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 눈이 내린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눈은 경산을 지나면서부터 날벌레처럼 희끗거리더니 경주 시가지로 진입하는 톨게이트를 지나자마자 굵은 눈송이로 변해 차창에 마구 달라붙었다.

시가지 안에도 천년의 고도답게 왕릉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나는 숙소를 정하기 위해 버스 터미널 쪽으로 달려갔다. 어느 도시나 숙박시설은 터미널 쪽에 몰려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버스 터미널 부근의 왕릉 옆에 승용차를 주차시켜놓고 하룻밤 묵을 숙소를 물색했다. 눈은 내리는 기세와 달리 거리에 내려 쌓지는 못했다. 거리를 축축하게 적실 뿐 허공에서 내려와 금세 녹아 사라졌다.

잠시 후에야 나는 관광 비수기가 된 경주 시가지를 거닐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니 미리 숙소를 정할 필요도 없고 바가지 요금을 걱정할 것도 없었다. 거리를 나서 간판을 기웃거리자마자 택시기사가 나를 살피더니 눈을 맞추려고 애를 썼다. 관광 비수기에 접어들어 택시 기사가 거꾸로 관광객을 찾고 있었다.

-자, 이제 남산의 칠불을 보려면 어느 길로 갈 것인가.

나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리며 천천히 걸었다. 그러나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막다른 골목길에서 왕릉에 도착하고 말았다. 이른바 능의 피장자가 신라 초기의 왕들이라고 추정하는 오릉五陵이었다. 능 가운데로 길이 하나 있는데, 행인들이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지름길로 이용하고 있었다. 나도 왕릉 가운데까지 걸어가서 휴대폰을 꺼내 시청 문화관광과를 찾았다.

“칠불을 가려면 어느 곳으로 가야 됩니까?”

“어디 칠불을 말하십니까?”

“남산에 있다고 하던데요.”

시청 여직원은 아주 친절했다. 아주 오랜만에 문의 전화가 왔던지 장황하게 안내를 했다. 나는 그가 설명하는 말 중에서 주요 지형지물의 이름만 외웠다. 신문왕릉, 화랑교육원, 통일전, 남산사, 남산동, 사과밭……그리고 외길인 산길, 내가 찾는 칠불은 외길 끝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남산을 오르기 전에 먼저 신문왕릉을 볼 수 있는 코스였다. 당연히 가봐야 하는 왕릉이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맏아들이자 내 호기심을 자극한 지장이 살았던 선대의 대왕이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마침 신문왕릉은 가는 길 중간에 있으므로 잠시 들렀다 가도 일정에 쫓기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칠불이 있는 절에서 하룻밤을 묵을지도 몰랐다. 내일이 공휴일이므로 나에게는 시간이 충분했다. 그러나 좀전의 관광과 여직원의 설명에 의하면 산꼭대기의 절은 숙박을 할 만큼 크지 않은 모양이었다. 칠불이 있는 절을 묻자, 그 여직원은 큰 절이 아니라 칠불 옆에 아주 작은 암자인 칠불암이 있다고 설명했던 것이다.

눈송이는 어느새 허공을 하얗게 채워 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하늘은 칙칙해 보이지 않았고 마치 해가 대지를 엿보고 있는 것처럼 포근함이 감돌았다. 나는 경주의 지리를 모르므로 지팡이를 짚고 산책하는 노인을 붙들고 물었다.

“신문왕릉이 어디 있습니까?”

“이 길로 10분 정도 쭉 가면 나옵니다. 얼마 멀지 않아요.”

나는 왕릉을 나와 승용차를 타고 노인이 말한 대로 달렸다. 경주의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어 차창을 조금 열었다. 눈은 쌓이지 않고 내리는 대로 바로 녹아 노로는 물을 뿌려놓은 것처럼 번들거렸다.

-이곳이 지장의 고향이 아닐 것인가.

