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왕켄뽀의 보성론 강의(012)//
강의 : 켄뽀 아왕상뽀
(북인도 둑 다르마까라 승가대학 교수사/ 서울 성북구 캄따시링 센터장)
번역 및 정리 : 자홍스님 (캄따시링 법회 통역)
교정 : 캄따시링 역경원(지성남, 김지아)

아상가 논사의 탱화
학생 : 마음과 여래장(如來藏)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켄뽀 : 『보성론』에서 말하는 여래장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바로 우리 마음속에 존재한다. 우리 마음의 본성, 즉 심자성(心自性)을 여래장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마음이 있는가? 이렇게 묻는다면, 모두가 마음이 존재한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은 형상도 없고 색상도 없다. 그러므로 눈으로는 볼 수 없다. 소리, 향기, 맛, 촉감도 없으므로, 들을 수 있거나, 맡을 수 있거나, 맛볼 수 있거나,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마음은 몸과 함께 머물러 있다고 하지만, 이 몸 안의 어디에 마음이 있는지는 그 누구도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마음을 아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마음을 여러분이 볼 수 있는가? 여러분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여러분의 마음도 나는 볼 수 없다. 서로 볼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스스로 자기 마음을 경험하여 아는 것이고, 이 마음이 움직여 그 작용이 표출되면, 신체와 언어의 행위가 나타난다. 그 행위가 있고 나서야 그것에 의지하여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조금도 요동하지 않을 때 드러나는 것이 마음이 자성(自性)이고 여래장이다. 이 마음의 영역 안에 머물지 못하고, 온갖 분별과 희론과 사고와 더불어 갖가지 현현이 나타나면, 이것을 일컬어 환상(幻相)이라고 한다.
학생 : 종성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까?
켄뽀 : 단종성(斷種性, Tib. rigs chad)인 사람이 실제로 있느냐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감뽀빠(sgam po pa bsod nams rin chen, 1079-1153) 대사의 『해탈장엄론』(thar pa rin po che'i rgyan)에서는 5종의 종성을 제시한다. 5종 종성은 ① 단종성 (斷種性, Tib. rigs chad) ② 부정종성 (不定種性, Tib. rigs ma nges pa) ③ 성문종성 (聲聞種性, Tib. nyan thos kyi rigs) ④ 독각종성 (獨覺種性, Tib. rang sang rgyas kyi rigs) ⑤ 대승종성 (大乘種性, Tib. theg chen gyi rigs)이다.
단종성에 대해 경전에서 말씀을 하고는 계시지만, 실제로 단종성인 중생이 있느냐고 하면 그렇지 않다. 여기서 단종성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종성의 단절일 뿐이다. 유정(有情)인 이상 마음이 있고, 마음의 본성이 여래장이다. 여래장은 자성주종성(自性住種性, Tib. rang bzhin gnas rigs, Skt. svabhāvasthānagotra)이다. 그러므로 여래장이 부재하는 유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종성이 없는 중생은 없다.
종성이 내재한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행복을 원하고 괴로움을 싫어하며, 고락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이는 마음이 있다는 증거이므로,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종성도 존재한다. 6도윤회(六道輪廻)의 영역 안에서, 설사 지옥과 아귀의 중생이라도 종성은 있다. 그 중생에게도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종성에는 크게 자성주종성(自性住種性)과 수증종성(隨增種性, Tib. rgyas 'gyur gyi rigs)이 있다. 자성주종성이 없는 중생은 없지만, 수증종성이 없는 중생은 있다. 믿음, 자비, 지혜가 전혀 없는 중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중생조차도 믿음과 자비와 지혜를 발현하지 않은 것일 뿐, 발현할 능력이 아예 없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단종성은 어디까지나 수증종성에 한해서 말하는 것이다. 노력해서 발전시키는 수증종성이 없을 뿐이다.
큰 바다와 같아서 무량한
공덕의 큰 보석의 다함없는 원천이니
불가분의 공덕을 갖춘
성품이므로, 등불과 같다. [1.42]
།རྒྱ་མཚོ་ཆེ་བཞིན་དཔག་མེད་པའི། །ཡོན་ཏན་རིན་ཆེན་མི་ཟད་གནས།
།དབྱེར་མེད་ཡོན་ཏན་དང་ལྡན་པའི། །ངོ་བོ་ཉིད་ཕྱིར་མར་མེ་བཞིན།
심자성(心自性)을 증득하면, 그 안에서 우리가 구하는 덕(德)들을 찾을 수 있는가? 분명히 찾을 수 있다. "큰 바다와 같아서 무량한 공덕의 큰 보석의 다함없는 원천이니"라고 하였다. 심자성은 비유하자면, 깊은 바닷속에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귀한 보석들이 가득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필요로 하고, 간절히 원하는 귀한 물건들이 그 안에 가득하다. 심자성은 깊은 바다와 같아서 참으로 심원하고 광활하며, 그곳에 내재하는 덕은 결코 다함이 없다.
