 잠든 새벽이었다.

지장은 삽살개 선청과 행자 시종을 데리고 당은포로 향했다. 그 곳 포구에서 당나라로 떠나는 조공사를 만나 서해를 건넌 뒤 중국의 깊은 산으로 들어가 무지렁이 나무꾼조차 거들떠보지 않는 썩은 나무처럼 뒹굴면서 구도 수행하는 것이 지장의 꿈이었다. <계속>

글 정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