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4대 여행기에 이름을 올린 위대한 한국인 여행가
세계 4대 여행기가 있다.
1. 7세기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
2. 8세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3. 13세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4. 14세기 이븐바투타의 여행기
혜초는 한국인 최초로 해양실크로드와 육로실크로드를 답사한 위대한 테마 여행가이다. 세계 4대 여행기에 이름을 올린 유명한 인물이지만 백 년 전에는 아무도 그 이름을 알지 못했다.
혜초와 그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은 어떻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을까?

인도 보드가야를 순례 중인 혜초스님 상상도
중국 돈황문서의 발굴은 꿈란동굴에서 발견된 사해문서와 함께 동·서 문명의 양대발굴로 평가한다. 사해문서는 초기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의 영성과 도마복음을 통해서 신의 아들이 아닌 스승으로서의 예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1900년 5월 16일 돈황석굴의 관리인 왕원록은 동굴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무심코 동굴 천장을 올려보다가 그는 의문에 빠졌다. 담배연기가 동굴에 가득 차야 되는데 동굴벽틈으로 연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벽면을 두들겨 보니 내부가 빈듯한 울림이 있어 곡괭이로 벽을 무너뜨렸다.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조그만 별실이 있고 그 안에는 5세기에서 11세기까지의 고대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문헌의 수는 사만여 점. 쓰여진 언어는 한문, 싼스크리트어, 티벳어, 소그디안어, 위구르어, 코탄어, 쿠차어 등이다. 그중 불교 문헌이 87.5프로, 도교문헌이 3.8프로, 유교문헌 0.9프로, 문학문헌 2.1프로, 나머지 4.2프로는 사원의 계약문서, 장부, 호적, 서간문 등이다. 이 문헌들은 돈황문서로 불린다. 세계 각지로 흩어진 문헌들을 마이크로 필름으로 촬영하여 250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편집하여 출간하였다. 돈황문서의 발견은 돈황학이라는 새로운 학문분야를 성립시켰다.

다섯 천축국 순례기
청나라 광서 26년 중국은 서구열강의 침략으로 극심한 혼란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사막의 동굴에서 고대문서가 발굴되었다는 보고서가 접수되었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맨 처음 돈황문서 정보를 접한 이는 중앙아시아를 탐험하던 영국인 스타인이었다. 그는 왕도사를 매수하여 상태가 좋은 문서들을 몇 푼에 매입하여 인도 델리를 거쳐 영국의 대영박물관으로 보냈다. 영국여왕 엘리자베스는 그의 공적을 높이 사서 공작 칭호를 부여하였다.
1908년 2월 프랑스령 베트남 하노이대학에서 동양학을 전공하던 펠리오에게 돈황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즉시 돈황으로 날아가서 왕도사를 매수하였다. 한문에 능통했던 펠리오는 석실 안에 자리를 잡고 자료 가치가 높은 문헌들을 가려내어 파리 국민도서관으로 보냈다. 그 문헌 속에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포함되어 있었다.
1912년 세 번째로 돈황문서를 찾아온 이는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였다. 그들은 키질석굴 등 중앙아시아 탐사유물과 돈황문서들을 수집하여 일본 교토로 가져왔다. 오타니 유물들은 다시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해방이 되자 그 유물들은 일본으로 가지 못하고 국내에 남게 된 연유이다. 용산에 있는 국립 중앙박물관의 중앙아시아 서역유물들은 그때 오따니 탐사단이 수집해 온 유물들이다. 오타니는 일본 정토진종 스님의 아들이다.
중국인들은 뒤늦게 돈황문서의 가치를 깨닫고 남은 문서들의 목록을 만들었다. 목록의 제목은 돈황겁여록. 도둑들이 훔쳐가고 남은 돈황문서의 목록이란 뜻이다.

혜초의 여행경로 해로를 통해 인도에 도착하고 파미르고원을 지나 장안에 도착한 행로이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북쪽으로 돌아가네.
구름 편에 편지 한 장 부치려 하나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없네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이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하늘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내 고향 계림으로 소식을 전해주리
당시 20대 초반의 배낭여행객 혜초가 머나먼 천축땅에서 고향 신라를 그리며 쓴 시이다. 왕오천축국전의 저자 혜초가 처음에는 중국의 구법승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일본인 학자가 위의 시를 보고 혜초는 신라스님이라고 학계에 발표하였다.
외로운 배 달빛 고 몇 번이나 떠나갔건만
이제껏 구름 따라 한석장도 돌아오지 못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