그런데 바닷속의 진주와 산호와 같은 보석들은 바다 자체와는 별개의 사물이다. 그렇다면 심자성 속의 덕들도 심자성과는 별개인가? 별개가 아니다. "불가분의 공덕을 갖춘 성품이므로, 등불과 같다."라고 하였다. 마음의 자성과 내재하는 덕들은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이다. 두 가지는 서로 구분할 수도 분리할 수도 없다. 이 양상을 비유하자면 마치 등불과 같다. 등불의 빛과 등불 자체는 하나의 본질로 구분할 수 없다.
심자성(心自性)은 바다와 같고 그 안에서 우리가 구하는 덕이 무량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바닷속에 아무리 많은 자원이 존재한들, 그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채굴해서 사용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이 있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재하는 덕을 발현시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범부이다. 우리 범부의 마음속에는 행복이 있고 덕이 있다. 만약 마음에 내재하는 이 행복을 발현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바깥의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의 대상에 의해 얻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법신, 승리자의 지혜,
비(悲)의 계(界)가 모여 있으므로
그릇, 큰 보석, 물로써
바다와 유사함을 설하였다. [1.43]
།ཆོས་སྐུ་རྒྱལ་བའི་ཡེ་ཤེས་དང་། །ཐུགས་རྗེའི་ཁམས་ནི་བསྡུས་པའི་ཕྱིར།
།སྣོད་དང་རིན་ཆེན་ཆུ་ཡིས་ནི། །རྒྱ་མཚོ་དང་ནི་མཚུངས་པར་བསྟན།
불교에서는 행복을 찾고자 한다면 밖의 사물에서 찾지 말고 내 안의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고 한다. 지혜도 자비도 행복도 모두 이 마음속에 있다. 마음에서 이러한 덕을 발현하려면, 삼매와 지혜를 통해 이 마음을 고요하고 미세하게 만들어야 한다.
1.43에서는 여래장 곧 심자성에 구족 되어 있는 지혜, 삼매, 자비, 이 3가지 덕을 설명한다. 이러한 덕들이 마음속에 있으니 이것을 발현하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지혜, 삼매, 자비의 3덕은 밖으로부터 찾아서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다. "법신, 승리자의 지혜, 비(悲)의 계(界)가 모여 있으므로"라고 하였다. 첫 번째로 '법신(法身, Tib. chos sku, Skt. dharmakāya)'은 지혜의 덕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승리자의 지혜(Tib. rgyal ba'i ye shes, Skt. jina-jñāna)'는 부처의 지혜가 나오는 원천인 삼매를 의미한다. 세 번째는 '비의 계(悲界, Tib. thugs rje'i khams, Skt. karuṇādhātu)'는 자비(慈悲)이다.
또 다른 주석에 따르면, 1.43의 1,2행의 내용은 부처의 법신, 부처의 지혜, 부처의 대비(大悲) 3가지로 해석할 수도 있다. 법신은 부처의 위대한 깨달음(Tib. rtogs pa chen po)이며, 승리자의 지혜는 위대한 버림(Tib. spang ba chen po), 비(悲)는 위대한 자비(大悲, Tib. snying rje chen po)이다. 여래장 안에 이 3가지가 모여있다는 것은, 여래장이 이 3가지 덕을 모두 포섭한다는 의미이다.
"그릇, 큰 보석, 물로써 바다와 유사함을 설하였다."라고 하였다. 심자성은 그릇, 큰 보석, 물이라는 점에서 바다와 유사하다. 그릇 안에 내용물이 담겨있듯, 심자성은 모든 덕이 들어있는 그릇과 같다. 큰 보석으로부터 우리가 구하고 원하는 다양한 것을 구할 수 있는 것처럼 여래장으로부터 우리가 구하는 모든 덕이 나온다. 바다가 광대하고 심오하듯, 여래장도 광대하고 심오하다. 그리고 바다 안에 사람들이 열망하는 산호와 진주 같은 각종 보배가 내재하듯, 심자성(心自性) 안에도 귀한 것이 가득하다. 물은 갈증을 해소하고 곡식을 자라게 하며 깨끗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여래장도 마찬가지이다.
