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매의 향기를 피리소리로 듣는다

                                                         정찬주(소설가)

삽화 정윤경 

유동영 사진작가와 함께 부산을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아내도 동행했다. 아침 9시쯤 이불재를 출발하여 뜨는 해를 바라보며 동진했다. 볼 일을 보고 오후 4시쯤 지는 해를 바라보며 서진해 이불재로 돌아왔다.

유 작가에게 우리 불교계에 걱정거리 얘기를 듣고는 선악의 이분법 내지는 단면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일원론적 입체적으로 들여다보기를 권했다. 어린 시절에 익혔던 <명심보감>의 한 구절을 들려주기도 했다.

天不生無祿之人

地不長無名之草

하늘은 녹봉 없는 사람을 낳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기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유무정물은 천지간에 다 쓸모(존재 이유)가 있다는 뜻이라고 얘기해 주었다. 덧붙여 70을 살아보니 세 가지만 잘해도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평을 듣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일의 가볍고 무거운 경중(輕重)을 가릴 줄 알고, 일의 앞과 뒤인 선후(先後)를 살피고, 살아가는 동안 나아가고 물러서는 진퇴(進退)를 잘하는, 그것이 바로 허물을 줄이는 인생이 아니겠냐고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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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가을 가마에서 나온 그림이 있는 매병(梅甁) 들이다. 아내는 그림이 들어간 도자기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아서 내가 거실로 옮겨온 것들이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금언이 있다. 이번 장작가마 불을 때고 난 뒤 문득 실감한  말이다. 형태와 빛깔이 괜찮은 두 점이 부산으로 갔는데, 결과적으로 아내가 도자기 작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동력과 응원이 되어준 인연이 됐다. 

아내가 행복해하니 나까지 덩달아 행복해지는 것 같다. 

내 장편소설 <아소까대왕> 이 2023년 만해축제 기간에 상금이 적잖은 '유심작품상'을 수상했을 때 아내의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부부란 존재양식적으로는 0(空)촌이라지만, 관계 양식적으로는 0(空)촌 이상의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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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끔 습작시(習作詩)를 가져와서 차담을 나누던, 현직 고등학교 교사인 보림(寶林) 김기완 선생 부부와 고흥 나로도항에서 여수의 백리섬섬길을 다녀왔다. 이불재에서 부부 동반으로 오전 10시 30분에 출발했는데, 나로도항 한 식당에서 보림 부부가 권유한 식사를 하고, 여수 적금도(積金島) '섬섬길카페'에서 한려수도 바다와 섬들이 한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들어진 해우소에 앉아 근심을 내려놓고 낭도(狼島)를 들어갔다가 되돌아 나와서 귀가하니 어둑한 초저녁이다. 운전을 해준 보림의 호의로 이루어진 외출이자, 올해 첫 번째 송년회를 한 것 같다. 아내 역시 가을가마 작업이 끝나고 난 뒤여서인지 홀가분해 하는 모습이다.

나는 이동 중에 승용차 안에서 보림 아내에게 몇 가지를 조언해 주었다. 무슨 글이든 보림의 첫 독자이자 남편에게 문학평론가의 역할을 해달라고 했다. 두 번째는 시가 보림을 구원할 것이고, 시가 보림을 영생케 할 것이라고 말했다. 헤어지면서 보림이 시 한 편을 내민다. 지난번 차담 때 의견을 나누었던 시로서 많이 매끄러워졌다. 여기에 그의 시를 소개한다.

<화형식>

파도소리 홀로 이는 바닷가에

장작 너댓개 불피울 준비를 한다

마른 장작 엇갈리게 쌓아놓고

안쪽은 비워놓는다

좁았던 가슴 어둑한 공간에 불 올려,

타오르는 불꽃 너울 사이로

겨울 길손인 하늘꽃이 나풀나풀 찾아들 때

타인에게 해가 되는 탐욕들 하나하나 떼어내

주황과 어우르는 시퍼런 잉걸불에 떨쳐 버리느니

욕망이 사라지며, 작별의 손을 흔드는 모습 본다

내 깊은 곳에 고름으로 자리한 탐욕을 끄집어내

화형식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뜨거운 열망

너와 나에게 온기를 주는 모닥불이듯

턱없는 욕심 덩어리 붙잡아 재가 되도록 태워야 한다

타는 불꽃 속에 너울너울 살풀이 춤추듯 비워내고선

다시, 너와 내가 바라는 바람으로 타올라야 한다

푸른 싹 솟아나 "안녕, 반가워"라고 말해야 한다.

* *

군 복무를 마친 대학시절, 1977년 초겨울 쌍봉사로 내려와 소설 습작을 하면서 화재(1984년)가 나기 전의 대웅전 앞에서 당시 주지스님, 공양주보살, 한 청년, 그리고 내가 기념사진을 남긴바, 3층목탑 형식의 대웅전이 일제강점기 때 옛 모습 그대로 보인다.

칼라가 선명한 사진은 2023년 가을에 내가 구도를 잡아본 쌍봉사 대웅전이다. 자세히 보면 옛 대웅전은 3층이 '팔작지붕'이고, 복원된 대웅전은 '사모지붕'이다. 복원이 잘못된 셈이다. 복원이란 현실적으로 완벽하게 100%까지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가능한 한 근사치까지 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탑처럼 사모지붕으로 하지 않고 팔작지붕으로 한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추측건대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신 대웅전이므로 아마도 장엄하게 하려고 옛 스님들이 '팔작지붕'으로 지은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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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남인도 여행할 일행 중에 몇 분이 이불재를 찾아와 송년회 겸 차담을 했다. 다식(茶食)은 늘 그랬듯 아내가 준비했다. 청화대 행정관을 지낸 미능(未能) 김도수 사서오경 및 한서(漢書) 연구가와 광주 5.18망월동 묘와 인천대교에 대형조형물을 조각한 서담(瑞潭) 나상옥 조각가와 이웃에 선업을 펼쳐온 경담(鏡潭) 이종만 사회사업가, 그리고 내 동생 친구인 김영집 광주테크노파크 원장과 점심 후 윤영돈 사장이 운영하는 춘운서옥 카페에서 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윤 사장은 자신의 동굴 처소에서 나에게 <소치 허련 200년>이란 서화집을 선물했다. 그의 동굴 처소에는 소치의 성일적루(聲一笛樓)란 글씨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뜻인즉 깊은 산중의 '한 줄기 피리 소리가 들리는 집'으로 고매(古梅)의 향기를 피리 소리로 듣는 문향(聞香)의 경지를 드러낸 글씨 같았다. 윤 사장은 소치 그림을 민간인으로서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분 중에 한 컬렉터인데, 내가 소치 소설을 쓰면 자기 카페 마당에 시비를 세워주겠다고 할 만큼 나에게 호의적인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