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에 철학을 전파하는 젊은 철학자 강신주가 대한불교진흥원 화요열린강좌 강단에서 불자들과 만났다.
유난히 후텁지근한 여름밤이었던 7월 16일 오후 7시, 강신주 박사의 강연을 듣고자 하는 젊은 불자들이 마포 다보빌딩 다보원에 속속 모여들었다. 이윽고 티셔츠에 반바지, 가벼운 차림으로 나타난 강신주 박사가 지체 없이 강연을 시작했다.
‘인문학으로 공감하고 힐링하기’라는 큰 주제 아래 독일의 법철학자 칼 슈미트의 사상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병폐를 진단하고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 강신주 박사의 거침없는 강연을 소개한다. <편집자> |
“독일의 법철학자 칼 슈미트는 ‘적’과 ‘동지’라는 범주가 작용하는 순간 정치적인 판단이 작동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부처가 돼야 한다는 불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말하는 불교는 적과 동지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강력한 정신이다”
여러분들은 보수적인가?
분단 이후 우리나라에는 공식이 하나 있다.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면 북한과 대립이 완화되면서 북한과 교류하고, 거꾸로 정부가 보수화되고 민주화에 역행하면 북한과 대립을 한다.
민주화라는 건 한 사회에 억압과 억울함이 없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남북 대립이 완화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대통령이 평양에 갔다. 그것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명박 정부 때는 포를 쏘고 난리였다. 아직 우리사회에 ‘종북’이나 ‘좌빨’이라는 이야기가 쓰이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평화통일을 얘기해야 하고 평화통일 얘기하는 사람이 각 사회를 민주화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칼 슈미트는 판단의 잣대가 ‘적과 동지’로 나뉘면 ‘정치적인 것’이라고 했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적비판으로 분별의 기준을 나눴다면 슈미트는 ‘적’과 ‘동지’로 정치적인 분별을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점심시간에 같이 밥을 먹으러 가는 친한 사람은 동지, 끼면 짜증나는 사람은 적이다. 적과 동지는 집에서도 생기고 직장에서도 생긴다. 지역감정도 마찬가지이다. 내 편이냐 남이냐 구별하는 것은 다 정치적인 판단이다. 국회의원만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내 편과 남이 있는 이상 우리도 정치적인 인간이다.
요즘 인터넷에 ‘홍어’와 같이 호남을 비하하는 댓글이 정말 많다. 댓글에서 알 수 있듯 우리사회의 분열이 너무 심해졌다. 보수정치권의 담론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보수정치권 입장에서는 국민들이 계속 쪼개지고 대립해야 한다. 한 권력자가 백 명을 다스리는 것은 힘들다. 백 명을 깨알처럼 깨뜨려야 통치하기 쉽다. 적과 동지로 쪼개지는 건 누군가가 우리를 통제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다.
임진왜란이 왜 일어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 후 제후들의 분열과 도전을 무마하고자 한 것이다. 바깥에 적을 만들어서 내부가 동지가 되고 억압과 보수체제를 유지하는 것이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남한이 미사일을 쏘면 북한은 좋아한다. 외부 위협이 있으면 내부가 결속하게 되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는 어떤가? 박근혜 정부는 국가사회주의다. 군주가 내 백성을 보살피듯 잘해준다. 복지국가를 주창하지만 여기에도 위험요소는 있다. 복지국가는 너무 배타적이다. ‘우리는 가족이야’ ‘동지야’ 하게 되면 적이 생긴다. 내부를 동지로 묶으면 그 바깥은 적이다. ‘오늘 내가 강신주랑 슈미트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왔어’ 하는 이야기가 어느 누구에게는 소외일 수 있다. 묶이지 말아야 한다.
적과 동지를 잘 만들면 통제를 할 수 있다. 적과 동지는 지배의 논리로 쓰인다. 우리가 대립할 때 웃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달리 말하면 적과 동지를 넘어가야지 갈등이 완화되는 것이다. 유사 이래로 부당한 권력과 싸우는 사람은 무조건 적과 동지라는 분별에서 벗어나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래디컬한 게 그거다. 남과 북을 대립시킬 때 사회 내부가 억압적으로 간다. 통일과 민주화는 그래서 같이 가는 것이다.
우리가 적과 동지로 나눠지지 않는 방법은 저기서 벗어나는 거다. 사회에서 논객들이나 청와대 대변인들이나 상태 안 좋은 놈들이 여러분을 싸움에 말려들게 한다. 하지만 싸우면 안 된다.
적과 동지에서 벗어나는 것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 한 예수나 자비를 말한 석가모니처럼 적을 없애는 방법과, 그리고 아나키스트 슈티르너와 제자백가의 양주처럼 동지를 없애는 방법도 있다. 잊지 말자. 적과 동지를 무화할 때 평화의 전망이 온다.
부처가 비불교도라고 배척하던가? 아니다. 불교는 자비의 종교다. 적을 만들지 않는다. 또 불교는 무조건 믿고 따르라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부처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하는 것은 적도 없고 동지도 없는 상태인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예수도 마찬가지다. 이 범주의 특징은 적이 없으면 동지도 없어지는 거다. 적이 없으면 다 동지다. 다 동지면 동지라는 개념도 사라진다.
불교가 미래사회의 희망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불교는 강력한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죽었다 깨어나도 신자가 예수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불교는 성불을 할 수 있다. 화엄의 세계는 정치적으로 민주적인 세계다. 화엄의 세계는 장미의 획일화가 아니라 잡꽃들이다. 이 꽃들이 다 피는 게 화엄이다. 중이니 일반사람들이 없어지는 게 화엄세계다. 적도 아니고 동지도 아니다.
인문학의 정신 중 하나가 ‘신이 죽었다’는 니체의 말이다. 신이 죽어야 내가 신의 역량을 갖는다.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조사들은 부처를 ‘마른똥막대기’라고 했다. 부처를 모시는 게 아니라 부처가 돼야 한다는 거다. 아버지가 없어야 내가 어른이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성불하라고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부처가 돼야 한다는 말이다. 부처를 따르기만 하면 나는 부처가 안 된다. 영원히 선생을 따르면 선생이 못 된다. 성불하자는 말은 ‘석가모니’가 되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탱화 속 ‘그 자리’에 내가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것. 이 지점에서 앞으로 불교가 할 일이 많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