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빵까라 붓다의 예언

(삽화 정윤경)
아난다는 누군가에게 말하기보다는 듣기를 좋아했다. 어린 시절부터 남 앞에 서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곤 했던 성격 탓이었다. 출가해서도 사형, 사제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 아니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스승 붓다의 말씀을 제자 비구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세세하게 기억하는 ‘붓다의 말씀을 가장 많이 들었던 제자(多聞第一)’가 되었는지도 몰랐다. 물론 기억한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은 달랐다. 아난다만 해도 그랬다. 수다원이었던 기원정사 시절과 아라한이 된 지금 칠엽굴에서의 이해 수준은 확연히 차이가 났다. 아난다는 샘솟는 기운과 자신감이 충만하여 암송을 계속했다.
<스승 붓다께서 물으셨다.
수부띠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존경받을 만한 사람, 올바로 깨달은 사람인
디빵까라 붓다(燃燈佛) 밑에서 얻은 무엇이 있을까?
수부띠가 대답했다.
스승이시여, 그러한 것은 없습니다.
여래가 존경받을 만한 사람, 올바로 깨달은 사람인
디빵까라 붓다 밑에서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난다를 언제나 가장 자애롭게 맞아주는 사형은 예나 지금이나 수부띠였다, 수부띠는 아난다뿐만 아니라 어느 비구라도 너그럽게 상대해 주었다. 그러니 수부띠와 논쟁을 하는 비구들은 거의 없었다. 설령 논쟁하려고 수부띠에게 왔다가도 수부띠의 온화한 모습을 보고서는 입을 다물었다. 아난다는 수부띠에게 디빵까라 붓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디빵까라 붓다는 고따마 붓다 이전에 나타난 24명의 붓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고따마 붓다가 디빵까라 붓다를 만났던 때였다. 어느 전생에 살던 고따마 붓다의 이름은 수메다(善慧)였다.
수메다는 큰 부호인 장자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수메다가 어릴 때 부모 모두 많은 재산을 남기고 죽었다. 장례를 마치고 난 집사는 7대에 걸쳐 상속해 온 재산을 수메다에게 낱낱이 알려주었다.
그러나 수메다는 집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집사가 나간 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들은 왜 가져가지도 못할 재산을 모았을까? 나는 이런 눈에 보이는 재산은 관심이 없지. 죽어서도 가지고 갈 수 있는 재산은 없는 것일까?’
수메다는 ‘죽어서도 가지고 갈 수 있는 재산’을 찾기 위해 출가하기로 결심했다. 물려받은 재산은 집사와 상의한 뒤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다. 그러자 짐을 놓은 듯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수메다는 흰 눈을 머리에 인 히말라야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 뒤 숲 속에서 홀로 수행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주는 음식만 먹었다.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면 몇 날 며칠을 굶주렸다. 그래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마침내 수메다는 자신과 우주가 하나 되는 희열을 맛보았다.
그 무렵, 디빵까라 붓다가 출현했다. 디빵까라는 ‘어둠을 밝혀주는 빛의 성자’라는 뜻이었다. 디빵까라 붓다는 삼독을 여읜 많은 구도자들을 데리고 람마왓티 도시에 있는 수닷사나(善現精舍)에 머물고 있었다.
수메다는 디빵까라 붓다를 경배하기 위해 수닷사나를 찾아갔다. 수메다는 디빵까라 붓다에게 꽃을 공양하려고 했으나 구하지 못했다. 그 나라 왕이 디빵까라 붓다에게 꽃공양을 하려고 꽃가게들의 꽃들을 전부 사들였기 때문이었다. 수메다는 람마왓티 거리의 사람들에게 어디서 꽃을 구할 수 있냐고 수소문했다.