잠곤꽁뚤의 주석인 『불퇴사자후』(phyir mi ldog pa seng ge'i nga ro, BDRC, WA21961)에서는 1.30에서 말한 여래장을 발현시키는 4가지 원인과 연관하여 설명한다. "법신(法身)"은 법신의 원인인 믿음이며, "승리자의 지혜"는 승리자의 지혜를 성취하는 원인인 삼매와 지혜이고, "비(悲)의 계(界)"는 승리자의 대비(大悲)를 성취하는 원인인 비심(悲心)이라고 하였다. 믿음은 그릇과 같다. 그릇이 있으면 내용물을 담을 수 있듯이, 믿음이 있으면 법신이라는 내용물이 담길 수 있다. 삼매와 지혜는 보석과 같다. 보석이 있으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얻을 수 있듯이, 삼매와 지혜를 통해 부처의 지혜 등을 성취할 수 있다. 비심(悲心)은 물과 같다. 물이 있으면 다른 이의 갈증을 해소해 줄 수 있다. 비심(悲心)이 있기에, 유정 제자들에게 법을 가르치는 대비(大悲)가 일어날 수 있다. 바다는 많은 물이 담겨있는 거대한 그릇이며, 바닷속에는 온갖 귀한 보석이 가득하며, 온갖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물이 가득하다. 법신과 승리자의 지혜와 자비가 모두 여래장에 모여있으니, 마치 바다와 같다.
무구처(無垢處)에서, 통지(通智)와
무구(無垢)의 지혜는 진여와
불가분이기 때문에, 등불의
밝음 그리고 열기, 빛깔과 같은 성질이다. [1.44]
།དྲི་མེད་གནས་ལ་མངོན་ཤེས་དང་། །ཡེ་ཤེས་དྲི་མེད་དེ་ཉིད་དང་།
།རྣམ་དབྱེ་མེད་ཕྱིར་མར་མེ་ཡི། །སྣང་དང་དྲོ་མདོག་ཆོས་མཚུངས་ཅན།
"무구처(無垢處)에서"라고 하였다. '무구처(無垢處, Tib. dri med gnas)'란, 본래부터 청정한 심자성(心自性)·여래장이다. 왜 그것을 '처(處, Tib. gnas, Skt. āśraya)'라고 하였는가? 처(處)란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이 대지에 살아가고 활보하는 모든 중생들이 대지라는 토대에 의지하여 머물고 있다. 마찬가지로 본래부터 무구(無垢)하여 청정한 심자성(心自性)에 모든 덕이 의지하고 머물기에, 그 모두의 토대이다. 그러므로 심자성을 '처(處)'라고 한 것이다.
이 처(處)에는 어떤 덕이 의지하여 머물고 있는가? "통지(通智)와 무구(無垢)의 지혜는"라고 하였다. 통지(通智)와 신변(神變, Tib. rdzu 'phrul, Skt. ṛddhi)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 통지(通智)란, 세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인식이다. 아주 먼 곳의 소리를 듣기도 하고, 타인의 마음을 마치 눈으로 형상을 보듯이 보기도 한다. 신변(神變)이란 세간의 일반인들은 할 수 없는 신이한 행위, 예를 들어 하늘을 난다든가, 땅속에 들어간다든가 하는 일들이다. 통지를 얻으려면, 삼매에 오랫동안 숙달하여 마음이 지극히 미묘한 상태에 머물 수 있어야 한다. 분별망상과 조대한 생각들이 가라앉고, 마음이 매우 미세해지면 극히 미세한 대상도 볼 수 있다. 미세한 색과 미세한 소리, 그리고 극히 미세한 대상인 다른 이의 마음까지도 아는 통지(通智)가 가능하다. 그런데 통지(通智)는 삼매를 수행하여 없던 것이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심자성(心自性)의 영역 안에 본래 내재한다. 그러나 조대한 생각과 분별망상이 장애하여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무구(無垢)의 지혜'란, 곧 염오 됨이 없는 지혜를 의미한다. 세속법들을 모두 아는 지혜가 통지(通智)라면, 자성(自性)을 아는 마음은 무구(無垢)의 지혜이다.
