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왕 정명淨明이 즉위한 원년이었다. 귀족이라면 높은 관등을 받아 누구나 들어가 살고 싶은 왕궁은 이때부터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으로 요동쳤다. 문무대왕이 삼국 통일이란 대업을 이루고 죽자, 왕위는 순리대로 맏아들인 태자 정명에게 이어져야했다.

그런데 문무대왕 법민法敏의 죽음은 비밀에 부쳐지고 왕위 계승은 묘연했다. 숙원의 대업을 이룬 대왕이므로 누구라도 땅에 엎드려 비통해야 할 일이었지만 왕경은 태풍 전야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반역에 가담한 귀족들이 합세해서 함구해버리자 왕경의 백성들은 그 누구도 대왕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왕권을 탈취하려는 반역자들의 역모는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한여름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며 숨을 막히게 하는 음력 7월이었다. 당연히 왕위는 문무왕 5년에 이미 태자로 책봉된 정명이 받아야 했지만 순리는 주춤거리고 있었다. 정명은 태자로 책봉된 후 바로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이자 소판 김흠돌의 딸과 혼인하여 성인이 되어 있었으므로 누군가 섭정을 해야 할 어린 나이도 아니었다.

월성 대궁 밖의 소판 흠돌의 저택에는 파진찬 흥원, 대아찬 진공이 모여 역모를 꾸미고 있었다. 놀랍게도 태자의 장인이 되는 흠돌이 반역의 좌장이 되어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흠돌은 권력에 대한 야심과 어색漁色에 빠진 진골 출신의 장수. 소판蘇判이라면 17관등 중에서 제3위의 벼슬로서 아주 높은 관등인데도 흠돌은 거기에 만족하지 못했다. 어색에 탐닉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어색이란 여자를 탐하는 음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흠돌은 역모를 꾸미는 책략 회의에서도 여인 하나를 구해와 옆에 앉혀놓고 술을 따르게 할 정도였다.

“병부령 이찬 김군관에게 왕궁 내의 시위부侍衛府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부탁해놓았소. 그러니 대왕의 죽음은 절대로 궁밖에 새나가지 않을 것이오, 순리를 따르자면 태자가 바로 왕위를 이어야 하나 오죽하면 태자의 장인 되는 내가 나서서 이런 회동을 주선하고 있겠소이까?”

흠돌이 말을 잠시 멈추고 의견을 구하자 진공이 물었다.

“고만고만하니 누구를 점지할지 모르겠소이다.”

“권력은 이미 소판 손에 쥐어져 있으니 허수아비 왕을 내세우면 어떻겠소이까?”

성미가 불 같은 흠돌이 짜증을 냈다.

반역의 주모자들은 하나같이 문무대왕의 맏아들 정명에게 심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었다. 왕권 강화의 의지가 강한 정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정명은 태자 시절부터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장수들의 공은 인정하되 더 이상 특권은 없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고, 장수들은 문무대왕을 보좌하며 최전선에서 전쟁을 지른 자신들의 공이 무시되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흠돌은 대장군 김유신과 완자 김인문을 도와 668년 9월에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하는 데 큰 공을 세워 파진찬에 오르고 바로 소판으로 승잔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의 권력은 절정에 달했다. 무공의 여세에다 문명왕후를 설득하여 자신의 딸은 정명과 혼인케하여 권부의 핵심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화랑의 부두목 격인 부제 출신의 흥원 역시 최전선에서 전투를 치르며 혁혁한 공을 세운 장수로서 그의 신분이 파진찬에 이르렀는데, 파진찬이라면 병권을 흔드는 병부령兵部令에 임명될 수 있는 관등이었다.

흠돌처럼 화랑의 우두머리 풍월주를 지낸 진공도 역시 일길찬의 관등으로 신라와 당의 군사가 항복받은 고구려 땅에 파견되어 작전을 폈고, 고구려가 백제를 도우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대아찬의 관등으로 군사를 이끌고 옹포甕浦를 사수한 용장이었다.

“문무대왕의 친동생 김인문은 어떤지요.”

‘김인문 장군이야 누구라도 승복하라 수 있는 인물이지만, “

진공의 말을 흥원이 자르며 손을 저었다.

“아니 됩니다. 정명채자보다 더 수완이 좋고 인품이 뛰어나지 않습니까? 여우를 잡으려다 호랑이에게 먹히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어찌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십니까?”

“그렇다면 문무대왕과 야명 사이에 태어난 인명을 옹립하면 어떠하겠습니까?”

인명은 정명의 이복동생으로 비록 서자이긴 하지만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흠돌은 답답하여 술잔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작으로 마셨다.

“아니, 장군들은 그렇게도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것이오? 지금은 비록 우리들도 신라인이 됐다고는 하지만 진짜 진골은 아니지 않습니까? 무열대왕 혈족에게 언젠가 밀리게 돼 있다는 말이오.”

흥원이 흠돌의 심중을 알아채고는 맞장구를 쳤다.

“소판, 지당한 말씀이오. 여기서 밀리면 가야 출신 진골은 신라 출신 진골들에게 영원히 밀리고 말 것입니다.”

