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전야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 범불교도대회 직후 불교계의 기상도는 태풍 끝이 아닌, 쓰나미를 기다리는 스산한 해변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20만여 사부대중이 서울 한복판에 모여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와 종교차별 재방방지, 어청수 청장의 사퇴를 요구했지만 묵묵부답·요지부동이다. 게다가 대통령은 범불교도대회 다음날 자신을 지지하는 뉴라이트 관계자들과 목사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만찬까지 열었다. 불처럼 화가 나 있는 불교계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다.

범불교도대회를 자신의 지지기반인 기독교와 보수세력의 결집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오죽하면 종교평화위원회서 ‘불교를 조롱하지 말라’고 성명까지 발표했을까.

이같은 분노는 결국 한 스님의 할복자살 기도로 이어졌다. 뉴라이트 관계자 및 목사들과의 만찬 소식이 전해진 직후(8월 30일) 전 상원사 주지 삼보 스님이 항거의 표시로 조계사 대웅전에서 할복을 감행했다. 스님은 죽음으로 대통령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고 유서에 적었다.

사실 삼보 스님의 할복은 어느 정도 예상된 것이었다. 범불교도대회 전부터 스님들 사이에서는 누가 소신공양(몸을 불태우는 행위)을 한다더라, 누가 소지공양(손가락을 자르는 행위)을 한다더라는 등의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범불교도대회 당일에도 사회자 영진 스님은 스님들의 참회진언이 끝난 직후 “범불교도대회 봉행위원회 사무처장 혜일 스님이 스님들의 참회진언 중에 자신의 몸을 소신해 부처님께 바치겠다고 했다”고 했음을 전하며 “그러나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가까스로 만류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때 자신의 몸을 바치겠다고 자청한 스님 중에는 삼보 스님도 포함돼 있었다.

조계종 대변인 승원 스님은 9월 1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삼보 스님이 범불교도대회 당일 할복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총무원장 지관 스님이 이번 대회가 반드시 평화적이고 종교적인 행사로 치러져야 한다고 간곡히 만류해 뜻을 접었는데, 뉴라이트 목사들과 대통령의 만찬 소식을 듣고는 다시 상경해 끝내 자해행위를 강행했다”고 침통해했다. 스님은 또 “범불교대회를 전후해서 여러 스님들이 소신공양 혹은 소지공양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겨우 만류했다”며 “그러나 정부의 이 같은 불교무시 행위가 지속 된다면 우리로서도 (스님들의 자해행위를) 막지 못하지 않겠는가”라고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삼보 스님은 할복하기 전 작성한 유서의 첫 구절은 ‘위법망구(爲法忘軀)' 즉 “법을 위해 내 몸을 잊겠다”는 것이었다. 스님은 이어“이명박 정부는 국민들의 정부가 아니라 자신들의 지지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권”이라고 비판했다.

이 같은 위법망구의 목소리가 불교계 전체로 확산되면서 비장한 분위가 조성되고 있는 중이다. 범불교도대회가 치러지기 전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 또한 한국불교사상 첫 순교자인 이차돈을 거론하며 스님들이 분연히 일어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불교계의 대정부 규탄 움직임은 앞으로 사찰 담장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승원 스님은 오늘(9월 1일)기자간담회에서 시민단체와의 연대를 강하게 시사하는 발언을 던졌다. 스님은 “앞으로의 활동은 불교계의 범위를 넘어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지적하는 사람들과 연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재야단체, 시민단체들과의 연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치권과의 연대에 대해서는 확답을 미뤘다.

불교계는 범불교도대회를 전국으로 확대해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추석 직후 영남 지역에서 첫 지역 단위의 범불교도대회가 열릴 것으로 보인다. 첫 대회가 영남 지역인 것은 이곳이 이명박 정부의 지지 기반인 동시에 불자들이 가장 많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전국승려대회의 개최설도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다. 조계종 한 중진 스님에 따르면 9월 30일 전국승려대회 개최가 추진 중이다.

불교계는 최근 이명박 정부의 종교 편향 행위를 10․27이후 최대의 법난이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그 누구도 드러내놓고 종교편향을 조장한 점이 없다는 점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기독교 중심으로 정부 조직을 재편하라고 요구한 적도, 국토해양부와 교육부 지도에서 사찰은 빼고 교회만 넣으라고 지시한 적도 없다고 한다. 다만 실무자가 실수로, 혹은 불교계가 오해해서 이런 문제들이 부각되고 있다는 입장이다.

기독교나 보수 언론 일각에서 불교계의 요구가 무리하다는 의견들이 새록새록 등장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비롯됐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불교계는 현재의 상황을 ‘법난’으로 단호히 규정하고 있다. 상층 지도부가 지시했든 지시하지 않았든 그 같은 일이 발생한 자체가 현재 기독교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사회적 현상을 드러낸 것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지금 제도적 장치를 통해 이를 제재하지 않으면 더 이상 불교의 존립마저 어렵다는 위기의식에 가득 차 있다.

불교계의 이같은 우려를 기우(杞憂)로만 볼 수 있을까. 한국 기독교의 공격적인 선교행위를 차치하고 이명박 정부의 행보와 대응만 보더라도 이는 우려가 아니라 현실에 가깝다.

불교계는 어청수 퇴진, 대통령 사과 등 네 가지 요구를 하고 있지만, 항상 정부에 대한 대화와 타협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불교계는 누차 “4개 조항 모두를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성의 있는 답변과, 이명박 대통령의 직접적인 사과 표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과 그의 측근 세력들은 최근 일련의 사건들이 대통령이 직접 사과할 꺼리도 아니고, 불교계의 요구 또한 언급할 가치가 없는 이야기로 치부하고 있다. 오히려 승려대회가 별다른 탈 없이 원만히 끝난 것에 안도하는 눈치다.

정부 일각에서는 불교계에 전달할 추석선물, 템플스테이 지원비용 확대, 전통사찰 지원비 확대 등 불교계에 물려줄 사탕마련에 분주하다고 한다.

이런 일련의 행위들을 통해 불자들의 분노는 더욱 불어나고 있다. 범불교도대회를 통해 현 정부의 종교편향 행위를 알게 된 많은 불자들은 이후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행보에 대해 모욕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청와대와 정부 관계자의 가벼운 언행은 차츰 불교를 폭발직전으로 몰아가고 있다.

오늘 한국불교계의 기상도는 저기압처럼 가라앉아 있다. 무겁고 조용하다. 마치 쓰나미가 들이닥치기 전 푸켓의 앞바다에서 나타난 고요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