"진여와 불가분이기 때문에"라고 하였다. '진여(眞如, Tib. de nyid, Skt. tathatā)'는 자성(自性)이고 실상(實相)이며 승의제이다. 통지는 세속제에 대한 앎이라면, 무구의 지혜는 승의제에 대한 지혜이다. 통지(通智), 무구의 지혜, 진여 모두는 나눌 수 없는 하나이며, 불가분의 양상으로 있다. "등불의 밝음 그리고 열기, 빛깔과 같은 성질이다."라고 하였다. 하나의 등불에는 밝음, 열기, 빛깔과 같은 여러 가지 특성이 있다. 그러나 그 모두는 본질이 하나이다.
여래장에는 덕이 내재하고, 그 덕과 심자성(心自性)·여래장은 단일한 자성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심자성에는 모든 덕이 모여있고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심자성을 믿고 확신하고 기뻐해야 한다.
범부, 성자, 정등각불의
진여성(眞如性)의 구분으로 작용하니,
진실을 보는 이는, 유정에게 있는
승리자의 이러한 핵심을 설하였다. [1.45]
།སོ་སོའི་སྐྱེ་འཕགས་རྫོགས་སངས་ཀྱི། །དེ་བཞིན་ཉིད་དབྱེའི་འཇུག་པ་ལས།
།དེ་ཉིད་གཟིགས་པས་སེམས་ཅན་ལ། རྒྱལ་བའི་སྙིང་པོ་འདི་བསྟན་ཏོ།
여래장의 10상(자성, 인, 과, 작용, 갖춤, 행입, 단계, 편재성, 상주불변의 덕, 무차별) 중에서 1.44에서 갖춤까지 설명을 마쳤고, 1.45부터는 6번째인 행입(行入)에 대해 설명한다. 계(界)·여래장(如來藏)은 불가분이지만, 여래장이 사람에게 발현함에 있어서는 3가지 경우로 분류할 수 있다. "범부, 성자, 정등각불의 진여성(眞如性)의 구분으로 작용하니"라고 하였다. 첫 번째 분류는 범부이다. 두 번째는 성자이다. 세 번째는 정등각불(正等覺佛) 즉 부처이다. 범부는 무아(無我)·공성(空性)을 직접적으로 깨닫지 못한 이들이다. 성자는 무아·공성을 이해하고 이해한 내용을 반복해서 수습(修習)하여, 무아·공성을 직접적으로 깨달은 이들이다. 그런데 성자들이 비록 무아·공성을 직접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미세한 장애인 소지장(所知障)을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은 부처라고 할 수 없다.
"진실을 보는 이는, 유정에게 있는 승리자의 이러한 핵심을 설하였다."라고 하였다. 범부도 진여(眞如)를 깨닫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분별(分別)로써 이해할 뿐이다. 성자는 진여(眞如)를 직접적으로 깨달았지만, 아직 모든 덕(德)을 구족 하지는 못했다. 미세한 소지장이 장애 하기 때문이다. 부처는 미세한 장애까지 남김없이 모두 제거했으므로, 모든 허물을 제거하고 모든 덕을 구족 한다. 반야부 경전들에서는, 성문도(聖聞道)를 닦고자 하는 이들도 반야바라밀을 익혀야 하며, 독각(獨覺)의 길을 닦고자 하는 이들도 반야바라밀을 익혀야 하고, 보살도를 닦고자 하는 이들도 역시 반야바라밀을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반야바라밀은 오직 한 가지만 있을 뿐, 따로 3종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반야에 들어가 깨닫는 사람 마음의 차별에 따라 구분되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여래장도 이와 같이 3가지 분류로 나타난다. 우선 분별로써 이해하고, 이해한 것을 반복해서 수습(修習)해서 직접적으로 깨닫고, 직접적으로 깨달은 것도 반복해서 수습하여 마침내 부처를 이룬다. 성불하면 여래장이 온전히 드러난다. 이러한 '진실을 보는 이'인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성불할 수 있는 여래장이 모두에게 있다고 설하셨다.
1.45 2행의 "진여성(眞如性)의 구분으로 작용하니"에 해당하는 범어 원문은, 대체로 참조하는 존스톤(E. H. Johnston)본에는 tathatā-vyatirekataḥ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진여와 분리되지 않음'으로 한문 번역의 '진여와 차별되지 않는다(眞如無差別).'에 대응한다. 반면 아상가 논사의 주석에서는 'tathatābhinna-vṛttitaḥ'라고 하고 있으며, 이것은 '진여가 구분되어 활동한다, 작용한다.'는 의미로, 티베트역에 대응한다.
