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같은 붓다

(삽화 정윤경)
아난다는 눈이 부셨다. 라자가하 중천에 뜬 해가 강한 햇살을 칠엽굴에 쏟아붓고 있었다. 햇살은 잔물결처럼 빠르게 칠엽굴 안으로 흘러들었다. 5백 장로들의 모습이 비로소 환히 드러났다. 마하깟사빠, 사리뿟따, 수부띠, 목갈라나, 라훌라 등의 이목구비가 햇살에 도드라졌다. 갑자기 밝아진 동굴 안은 인간계가 아니라 천상계 같았다. 산 정상에 있는 칠엽굴의 위치가 그런 기분을 들게 했다.
맨 안쪽에 앉아 있던 아난다는 5백 장로들이 강한 빛살에 적응할 때까지 잠시 침묵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암송했던 붓다가 설한 말씀을 하나라도 빠뜨린 것이 없는지 살폈다.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해 낸 붓다의 말씀도 있을 터였다. 그래도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붓다의 말씀만이라도 최선을 다해 암송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명 기억의 한계는 있겠지만 붓다의 말씀을 한 마디라도 왜곡하거나 생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기원정사 시절에 자신이 이해했든, 이해하지 못했든 사실대로 기억해 내어 5백 장로에게 추인의 합송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강렬한 햇살이 동굴 안에 가득 들어차자 박쥐와 도마뱀은 더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 5백 장로들이 강한 햇살에 적응이 됐는지 얼굴마다 미소를 띠었다. 붓다가 설한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를 계속 암송하라는 무언의 표정이었다. 아난다는 바로 조금 전에 ‘뗏목의 비유를 아는 자는 법조차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하물며 법 아닌 것에 있어서랴.’라고 했던 뒷부분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또 다시 스승 붓다께서 물었다.
“수부띠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위없이 바른 깨달음으로 알고 있는
그 어떤 법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또 여래가 설한 법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가?”>
기원정사 시절, 아라한이 되지 못했던 아난다는 그때 하마터면 마음속으로 대답할 뻔했던 적이 있었다. “예. 스승님은 위없이 바른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얻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스승님을 저희 비구제자들은 붓다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할 뻔했던 것이다. 그러나 장로 수부띠는 “예. 스승님은 아무것도 새롭게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셨을 뿐입니다. 스승님은 어떤 바라문도 설한 적이 없는 진리를 설하셨습니다.”라고 아난다와 반대로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것이 바로 아라한이 되지 못했던 아난다와 장로 수부띠의 차이였다.
<수부띠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스승님의 말씀을 제가 이해한 바로는
그런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깨우치시고 가르치셨다고 하는 법은
온전히 인식할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법도 아니며, 법 아닌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자들은 절대 무위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아난다는 대답하는 수부띠의 단호한 표정을 기억하면서 암송했다. 실제로 수부띠는 붓다가 위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었느니, 얻지 않았느니 하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붓다가 깨달은 위없이 바른 법을 이해할 수 없는 수부띠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수부띠 입장에서 ‘그런 법은 없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붓다의 위없는 바른 깨달음은 온전히 인식할 수도 없고, 완벽하게 말로 표현할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때 수부티는 붓다의 존재를 텅 빈 거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거울에 비친 무엇(법)이나 무엇 아닌(비법) 것을 붓다의 깨달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수부띠는 “법도 아니며, 법 아닌 것도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었다.
아난다는 햇살이 자신의 머릿속을 투과하는 듯한 체험을 순간적으로 느꼈다. 가슴에 환희심이 차올랐다. 장로 수부띠의 대답 중에 “성자들은 절대 무위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라는 부분을 이제야 칠엽굴에서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아라한이 되지 못했다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수부띠의 대답이었다.
‘스승 붓다를 비롯하여 모든 성자들은 절대 무위의 법을 쓰시는 분들임에 틀림없구나. 성자들의 절대 무위란 텅 빈 거울이 아닐까. 법이나 비법을 그대로 비춰줄 뿐 아무것도 취하지 않고, 말하지 않고, 어떤 작위도 없으니 말이다. 성자들은 침묵하는 거울처럼 존재하시는구나.’
암송을 한 단락 마친 아난다는 우물물을 마시듯 정오 직전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맑은 공기도 아난다에게는 공양물이었다. 시원한 우물물도 아난다에게는 공양물이었다. 꽃이 퍼뜨리는 향기도 아난다에게는 공양물이었다. 자연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기만 할 뿐이었다. 5백 장로가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짧은 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지만 아난다는 전광석화처럼 스스로 묻고 자답했다.
‘스승 붓다는 거울과 같이 완벽한 무위 그 자체이시구나. 세상의 모든 존재를 다 받아들이되 흔적이 없구나. 아무것도 의도하시지 않기 때문이구나. 그래서 온 세계가 붓다 안에 온전히 비치는 구나.’
‘아, 붓다는 달과 같은 분이시구나. 태양빛을 그대로 반사하는 달처럼 자애롭고 아름다운 분이시구나.’
‘나는 물론이고 5백 장로들도 붓다처럼 거울이 되어가는 길목에 있구나. 달이 되어가는 길목에 있구나. 무엇을 깨달았고, 누구를 깨닫게 했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면서 무위법으로 살아가는 길을 배우고 있구나.’
아난다는 잠시 5백 장로를 보지 못했다. 강한 햇살에 눈이 잠깐 부셨기 때문이었다. 눈이 한순간 깜깜해진 사이에 여러 단상들이 파도치듯 솟구쳤다가 바로 잔잔해졌다. 아난다는 붓다의 말씀을 기억하고 암송하는 것만도 행복했다. 그러고 보니 붓다를 친견한 뒤 25년 동안이나 시봉 했던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자신이 시봉 했던 기간이든 아니든 간에 붓다의 출현 자체가 기적이었다. 어느 때인가 어떤 바라문이 붓다를 찾아와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우리 바라문처럼 왜 기적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붓다를 당황하게 하려는 바라문의 도발적인 질문이었다. 물 위를 걷는다거나, 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 기적을 보여준다면 사람들이 더욱더 붓다를 추종할 텐데 왜 그러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때 아난다는 붓다가 무슨 말을 할지 긴장했다. 바라문도 불쑥 질문을 던져놓고 자신이 무례했다고 생각했던지 전전긍긍했다.
그런데 붓다는 달빛처럼 미소를 지었다. 바라문을 탓하지 않았다. 그를 안심시켰다. 그런 뒤 바람결 같은 한 마디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내가 기적이라오.”
“네?”
“당신도 기적이라오.”
지금 살아 있는 세상의 모든 생명이 기적이라는 말이었다. 왜 그럴까? 아난다는 그에 대한 해답을 거울에서 찾았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절대 무위로 돌아갈 수 있으니 기적인 것이었다. 거울처럼 살았던 붓다는 제자들에게 지금도 거울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음이었다. 자애롭게 빛나는 달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었다.
아난다는 호흡을 길게 내쉬었다. 한 호흡 사이에 또다시 영감이 솟구쳤다. 아난다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그렇구나. 붓다는 그 자체로 거울이고, 구도자 보살은 거울이 되어가는 길목에 있구나.”
아난다는 나직하게 말했지만 5백 장로는 벼락같은 소리로 들었다. 5백 장로 모두가 가부좌를 바르게 한 뒤 다시 아난다에게 집중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