무공을 세운 신라 장군들 사이에도 출신 지역에 따른 알력이 분명하게 있었다. 가야파의 후원자는 대장군 김유신과 무열왕의 왕비인 문명왕후였다. 그들의 아버지 각간 서현은 가야 출신으로 유신과 문희(문명왕후), 그리고 정희(흠돌의 어머니)를 자식으로 두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가야의 피가 흐르는 흠돌은 문명왕후의 조카가 되는 셈이었다.

흠돌은 술이 거하게 오르자 자신의 어색을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파진찬 선품善品의 마누라였던 보룡이란 과부 말이네, 과부의 딸이지만 자의란 년의 미모가 보통이 아니었지. 그래서 일찍이 내가 보룡을 찾아가 꼬드겼지. 자의를 첩으로 주면 부자로 호강시켜주겠다고 말이네. 그런데 과부년이 어찌나 코가 센지 이빨이 조금도 안 먹히더라고. 하하하.”

선품의 가문도 자존심을 내세울 만한 진공 혈통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진흥왕이 셋째 아들인 구륜공仇輪公이었으므로 보룡이 흠돌의 호색을 천박하게 여겼음은 당연했다. 더구나 흠돌은 이미 난봉꾼으로 소문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보룡은 무열왕의 총애를 받아 몰래 당원 전군殿君을 낳아 흠돌의 이모인 문명왕후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었다. 전군이란 왕이 사통하여 낳은 자식으로 서자를 예우하여 부르는 호칭이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자의가 왕후라니, 웃기는 일입니다. 자의란 년도 지어미를 닮아 얼굴값 좀 할 겝니다. 자의를 태자비로 삼은 무열대왕이 실수한 것이오. 아무리 이불 속이 좋다지만 보룡의 간청을 들어줄게 따로 있지. 그런 악수가 어디 있단 말이오. 아니 그런가요?”

흠돌은 무령왕의 자의를 문무왕 법민의 왕비로 삼은 일을 놓고 계속 험담했다. 그러나 흠돌은 내심 두려워 떨고 있었다. 든든한 바람벽이 되어주었던 무열왕의 정비인 문명왕후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아무 근심이 없었는데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자의가 독하게 마음먹고 때를 기다렸다가 자신에게 복수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자의는 문무왕의 병이 크게 악화되자 북원에 있던 오기를 불러 왕성을 지키는 호성장군으로 임명해놓고 있었다. 실제로 그때부터 흠돌 무리의 반역이 시작되고 있었던바, 괴수 진공이 ‘주상이 병으로 누었고, 상대등이 문서를 내리지 않았는데 어찌 중요한 직을 가벼이 넘겨주겠는가’하고 호성장군의 인부를 쉽게 내주지 않았던 것이다.

진공도 흠돌의 속마음을 간파하고 거들었다.

“소판, 자의의 준동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놓쳤습니다. 문명왕후께서 살아 계실 때 미리 준비를 하셨어야 합니다. 하오나 늦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계책이 하나 있습니다.”

“왜 준비를 하지 않았겠소. 문명왕후께 ‘자의가 후일 후后가 되어 아들을 태자로 세우면 대권이 진골 정통에게 다시 돌아갈 것이므로 가야파는 위태로울 것입니다. 유신 공의 딸 신광을 일찍 태자비로 삼아 우리 집안을 편안하게 함만 못합니다’하고 말했소. 그뿐인 줄 아오? 나의 딸을 정명의 비로 간택해달라고 날마다 부탁하여 성사되었던 것이오.”

실제로 흠돌은 자의를 견제하기 위해서 자신의 딸은 정명의 태자비로, 김유신의 네 딸 중에서 신광을 정명의 첩이 되게 하였던 것이다.

“저의 계책은 소판 나으리의 두려움을 일거에 씻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오. 무엇이란 말이오?”

흠돌은 술이 거나해지면 목소리가 거칠고 커졌다. 큰 소리로 진공의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자 진공이 술 따르는 여인을 물리쳤다.

“너는 잠시 나가 있거라.”

여인이 나가 있는 공안 진공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말했다.

“소판, 복잡하게 누구를 옹립할 것 없소이다. 소판께서 주상이 되시면 그만입니다. 그리 되면 자의가 무에 그리 두렵겠소이까?”

“허허, 진공의 말씀은 지나치십니다.”

흠돌은 자신의 심중을 들켜버린 듯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스쳤다. 겉으로는 거절을 했지만 내심 기다리고 있던 계책이 진공에게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흥원도 몸이 달아 거들었다.

“흠돌 공, 지금이 적기입니다. 문무대왕의 장례를 치른 후에는 거사가 늦습니다. 지금 바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흥원과 진공은 벌써 흠돌이 주군이 된 것처럼 술상 밑으로 내려와 무릎을 꿇고 맹세를 하고 있었다.

“소판, 결단을 내리소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흥원과 진공이 칼로 손가락을 베더니 술잔에 피를 채웠다. 흠돌은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자자, 일어나시오. 거사의 성공을 위해 건배를 들어야지요. 어서.”

흠돌도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술잔에 피를 떨어뜨렸다. 원래 장수끼리 맹약할 때는 백마의 목을 잘라 피를 내어 마시는 전통이 있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급했다. 술잔에는 세 사람의 붉은 피가 섞였다. 흠돌이 먼저 입술에 피를 묻히고 건네주자, 흥원과 진공이 눈알을 부라리며 자신들의 붉은 피를 마셨다. <계속>

글 정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