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숭례문) 화재로 문화재 수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고조된 가운데, 한국 문화재 수난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유물 두 점이 새로 발견됐다.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에 소재한 사찰인 ‘명주사 고판화박물관’의 한선학 관장은 최근 입수한 19세기 유물 '한석봉(韓石峯) 초서(草書) 천자문'과 한글소설 '유충렬전(劉忠烈傳)'의 목판(木版) 일부를 27일 공개했다.
두 유물 모두 온전한 모습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훼손되거나 변형된 상태였다. '천자문' 목판 4장은 가운데를 잘라 8장으로 만들고 여백을 잘라낸 뒤 일본식 소형 4각 화로인 '이로리'의 바깥 면 장식으로 둔갑시켰다. '유충렬전' 목판은 원형으로 오려낸 뒤 옻칠하고 다듬어 일본식 분첩의 뚜껑(길이 10.5㎝)으로 변형시켰다. 모두 일제 강점기에 훼손된 것이다.
이날 명주사 고판화박물관이 공개한 두 목판은 모두 조선 후기 민간업자가 판매를 목적으로 출판한 책인 방각본(坊刻本)을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이번에 처음 나온 자료들이다. '천자문' 목판은 1899년(광무3년) 전북 전주에서 제작된 것으로 확인됐으며,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충렬전' 목판은 한글로 쓴 한국 고소설을 인쇄하기 위한 원판으로는 이번에 처음 발견된 것이다. 방각본 목판은 궁중판이나 사찰본, 서원본에 비해 보존이 잘 되지 않아서 그 원판을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한석봉 초서천자문’ 목판은 방각본으로는 최초로 발견된 것으로 추정되고, 한글소설 ‘유충렬전’ 목판 원판도 삼국지 목판 원판(이태영 교수 소장) 한 장이 발견된 뒤 처음으로 학계에 보고된 자료이다.
지난 2005년 ‘오륜행실도’ 목판으로 만들어진 이로리(일본식 소형 화로)를 공개해 일제의 우리문화재 훼손을 고발한 바 있는 한선학 관장은 “오륜행실도 이로리 공개 이후 더 많은 우리 문화재가 장식용으로 훼손되었다는 확신을 갖고 고미술상을 뒤지다가 ‘한석봉 초서 천자문’ 이로리를 지난 9월 발견해 입수했고,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일본의 한 지인으로부터 한글방각본 목판소설 유충렬전 목판 원판이 분첩으로 만들어진 것을 발견했다는 제보를 받고 입수하여 이번에 공개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유물을 감정한 남권희 경북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당시의 중요한 교육자료로서의 가치, 지방의 민간 출판업을 보여주는 지역사의 자료로서의 가치와 더불어 서예사와 판각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일본 호사가들에 의해 완상용(玩賞用)으로 바뀌었던 문화재 수난의 산증거라고 평가했다. 특히 <유충렬전>은 가장 많이 출판된 완판본 한글고전 영웅소설로, <조웅전>과 함께 영웅소설의 쌍벽을 이룬 대표작이라는 것.
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칠기장 이형만 씨는 분첩의 뚜껑으로 만들어진 방각본 한글소설 ‘유충렬전’을 살펴보고 “옻칠 기법이 마현전칠기법으로 일본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것이며, 옻칠한 시기는 일제강점기 추정했다.
한선학 관장은 “우리 문화재를 훼손한 일본인들만 탓할 것이 아니라 이번 문화재의 공개가 우리 국민 자신들이 얼마나 문화재를 사랑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지적했다.
미디어붓다 이학종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