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갖가지 괴로움
집착을 인연으로 생겨나네.
몰라서 집착하는
어리석은 자
되풀이해 괴로움으로 다가가네.
괴로움의 원인을 보았다면
자각하여
집착하지 말아야 하리.
- 숫타니파타 학인 멧따구의 질문에 대한 경

(ⓒ장명확)
불교는 종교가운데 유일하게 고통을 진리로 받아들인다. 불교 교리의 핵심체계인 사성제(四聖諦)의 첫 번째가 고성제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통이 성스러운 진리라니?! 불교는 어째서 고통을 진리의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을까? 고통을 대하는 입장이 일반적인 견해와 확연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고통과 즐거움이 함께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국제구호기구 광고에서 볼 수 있는 극도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난치병이나 교통사고 등으로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을 보면 인생은 고해라는 것을 수긍하게 된다. 반면 재벌이나 유명스타 등 인기인들의 호화스럽고 행복한 삶을 보면 인생은 즐거운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다만 행복한 사람보다는 괴로운 사람들이 더 많다는 어림짐작을 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부처님은 태자 시절 이른바 사문유관(四門遊觀)을 통해 노병사(老病死)의 괴로움을 목격하고, 이를 극복하겠다는 원력을 세운 후 안락이 보장된 삶을 버리고 수행자의 길을 걸으셨다. 부처님의 출가, 즉 위대한 포기는 이처럼 중생의 괴로운 삶에 대한 철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괴로움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괴로움과는 무게와 의미가 다르다. 단순히 즐거움의 반대 개념으로서 괴로움이 아니라 끝없는 윤회의 굴레 속에서 생사를 거듭하며 고통받는 한계와 구속, 속박, 불완전함의 의미를 갖고 있다. 다 알다시피, 인간은 태어남과 삶, 죽음조차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존재이다. 보통의 인간들이 즐거움으로 여기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들, 즉 식욕, 색욕, 재물욕, 명예욕, 수면욕 등 오욕락의 즐거움들은 잠시의 쾌락일 뿐 이내 고통으로 이어지는 허망한 것들뿐이다. 이런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하고 곧 사라져 중생은 또다시 갈애와 집착에 빠져 고락을 반복하면서 노병사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저 유명한 안수정등(岸樹井藤)의 우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곧 죽음을 맞이할 사람이 흘러내리는 꿀방울의 달콤함에 빠져 잠시 죽음의 고통과 공포를 잊는 것처럼 괴로움의 늪에 빠져있으면서도 순간의 쾌락에 정신이 팔려 뭇 중생들은 윤회를 거듭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사성제 가운데 첫 번째 진리로 고성제를 설하신 이유는 중생이 괴로움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것이 무명(無明)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의 시작이기 때문이며, 나아가 성스러운 괴로움의 진리라고 명명하신 것이다. 따라서 고성제는 현실이라는 삶을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통찰하는 것이며, 극복하고 벗어나야 할 세상, 즉 고해에 대한 처절한 문제의식에 다름 아니다. 문제의식이 없는 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도는 일어날 수 없으며 문제의식이 있을 때 문제의 극복을 향한 시도를 행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져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천상세계에서는 더 높은 행복, 즉 도(道)를 성취하겠다는 원력을 갖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온통 괴로움으로 가득 찬 지옥세계에서는 너무 괴로워서 깨달음을 성취하겠다는 엄두를 낼 수가 없다. 상대적으로 인간계에서는 괴로움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를 통찰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괴로움을 딛고 일어날 수 있고,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마음을 낼 수 있으며,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도, 도를 성취하겠다는 마음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괴로움은 불교에서 성스러운 진리로 받아들인다. 괴로울 때 외려 성스러운 진리로 나아갈 수 있는 마음이 일어난다. 괴로움이 다가왔을 때 회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마음을 활짝 열어 받아들일 때 비로소 새로운 길이 나타난다. 선가에서 자주 거론하는 백척간두진일보의 의미도 이와 상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성제 다음의 두 번째 진리인 집성제는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괴로움의 원인을 밝히는 가르침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여실한 통찰을 통해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단계이다. 사고팔고(四苦八苦)라는 괴로움이 생겨난 원인은 무엇일까. 괴로움의 원인은 끝없는 애욕과 갈애에 있다는 것을 밝힌 진리일까. 그러나 집성제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애욕과 갈애, 애착하고 탐착하는 욕망에 의해 오취온이라는 망상 덩어리가 모이기 때문에 갈애를 집성제라고 부른다. 갈애가 망상을 모아 오취온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성제는 단순히 갈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망념들이 모인 오취온을 말한다. <쌍윳따니까야> ‘도시경’에는 부처님께서 집(集)을 깨닫는 과정이 나온다.
“비구들이여, 그러자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식은 되돌아가 명색에서 더 이상 가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명색에 의지하여 식이 있는 한, 태어나고 늙어 죽고 죽어가고 다시 태어날 것이다. 식을 의지하여 명색이 있고 명색을 의지하여 육입이 있고 육입을 의지하여 촉이 있고… 노사가 있고 이와 같이 완전한 괴로움의 덩어리의 집(集)이 있다.
비구들이여, 집이다, 바로 집이다,라고 하는 예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안목이 생기고, 지식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밝음이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부처님께서는 괴로움 덩어리인 오취온은 망념이 모여서 나타난 것(集) 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오취온이라는 덩어리는 망념이 모여서 이루어진 괴로움의 덩어리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집(集)이라는 것을 사용한 것이다. 오취온이라는 고성제는 이렇게 집이라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오취온이 모이는 과정을 집성제라고 부르신 것이다.
이 시는 <숫타니파타>의 ‘피안으로 가는 길의 품’ 가운데 ‘학인 멧따구의 질문에 대한 경’에 등장한다. 간단하기는 하지만 고성제와 집성제의 가르침을 함축하고 있는 매우 심오한 내용의 시라고 할 수 있다. 멧따구 비구의 “이 세상에 있는 갖가지 괴로움이 있는데, 그것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입니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부처님께서는 이 시를 읊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