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봄 응송 스님이 떠난 후, 승주 골짜기에서 홀로 차를 만들게 된 나로서는 마치 노를 잃은 배와 같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든 것이 막막했다. 차를 만들기 위해 솥이 뜨거워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가슴이 쿵쿵 울렸다. 노스님의 빈자리는 상대적으로 커 보였다.”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 남겨진 제자의 막막함이 잘 표현된 구절이다.
“무쇠솥에 찻잎을 넣고 깊고 신중하게 대나무로 만든 솥에 정신을 집중해보았다. 하지만 옛날의 그 느낌이 아니었다. 때마침 열을 받은 찻잎이 순간순간 변하는데, 그 충격과 두려움으로 어찌할 줄 몰랐다. 이미 변화무쌍한 불과 찻잎의 기세에 눌려버린 것. 아, 어떻게 하나! 눈을 감고 천천히 대나무 솥을 저어보았다. 이때 손끝으로 전해오는 찻잎들이 익어가는 순간의 느낌이 다시 살아나면서 차츰 두려움이 사라졌다.”
스승으로부터 전게는 받았으나, 어슴푸레 했던 모든 것들이, 마침내 정진을 거듭한 끝에 확연히 밝아오는 오도의 순간이라고나 할까. 무공(無空, 박동춘 선생의 호)이 비로소 초의다맥의 적통으로 거듭 나는 순간이었다.
아마도 무공은 이 순간 자신에게 초의다맥의 전승과 부흥을 부촉한 스승 응송 대화상의 다도전게(茶道傳偈)를 떠올렸을 것이다.
전함이 없는데도 전했으며 받음이 없는데도 받은 것이라
전함이 없으니 그러므로 참으로 전한 것이요
받음이 없는 고로 참으로 받은 것이니라
無傳而傳 無受而受 無傳故 眞傳 無受故 眞受
초의, 응송으로 이어지는 초의차맥을 잇고 있는 무공 박동춘 박사.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소장 박동춘 선생이 묵직한 ‘차 책’ 한 권을 펴냈다. 박사논문이 통과되고 화봉학술문화상을 받는 등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선생이 어느 틈에 또 책을 내다니! 보통 사람의 내공으로는 참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책 <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동아시아)의 깊고 넓은 내용이다.
‘다산과 추사가 사랑한 초의 선사의 우리 茶 기행’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추천의 글을 써준 변영섭 고려대 고미술학과 교수이 말씀마따나 “차를 통해 한국의 정신이 이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이상, 그 ‘맑고 시원한’ 경지를 향하여 나가는” 커다란 한 족적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박동춘 선생은 이 책을 내며 세상을 향해 묻는다.
“곧 햇차를 딸 때입니다. 우리 차의 문화적 향기와 인문학적 깊이를 아십니까?”
꽤 오랜 시절 차를 마셔왔으나 이른바 풍류다인을 지향한다는 핑계로 공부를 게을리 해 어깨너머 차인의 범주에 머물러 있는 내겐 비수처럼 가슴을 헤집는 물음이다.
그렇다. 이 책은 바로 우리 차의 문화적 향기와 인문학적 깊이를 천착한 역저다. 차를 아무리 오래 마셨다고 해도 우리 차의 문화적 향기를 모른다면, 우리 차에 깃든 인문학적 깊이를 모른다면 진정한 차인의 반열에 올랐다고 볼 수 없을 것이기에, 그런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선생은 이 책에 담아낸 것일지도 모른다.
박동춘 선생은 매사가 정확한 분이다. 그러나 그의 언행이나 저술 또한 매우 학술적이고 전문적인 것이어서 대중과의 교감에는 일정한 한계도 없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대중적 눈높이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박동춘 선생이 대중과 함께 우리 차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첫 작업의 결실인 셈이다. 우리 차 제다법의 적통이자, 초의선사의 다맥을 잇는 선생이 이 책으로 인해 마침내 우리(대중) 곁으로 성금 다가온 것이다.