어떤 행인이 구리 여인에게 가면 꽃을 구할지도 모르겠다고 알려주었다. 수메다는 모든 꽃가게를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우물에서 물을 긷는 노비 구리 여인을 만났다. 그녀는 일곱 송이 우발라꽃을 병 속에 숨기고 있었다. 수메다는 신통력으로 병 속의 꽃이 저절로 드러나도록 했다. 수메다는 구리 여인에게 꽃을 팔라고 말했다. 그러나 구리 여인은 디빵까라 붓다에게 좋은 남편을 만나게 해달라고 빌고자 사둔 꽃이라며 팔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수메다는 금생은 자신이 수행자이므로 안 되고, 내생에는 붓다가 될 때까지만 부부가 되자며 구리 여인을 설득해서 우발라꽃 일곱 송이를 구했다. 다섯 송이는 수메다 자신의 성불을 위해 공양하고, 두 송이는 두 사람이 내생에 부부가 되고자 공양하기로 했다.
수메다와 구리 여인은 디빵까라 붓다가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 가슴을 졸였다. 이윽고 가까이 다가오자 일곱 송이 우발라꽃을 디빵까라 붓다에게 던졌다. 그런데 꽃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 떠서 일산이 되어 디빵까라 붓다를 따라 움직였다. 사람들이 놀라서 합장했다. 그때 디빵까라 붓다가 물이 고인 진흙탕 길을 지나려고 했다. 수메다는 바로 자신의 옷을 벗어 진흙탕 길에 깔았다. 그래도 부족하자 자신의 긴 타래머리를 풀어 진흙탕 길을 덮었다. 수메다의 옷과 그의 타래머리를 밟고 지난 덕분에 진흙이 한 점도 묻지 않게 된 디빵까라 붓다가 말했다.
“이 젊은 구도자는 내세에 붓다가 될 결심으로 수행하고 있는 보살이오. 먼 훗날 까삘라와스뚜에서 태어나 샤까모니 붓다가 될 것이오.”
라마왓티 사람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아, 나도 수메다처럼 저렇게 입고 있던 옷까지 내주고, 머리카락까지 내준다면 먼 미래에는 성불할 수 있겠구나! 세세생생 착한 업을 쌓는다면 붓다가 될 수 있겠구나!
수부띠는 수메다의 선업이 붓다가 되게 했지, 디빵까라 붓다에게서 무언가 진리를 배워서 붓다가 됐다고 생각지 않았다. 수메다는 디빵까라 붓다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싶은 마음은 애당초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옷을 벗고, 타래머리를 풀어 진흙탕 길을 덮음으로써 디빵까라 붓다에게 자신 안에 있던 지극한 선(善)과 순간의 지혜를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스승 붓다께서 말했다.
“수부띠여, 만약 어떤 구도자가
‘나는 불국토를 장엄하리라’고 말했다면,
그는 잘못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수부띠여, 여래는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라고 설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바로 ‘불국토의 장엄’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부띠여, 구도자, 훌륭한 사람들은
집착 없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감촉이나, 마음의 대상에
집착된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수부띠여, 예컨대 여기 한 사람이 있어,
그 몸은 균형이 잘 잡히고, 크고, 산 중의 왕 수미산과 같다고 하면,
수부띠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의 몸이 큰 것일까?”
수부띠가 대답했다.
“스승이시여, 그것은 크다 하겠습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그 몸이야말로 크다 하겠습니다.
스승이시여, 여래는 ‘몸은 몸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바로 ‘몸’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스승이시여, 그것은 실로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바로 ‘몸’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아난다는 붓다와 수부띠의 대화를 이제는 이해했다. 무아 상태가 된다면 집착할 것이 없으리라. 자아가 없으므로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감촉이나, 마음의 대상 등 어디에도 집착이 붙지 못할 터. 본질적으로 모든 존재는 유(有)나 무(無)가 아닌 공(空)할 뿐이고, 현상적으로 그저 ‘몸, 수미산’ 같은 명사와 ‘크다, 장엄하다’ 같은 형용사와 ‘가다, 오다’ 같은 동사만 지각하는 것이리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