나는 천년 전 지장이 살았던 먼 나라에 와 있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지장은 출가하기 전에 이 서라벌의 왕궁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그도 역시 한 청년으로서 아리따운 여인을 만나 사랑을 나누고, 왕도를 드나드는 국사와 고승을 만나 인생을 깊이 사색하고, 그러나 권력 투쟁에 눈이 먼 왕족들에게 실망하다가 오랜 번민과 방황 끝에 출가를 했던 것이다.

순간 나는 지장보살이 되어 지옥을 텅 비게 하겠다던 청년 지장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도 강하게 들었다. 흠칫 놀란 채 나는 빈 옆자리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이곳이 바로 지장이 살았던 서라벌이란 말인가.

핸들이 조금 흔들려 승용차가 중앙선을 조금 침범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결코 놀랄일이 아니었다. 경주는 천년 전에 지장만 살았던 땅이 아니라, 원광법사도, 자장율사도, 원효성사도, 의상대사도, 명랑법사도, 혜통국사도 각각의 가풍으로 불법을 펼쳤던 곳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다시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경주야말로 불국토 성지 중의 성지가 아닌가.

나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자책했다. 바로 옆자리에는 인생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몸부림쳤던 청년 지장이 앉아 있다는 착각도 여전히 들었다. 나는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승용차가 거친 소리를 지르며 도로 한쪽에 멈춰 섰다. 바로 눈앞에 신문왕릉이란 이정표가 나타나 있었다. 노인의 말대로 신문왕릉은 오릉에서 지척의 거리에 있었다.

나는 천천히 왕릉을 향해 걸어갔다. 눈발이 제법 굵어져 이제는 능으로 가는 길을 하얗게 색칠하고 있었다. 절대로 내려 쌓이지 않을 것 같던 눈송이들이 왕릉을 흰 망사처럼 덮고 있었다.

능의 상석 옆에는 화강암으로 된 표지석이 하나 무표정하게 서 있는데, 이 능이 신문왕릉임을 확인해주고 있었다. 나는 스스럼없이 왕릉으로 들어가 상석 앞에 섰다.

-사적 181호, 신문왕릉.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맏아들이자 비로소 전제왕권을 확립한 대왕의 왕릉치고는 초라했다. 삿갓 모양의 봉분 둘레에 보호석을 두른 것 말고는 왕권에 도전한 진골 귀족 세력을 제압하고 태평성대의 기반을 닦았으며 국학을 창설하여 설총薛聰, 강수强首같은 대학자를 배출한 신문대왕의 왕릉이라고 선뜻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왕릉을 일부 사학자들은 황후의 섭정과 잦은 반란에 시달리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신문대왕의 어린 아들 효소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일까.

잦은 반란.

영민한 청년 지장의 눈에는 구중궁궐의 왕궁이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권력 암투로 인해서 도망치고 싶은 지옥처럼 보였으리라. 귀족의 반란이 시작된 신문대왕 시대는 그가 태어나기 바로 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장은 지옥 중생을 구원하는 지장보살이 되겠다고 맹세했던 것일까. 선사도 법사도 학승도 권력에 눈이 먼 귀족들의 욕망을 꺾을 수 없었고, 절망에 허덕이는 가난한 민초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었던 것이다. 세상을 구원할 성자가 있다면 자신의 성불을 미루더라도 자기를 희생시켜 고달픈 중생을 먼저 구언하겠다는 지장보살의 출현밖에는 달이 희망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왕릉을 느린 걸음으로 한 바퀴 돌며 상념에 잠겼다. 능의 누런 잔디는 노인의 머리칼처럼 허옇게 바뀌고 있었다.

-도대체 권력이란 무엇인가.

신문대왕의 무덤 속으로라도 들어가 도대체 청년 지장을 출가케 한 그 시대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몹시 묻고 싶었다. 지장은 왜 왕궁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출가했을까 하는 호기심이 솟구쳐 올랐다. <계속>

글 정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