선생은 최근 박사 논문을 마치고 초의선사와 인연이 있는 곳을 답사할 기회를 가졌다. 이 여정은 자신의 다도 인생 30년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지만, 이 소중한 시간이 선생의 골수를 거쳐 손끝을 통해 세상으로 나왔으니, 다름아닌 이 책에 실린 주옥같은 글들이다.
초의차가 산사를 통해 전해져 내려온 만큼 대흥사, 칠불암, 쌍봉사, 학림암, 기림사 등 산사가 책의 배경을 이루는 풍경의 주를 이루지만, 그 풍경을 채워넣는 알맹이들은 다름 아닌 차와 시로 채색된 문화사 혹은 인연사들이다. 또한 강진 다산초당에서 청년 시절의 초의에게 시학과 주역을 가르쳐준 다산 정약용과 평생 초의를 후원해준 다산의 아들들, 초의와 동갑내기로서 평생을 지기지우로 지내며 맑은 정신의 세계를 교감했던 추사 김정희, 절창의 시문으로 ‘초의차’의 웅대한 경지를 묘사했던 박영보와 신위, 황상 등 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또한 이 책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산사를 통해 명맥을 이어온 우리 차의 진수가 조선 후기 눈 밝은 사대부들을 만나 하나의 ‘문화’로 만개해나가는 광경은 초의, 다산, 추사라는 걸출한 세 인물의 숨겨진 곡절을 전해 듣는 일만큼이나 깊은 감흥을 전해준다.
차를 만드는 명인이자 차 이론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외길 인생을 걸어온 저자 박동춘 선생은 이 책을 통해 그들이 중흥시킨 ‘차 문화’를 조형하며 한국 전통차의 향방을 되묻고, 옛 선인들이 그랬듯이 탁마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 알다시피 ‘초의차’는 단순한 차가 아니라 정신적 가치를 내장한 수행 음료이며, 나아가 수행삼매로 이끄는 매개체였다. 초의는 이러한 구도 정신을 담아 필생에 걸쳐 ‘초의차’를 완성했으며, 그가 터득한 차의 실증적인 증험을 체계화했다. 그렇기에 ‘초의차’는 우리 차의 효능이 중국차보다 우수하다는 자신감을 드러내기에 충분할 만큼 ‘맑고 시원’했다. 추사 김정희는 초의차를 마신 후 ‘심폐가 시원하다’고 했을 정도다.
초의의 후학이자, 그의 차의 품격을 되살려내고 있는 박동춘 선생은 이 책에서 보다 품격 높은 차를 완성하기 위해 초의의 족적을 따라 걷는다. 선생의 발끝과 손끝을 통해 ‘차란 무엇인가’를 묻는 저 초의와 응송의 심장한 화두가 우리 시대 차인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청나라 문물에 밝고 화통했던 추사, 차와 시를 통해 추사와 깊은 교유를 맺은 초의, 그리고 다산.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이들만이 보유한 차원 높은 정신의 세계가 때로는 언어로, 때로는 차향으로 서로를 강하게 진동시켰던 당대의 대가들, 초의와 교유했던 북학파 경화사족 등과 차를 매개로 나누고 함께 향유했던 인문학의 향훈이 이 책에 가득차 있다.
초의의 차를 둘러싼 인연의 계보는 크게 보면 다산과 초의로 이어지는 종적인 만남, 초의와 추사, 그리고 당대의 문사들로 이어지는 횡적인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나이와 세대를 넘고 신분과 이념을 넘으며 유불선이 한 데 만나는 이 교유의 네트워크는 고매한 정신의 세계를 공유하며 서로의 자긍심을 키워나갔다고 저자 박동춘 선생은 말한다.
이들이 나눈 이 멋들어진 세계, 초의차를 통해 펼쳐지는 인문학의 세계로, 차가 만들어지는 이 맹춘지절에 흠뻑 빠져보시라! 19,8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