범부는 전도(顚倒)되었고
진실을 보는 자는 그 반대이다.
여래는 있는 그대로 보시니
전도됨이 없고, 희론이 없다. [1.46]
།སོ་སོ་སྐྱེ་བོ་ཕྱིན་ཅི་ལོག །བདེན་པ་མཐོང་བ་བཟློག་པ་སྟེ།
།དེ་བཞིན་གཤེགས་པ་ཇི་ལྟ་བཞིན། །ཕྱིན་ཅི་མ་ལོག་སྤྲོས་མེད་ཉིད།
"범부는 전도(顚倒)되었고"라고 하였다. 범부는 부정(不淨)한 것을 청정하다고, 무상(無常)한 것을 상주(常住)라고, 불락(不樂)을 낙(樂)이라고, 무아(無我)를 유아(有我)라고 인식한다. 이러한 전도(顚倒)된 인식에 의해 착란된다. "진실을 보는 자는 그 반대이다."라고 하였다. 진실을 보는 이, 즉 성자들은 부정한 것을 부정하다고, 무상한 것을 무상하다고, 불락을 불락이라고, 무아를 무아라고 인식한다. 그러므로 범부의 전도식(轉倒識)과는 반대이며, 전도식을 제거한다. "여래는 있는 그대로 보시니 전도됨이 없고, 희론이 없다."라고 하였다. 여래는 실상(實相)을 있는 그대로 본다. 그러므로 전도됨이 없으며, 진실을 보느냐 마느냐의 희론(戱論)도 없다. 여래는 모든 희론에서 떠나 있다.
부정(不淨), 부정하면서 청정함과
실로 청정함의 순서대로이니
유정, 보살과
여래라고 말한다. [1.47]
།མ་དག་མ་དག་དག་པ་དང་། །ཤིན་ཏུ་རྣམ་དག་གོ་རིམས་བཞིན།
།སེམས་ཅན་བྱང་ཆུབ་སེམས་དཔའ་དང་། །དེ་བཞིན་གཤེགས་པ་ཞེས་བརྗོད་དོ།
"부정(不淨), 부정하면서 청정함과 실로 청정함의 순서대로이니 유정, 보살과 여래라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부정(不淨, Tib. ma dag pa, Skt. aśuddha)은,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 둘 중의 그 어떤 것도 청정해지지 못한 상태이다. '부정하면서 청정함(Tib. ma dag dag pa, Skt. aśuddhaśuddha)'은 소지장이 아직 청정하지 못하지만 번뇌장은 청정하다는 의미이다. '실로 청정함(Tib. shin tu rnam dag, Skt. suviśuddha)'은 미세한 소지장까지도 모두 청정한 것이다. 부정(不淨)한 유정은 여래장을 이해하지만 여전히 번뇌장도 소지장도 청정하게 하지 못한 범부 중생이다. 부정하면서 청정함은 보살들을 일컫는다. 실로 청정함은 여래(如來)에 해당한다. 도(道)에 들어가지 못했을 때부터 초지(初地)에 이르기 전까지를 범부 유정이라고 한다. 초지부터 10지(十地)에 이르기까지를 보살이라고 한다. 10지를 벗어나서 11번째 단계에 들어서면 성불(成佛)하며, 이제 여래가 된다.
중생과 보살의 차이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는 보리심(菩提心)을 심상속(心相續)에 발심한 순간부터 보살이라고 한다. 그러나『보성론』1.47에서는 승의(勝義)를 깨달았는지의 여부로 구분한다. 보살을 규정하는 방식은 3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우선 보살계(菩薩戒)를 수지(受持)하여 보살계를 성취하면 그 시점에서부터 보살이라고 칭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보살계를 받은 우리 일반 불제자들도 모두 보살을 자칭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경우는 어떠한 인위적인 노력 없이 보리심을 발심(發心)하면, 그때부터 대승(大乘)의 보살도(菩薩道)에 들어간 자라고 할 수 있다. 자연스러운 보리심이 생겨났을 때부터 대승(大乘) 5도(五道)에 입문하여 대승도(大乘道)를 시작한다. 세 번째는 보살 초지(初地)에 들어가서 성불(成佛)하기 전 10지(十地)까지를 보살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