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태롭기가 불로 뛰어드는 나방이나
우물로 추락하는 아이와 같다.
사람의 피와 살이 뚝뚝 떨어지고
산하는 유리 쪽으로 부숴졌으며
모래 먼지가 비바람에 날린다.
날은 저물고 길은 궁한데
사람은 어디로 갈 것인가?
대종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홍암 나철은 구월산 삼성사를 찾아갔다. 후에 북한의 부주석이 된 김두봉이 나철 선생을 수행하였다. 한 민족의 뿌리이며 최고 조상인 환인·환웅·단군 삼성전에 이 민족을 구원해 주실 것을 기원하고 스스로 호흡을 끊고 혼을 띄어 순국하셨다. 어떤 종교인물도 스스로 호흡을 끊어 육신을 벗어난 경우는 보기 어렵다. 홍암 나철은 육신의 옷을 벗고 자유의 몸으로 한민족을 이끌기 위해서였다.

사진은 김교현과 그가 저술한 신단실기이다.
대종교 2대 교주로 김규현이 선출되었다. 그는 한민족이 일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 투철한 역사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군왕검을 시조로 하는 한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직접 서술하여 신단실기라고 이름하였다. 신흥무관 학교와 독립투사들은 신단실기를 가지고 한민족의 역사를 배웠다. 그들은 전투 중에도 가슴에 신단실기를 품고 있었다고 한다. 발해의 수도 동경성에 거대한 발해농장을 세우고 독립군들의 양식과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그들은 발해역사를 우리 역사로 편입시켜 통일신라가 아닌 남·북국시대로 불렀다. 고려는 려·금시대, 조선은 조·청시대로 불렀다. 중원을 정벌하여 한족을 통치했던 금나라와 청나라의 역사를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역사로 가르쳤던 것이다. 일제시대 우리 독립투사들은 대종교에서 수립한 민족교육을 받았다. 거란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만주족의 청나라를 한민족의 역사로 가르쳤던 것이다.

사진은 항일무장투쟁의 지도자 서일이다. 김좌진, 홍범도의 직속상관이 된다.
위대한 대종교의 주요 인물들이 친일파들에 의해서 우리 역사에서 묻혀 버린다. 독립투사의 빈자리를 친일세력들이 차지하는 웃지 못할 현실을 우리는 보고 있다.
대종교의 이러한 역사인식은 신채호와 박은식의 국학사상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한국사의 기틀이 된 박은식의 한국통사는 단군조선과 발해사를 우리 민족 역사로 끌어안았다. 신채호는 조선 상고사를 저술하여 역사를 망각한 민족은 모든 것을 잃게 된다고 국혼의 개념을 강조했다. 이들의 배경에는 대종교의 역사의식이 그대로 담겨 있다.
동국대 윤명철 교수는 말한다.
“그분들은 당시에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한자 실력도 출중해서 고대역사에 해박했고 그분들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 역사의 현장에서 직접 유물을 보고 기술했기 때문에 일제 식민교육을 받은 강단 사학자들보다 훨씬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사진의 왼쪽은 대종교 종무원장을 역임했던 김선적 어른이다. 김선적 어른은 어린 시절 이시영 선생집에서 머물면서 대종교 얘기를 들었다. 그 옆에는 통일교 박보희 선생이다. 오른쪽 두 번째는 현장 법사이다.
대종교는 하나의 종교를 넘어 한 민족의 정신무장이 되어 독립운동가들에게 빠르게 퍼져 갔다. 늘어나는 대종교인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포교지역을 네 개로 나누어 책임자를 파견했다.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민족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친일파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종교가 한민족을 구원할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자금으로 보내고 대종교에 귀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