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기는 백옥보다 더하고 향기가 짙기로는 설중매보다 더 하다. 만상이 곧 일심이요, 일심이 곧 만상이다.
이것은 천지와 더불어 덮이고 쌓였고, 이것은 일월과 함께 밝혀서 온 천지에 가득하다. 이것의 대용은 관음보살의 천수천안이요, 이것의 원융무애함은 한 순간도 그 원융무애함을 잃지 않는다. 고금을 초월하여 항상 여여한 이것은 무엇인가?
이 여여한 자리에 어떻게 들어갈까. 한 생각에 한 티끌도 없게 되니, 달빛 아래 그 천문이 열려 비밀한 그 요징이 확 열리리라. 벽송 문중에 두 가지 길이 없으니, 봄이 되면 만 가지 꽃이 만발하더라. 나무아미타불.
오늘 저는 벽송선회에 맞이하여 여러 수선납자들과 함께 탁마를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월암 선사가 여기에 선원을 마련해서 이런 자리를 만들었으니, 나는 월암 선사야말로 과거 전생부터 여기 벽송선원에서 공부했던 수좌였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못다 한 원력을 마저 이루기 위해 다시 벽송사에 와서 불사를 하고 공부를 하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참으로 한국불교는 참으로 빈약했습니다. 외양이 빈약한 것이 아니라 내용이 빈약했습니다. 오해가 있을지 모르나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옥도 갈고 닦지 않으면 값진 물건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아무리 근기가 수승하더라도 갈고 닦지 않으면 도기(道器)가 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무조건 밀어 붙여 깨치겠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바로 알고 닦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역대 선사의 가르침을 모르고 참선정진에 나서는 것은 마치 나침반 없이 항해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교입선이라는 것은 책을 보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문자와 지해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지, 공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를 익히기 위해 경을 봐야 하는 것처럼 선을 잘 하기 위해서 조사어록을 봐야 합니다. 선사들이 문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그 깊은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 탓으로 많은 수선납자들이 선병이 들고 방황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들어서 이렇게 선회를 열어 바르게 공부하려는 가풍이 이곳 벽송사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이런 가풍이 한국불교에 널리 퍼져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 중차대한 일에 대해 전혀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종단적 대안이나 대책도 없었고, 누가 그런 일을 하려고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런 일을 놓아버렸던 부끄러운 시절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차에 시작된 벽송사 선회는 우리 선을 진작시키는 큰 계기가 될 것입니다.
<사미율의>에 스승의 유형을 4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유법유재(有法有財), 즉 법도 있고 재물도 있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법은 후학을 지도할 수 있는 실력을, 재물은 공부를 가르칠 수 있는 도량이나 재력, 즉 부수적 조건을 말합니다. 이 경우는 최고의 스승에 해당합니다. 두 번째는 유법무재(有法無財), 즉 법은 갖춰져 있으나 도량 등의 재가 부족한 경우입니다. 이 경우도 훌륭한 스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무법유재(無法有財), 즉 도량은 크고 재력도 갖춰져 있으나 법이 없는 경우입니다. 요즘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대중을 지도할 능력과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큰 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이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이런 경우를 당해선 그런 곳에 머물지 말고 그냥 인사만 하고 떠나는 것이 좋습니다. 네 번째는 무재무법(無財無法), 즉 도량도 없고, 능력도 없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인사도 하지 말고 즉시 떠나가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단의 현실을 보면 적지 않은 이들이 절이 크고 도량을 크게 갖고 있는 이에게 줄을 대고 의지하고 있습니다. 절집에 도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또 근자에 도가 없는 사람이 스승 노릇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이래서는 한국불교에 희망이 없습니다. 스님들이 법을 오롯이 가지고 있다면 모든 사부대중의 존경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스님이 스님답지 못하게 살면 불법이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종교편향 사태도 이런 교단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는데, 우리 스님들은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스님들이 마지막까지 놓지 말아야 할 마지막 보루가 지혜와 자비를 갖추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게 되면 스님의 생명은 끝나는 것입니다. 지혜를 갖추려면 철저한 신심과 원력, 그리고 공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마음가짐을 철저하게 지켜나갈 때 스님들의 생명력은 이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공부하는 사람들은 탐진치(貪瞋痴) 삼독심과 만의(慢疑), 즉 오만한 마음과 의심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