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를 위하여 27

(©장명확)  

“흐흐, 난 정말 농사꾼이 되고 싶었지. 아주 전문 농사꾼 말이야. 힘도 좋았고 그걸 마을 사람들도 인정해 주지 않았나? 그래서 서울로 다니면서 전문 농사 책도 꽤 읽었지. 소학교를 졸업하고 농잠에 입학한 것은 농사 책을 읽기 위해서였지. 벼농사에다가 누에나 치고 새끼나 꼬는 그런 농사가 아니라, 머언 외국처럼……, 흐흐, 그래서 지금 이북으로 간 ○○○ 교수님을 찾아뵈었지. 처음 찾아간 나를 얼마나 반겼는지. 그때 비로소 내가 나아갈 길을 잡았네. 그렇지만 원래 내 가슴속에 불을 지펴준 분은, 자네도 알겠지만……. 그걸 난 그 일본인인 요시노 선생님에게 배우지 않았나? 그분은 유독 날 귀여워하셨지. 아마 화단에 있던 꽃에다가 자주 물을 주는 걸 보고 그러셨던 모양이야. 물론 나중에 미루어 짐작한 일이지만. 그런데 어느 날 갑작스럽게 내 몸에 이상이 생겼지. 어디 특별히 아픈 데는 없는데 제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어. 아버지는 물론이고 자네 부친도 내 약을 구한다고 수차례 대구를 다녀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몸은 점점 쇠약해져 갔지. 나중에는 정말 숨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그렇다고 특별한 병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내가 언제……, 하여간 그래서 백천사에 들어가지 않았는가. 그곳에서 동봉 스님의 진면목을 만났지.”

“동봉 스님만을 만난 건 아니지?”

“흐흐!”

“벌써 10년이 넘었지? 내 옆방에 보경이가 있었어.”

처음으로 경묵이에게 서울 여자로 알고 있는 보경이의 이름을 이야기했다.

“그때 백천사는 정말로 신선들의 땅이었어. 저 계곡으로 난 돌다리를 건너면 이곳은 오리나무 굴참나무숲이 우거진 낙원이었지. 새들은 낮이 모자라 밤새도록 울고 계곡의 물소리는 우리의 심장처럼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어. 이곳엔 유난히 비나 눈이 많지. 눈이 한 길이나 쌓이면 저 아래 우리 마을과는 완전히 딴 세상이 되지. 난 가을에 이곳에 들어왔다가 봄에 나갔어. 물론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그냥 이곳에 눌러 있었지. 바람에 눈이 쏠리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어. 그 소리는 마치 싸리 빗자루로 마당을 쓰는 소리와 같지. 겨울밤이면 토끼 노루들이 절 마당으로 내려왔어. 저 앞 텃밭엔 고구마를 심었고, 청리산으로 올라가는 요 위엔 갓을 심었지. 이른 봄에 노랗게 피는 것이 유채꽃하고 똑같았지. 보경이는 이른 봄의 그 꽃을 좋아했어. 저녁이면 아궁이의 연기가 저 청리산 정상 위로 오르고, 눈 쌓인 저쪽 하늘 한 쪽으로 노을이 지면……. 흐흐, 한번 불을 때면 그다음 날 저녁때까지 뜨끈뜨끈했었지. 여기서 나오는 참나무 장작은 그만큼 화력이 좋았어. 이곳엔 못 먹는 풀이 없었어. 아무 풀씨나 따서 삶으면 곧바로 맛있는 풀씨 죽이 되었지. 자네도 알지만 산초나무 까만 씨를 짜서 기름을 내면 그것이 동백기름보다 훨씬 좋았어. 보경이는 그걸로 머릿기름을 했었지. 새카만 머리칼에 윤이 반짝반짝……, 아직도 이곳은 변함이 없는데…….”

내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나보다 경묵이가 더 잘 아는 모습들을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경묵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동봉 스님은 날 거들떠도 보지 않았어. 다람이, 노루들 하고, 심지어 억센 산짐승들 하고는 그렇게 친한 동봉 스님이 이상하게도 나하고는……. 지금도 그 광경을 잊어버리지 못해. 스님이 극락전 뜰 앞에 서면 달려들던 새떼들, 줄을 지어 쪼르르 따라 나오던 다람이 떼들, 눈이 내리면 어김없이 노루들이 방문을 긁었지. 내가 나서면 미친 듯 도망을 쳤지만, 스님이 방문을 열면 한 마리도 도망을 치지 않았어. 스님이 그때 무슨 신통력이 있는 줄로만 알았지. 

