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명확)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죽음은 두렵기 때문이다.
그들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
괴롭히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라.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삶은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그들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
괴롭히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라.
- 전재성 님 옮김
‘부모라고 해도 자식을 때릴 권한은 없다.’ 이른바 ‘사랑의 매’에 익숙한 세대인 필자에게, 요즘 ‘핫’한 인플루언서(influencer) 오은영 박사가 최근 한 공중파 텔레비전에서 언급한 이 말은 하나의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세상 어느 누구도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할 권한을 갖지 못한다는 이 말은, 마음으로는 천 번 백 번 공감하지만 현실세계에서는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곱씹어볼수록 옳은 말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말처럼 당연한 말이 또 어디 있을까. 그래서 사람들이 여러 성현들의 ‘폭력은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반복해 배우고, 실천에 옮기려 노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맹자(孟子)>의 ‘사단(四端)과 인심(人心)’에 관한 언급에서도 폭력에 관한 가르침이 나온다.
“사람마다 모두 남에게 잔인하게 굴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선왕들은 차마 남에게 잔인하게 굴지 못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고, 그래서 차마 남에게 잔인하게 굴지 못하는 정치가 생겨났던 것이다. 차마 남에게 잔인하게 굴지 못하는 마음으로, 차마 남에게 잔인하게 굴지 못하는 정치를 실시한다면, 세상을 다스리는 일은 아주 쉽다. 사람마다 모두 차마 남에게 잔인하게 굴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는 까닭은 이러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성선설(性善說)의 배경이 되는 맹자의 이 가르침은 마음을 네 가지 단서로 설명하고 있는데,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이 그것이다. 이는 불쌍해하는 마음[仁], 부끄러워하는 마음[義], 양보하는 마음[禮], 옮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智]이다. 맹자는 네 가지 실마리는 불이 처음 타오르고 샘이 처음 솟아나는 것과 같아서, 진실로 그것을 확충시킨다면 온 세상을 편안하게 하기에 충분하고, 진실로 그것을 확충시키지 않는다면 부모를 섬기기에도 부족한 것이라고 역설한다.
남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잔인하게 구는 것이 잘못된 것이고, 반드시 금해야 할 행위임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살다 보면 지키지 못할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필자처럼 농사를 짓는 입장에서 볼 때 해균(害菌) 해충(害蟲)의 문제, 해조(害鳥)나 해수(害獸)의 문제 등은 풀리지 않는 화두로 등장하는 것이다. 고추농사를 망치는 담배나방이나, 콩잎을 다 갉아먹는 애벌레의 문제, 힘들여 파종한 들깨의 줄기를 싹둑 잘라놓는 벌레들을 어찌할 것인가? 애써 기른 땅콩을 날카로운 부리로 밭을 파헤쳐 망쳐놓는 까치와 산비둘기들, 고라니 등등….
이들을 내쫓거나 제거하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하는 것은 과연 잘못된 것인가? 아마도 부처님께서 설법한 대중들이 밭농사를 짓는 농부가 아니라 마음공부를 하는 출가 수행자였기에 가능한 가르침은 아닐까?
물론 원칙적인 입장에서 나온 부처님의 시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실생활에 적용하기에는 세속의 삶이란 다양하고 복잡하기 짝이 없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불교계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반영하는 일정한 기준을 제시할 필요가 있겠다.
그런데 사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이어지는 부처님의 시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부처님의 위 시에 이어 다음과 같은 시를 연이어 읊으셨다.
자신은 안락을 구하면서
안락을 바라는 존재들을
폭력으로 해친다면,
그는 죽은 뒤에 안락을 얻지 못한다.
이 시는 자신의 행복을 보장받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행을 부르는 씨앗이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농사는 오로지 자신의 행복을 보장받기 위한 것이기보다 작게는 가족, 넓게는 모든 사람들의 생계를 위한 일이므로, 농사를 짓는 데에 어떠한 폭력도 안 된다는 단순한 논리를 곧이곧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폭력은 어떤 이유로도 안 된다는 가르침을 담은 부처님의 이 시는 <법구경- 담마파다> ‘폭력의 품(Daṇḍavagga)’에 등장한다. 이 시는 부처님께서 사왓티 시의 제따 숲에 계실 때, 여섯 수행승의 무리와 관련되어 설해졌다. 주석서에 따르면, 한 때 열일곱 명의 수행승들이 승원에서 숙박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여섯 수행승의 무리가 와서 ‘우리가 연로하니, 우리 차지다.’라며 다른 수행승들을 때리는 일이 발생했다. 열일곱 명의 수행승들이 공포에 싸여 비명을 지르자 부처님께서 그 소란을 듣고 ‘무슨 일인가?’라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부처님은 구타에 대한 학습계율을 ‘수행승들이여, 지금부터 이러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일을 행하는 것은 죄악이다. 내가 그렇듯이 다른 사람도 몽둥이를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죽여서는 안 된다.’라고 정하시고는 이 시를 읊으신 것이다.
- 시어 ‘폭력’은 본래 ‘몽둥이’나 ‘회초리’를 의미하는 것에서 유추된 용어이다. 그런데 역자 전재성 님은 이것을 폭력으로 의역했다. 본래의 의미를 더 살린 빼어난 번역이다.
- 시구 ‘모든 존재들에게 죽음은 두렵기 때문이다.’는 예외 없이 모든 존재에게 죽음은 공통적으로 두려움이라는 의미이다. 다만 여기에도 예외가 있는데, 거룩한 님, 즉 아라한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성자이다. 아라한에게는 자아에 대한 신체적 관념이 사라져서 죽어야 하는 존재를 자신에게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시구 ‘그들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는 폭력을 당해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모든 생명들의 입장이 되어 너 자신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라는 말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로 폭력의 부당함을 알아차리라는 준엄한 명령이다.
- 시구 ‘모든 존재들에게 삶은 사랑스럽기 때문이다.’는 번뇌를 소멸한 거룩한 님을 빼놓고는 모두에게 삶은 사랑스럽다는 말이다. 번뇌가 소멸한 경지를 얻은 성자는 사람과 죽음에 집착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