왜, 자네 기억 나나? 사람들이 한참 대공골에서 사방 공사를 하고 있을 때 만났던 늑대들 말일세. 그때가 열 살 때였을 거야. 어른들이 한창 배당된 나무를 심고 있을 때, 우리는 대공골 기슭에서 둘이 고상받기를 하고 있었지. 그때 털이 북실북실한 개가 산 쪽에서 나타났지.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그 개를 따라갔지. 그만큼 신기했어. 우리가 개를 볼 기회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 짐승은 우리가 따라가면 계속 산으로 가고, 우리가 멈추면 다시 뒤를 돌아보며 멈췄지.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청리산으로 올라가고 있었지. 그때 갑자기 자네가 말했지. “야, 동수야. 우리 마을엔 개가 없잖아? 그리고 저것들은 산에서 내려왔고, 도망가자!” 그러나 이미 때가 늦었지. 너무 많이 산으로 올라와 버린 거지. 아무리 둘러봐도 어른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 그리고 순식간에 처음엔 두 마리였던 그 개들이 엄청 불어났잖아? 더구나 해는 이미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너도 그랬겠지만 나도 온몸에 털이 곤두 솟았지. 그때 동봉 스님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자네와 나는……, 동봉 스님이 나타나자 슬금슬금 꼬리를 감추던 그 많은 개들. 흐흐! 그때부터 동봉 스님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었지. 먼저 말을 붙일 수가 없었어. 흐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누워 있던 나를 살린 것은 얌전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처자였어. 물론 얌전이라는 것은 스님이 붙여준 별명이었지. 무슨 까닭인지는 몰라도 얌전이는 밤낮으로 일만 했어. 하루 두 끼의 밥 짓는 일은 예사고, 물 긷는 것, 나무하는 것, 모두.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내게 그래도 미음이라도 끓여준 게 얌전이였지. 그러나 그때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어쩐지 그녀하고 말을 하면 동봉 스님에게 무슨 큰 죄나 짓는 것 같아서. 그렇게 오륙 개월이 지났을까? 내 몸은 낫기는커녕 자꾸 더 나빠졌지. 난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네. 그러나 슬픈 생각은 조금도 없었어. 단지 죽을 때는 마을로 내려가서 죽고 싶었지. 그래서 스님에게 마을로 내려가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지. “난 마을로 내려가고 싶습니다.” 그때 스님은 웃었어. “죽으려면 마을로 내려가서 다른 사람들 성가시게 하지 말고 여기서 죽어. 어차피 넌 무덤이 없을 테니까. 여기서 죽으면 내가 불에 태워서 극락왕생 하라고 염불을 잘해 줄게.” 그때 얌전이는 내 옆에서 눈을 깜박이고 있었어. 난 스님의 그 능글스런 눈길을 외면하고 일어났지. 그러나 우습게도 문밖을 억지로 나서자마자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어.”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경묵이가 슬며시 담배를 뺏어 들었다. 내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둘이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했어도 이렇게 서로가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치기는 드문 일이었다. 경묵이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쓰러지고 눈을 떴을 때는 무려 열흘 이상이 지난 뒤였어. 쓰러지고 나서 나를 밤낮으로 간호한 것은 얌전이가 아니고 스님이었어. 얌전이는 없었지. 나는 팔을 움직일 수 있었고, 또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어. 그리고 말을 할 수도 있었지. 그러나 동봉 스님에게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어. “또 마을로 내려가고 싶으냐?” 먼저 말을 붙인 것은 스님이었어. 난 멍청하게 누운 채 눈물만 흘리고 있었지. “왜 얌전이가 아니고 나라서 심통이 났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내 기억으로 그때 밖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어. “이 비 그치면 마을로 내려가라!” 그러나 그때는 이미 마을로 내려가야겠다는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어.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았어. 그저 옆에 얌전이가 있다면 하고 바랐지. “마을로 내려가지 않으려거든 이거나 봐라.” 그게 금강경이었어. 흐흐,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무언가를 얻기 위해, ​무언가가 되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일이 있으므로 그냥 하라는 뜻)’.”

“차라리 그때 출가 낙발을 했다면 이 지경은 안 당하지.”

“왜 내 처지가 불쌍해서?”

“내 처지도 불쌍하고.”

“열심히 읽었지. 처음엔 속으로 읽다가 나중엔 소리 내어 읽었지. 그리고 나중엔 엉엉 울면서 읽었지. 하기야 그건 읽었던 것이 아니야. 소리쳐 외친 거지. 내가 금강경을 읽기 시작하고부터 스님은 내 방에 들어오지 않았어. 다시 처음의 무관심으로 돌아간 거지. 혼자 금강경을 읽었지. 어떤 날은 ‘응무소주이생기심’을 밤새도록 외웠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은 점점 좋아졌어. 예전처럼 점점 살이 붙고 힘이 솟기 시작한 거야. 닥치는 대로 불경을 읽었지. 그때부터 밥을 짓고 나무를 하는 것은 내 차지였어. 부엌에서 불을 때면서도 난 즐거웠어. 그러던 어느 날 밤, 얌전이가 내 방을 들어왔어. 겨울이었지. 그녀는 언 손을 녹이기도 전에 내게 쪽지 한 장을 내밀었어.”

나는 땅바닥을 두 발로 긁어냈다. 경묵이는 뚫어져라 마을을 바라보았다.(계속)